일제의 간담 서늘케 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조선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구축할지며, 강도 일본을 구축하자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구축할 방법이 없는 바이다’_신채호.
‘구축 驅逐 ’이란 몰아서 내쫓는다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의 수많은 항일선언문 가운데 1923년 단재 신채호가 쓴 <조선 혁명선언>은 그들을 구축하기 위한 의지 표명의 내용으로나, 문장으로나, 정신사적으로나,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는 선언문이다.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이 성취한 가장 귀중한 문헌 중 하나이며, 여러 독립선언문 중에서도 대표적인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는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을 최남선의 <3·1독립선언서>, 한용운의 <조선 독립 이유의 서 書 >와 함께 대표적인 독립선언서의 하나로 간주했고, 오히려 이들 선언문을 훨씬 능가할 만큼 민족 독립을 위한 폭력적인 투쟁 이념을 가장 선명하면서도 극적으로 밝힌 선언적 압권임을 증명했다. 최남선의 <3·1독립선언서>, 한용운의 <조선 독립 이유의 서>가 우리 독립운동사 불후의 명문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과 함께 <조 선혁명선언>이 이들과 정족 晶族 을 이루면서 오히려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내용과 함께 단재의 옹골찬 기질과 치열한 삶도 작용했을 터이다.
신채호와 김원봉의 의기투합
1922년 말, 단재 신채호가 머무는 중국 북경의 우거 寓居 에 한 청년이 찾아왔다. 일제 기관원들이 눈이 뒤집혀 쫓고 있던 약산 김원봉 金元鳳, 1898~1958 이었다. 약관 25세의 김원봉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테러단’을 이끌던 의열단 단장이었다. 1921년 5월 상해에서 단재와 함께 반 反 이승만 운동에 참여한 관계로 익히 지면 知面 이 있었다. 김원봉은 1921년 4월 단재가 주도한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에 대한 <성토문>에 반 反 임시정부 계열 인사 54명과 함께 공동 서명 하는 등 단재와는 무장투쟁의 노선을 같이해 왔는가 하면, 국내에서부터 단재의 명성을 듣고 무장투쟁론의 대선배로서 사숙 私淑 하던 중이었다.
김원봉은 그즈음 상해에서 일본군을 궤멸시키기 위한 폭탄 제조를 준비하고 있으면서 북경에 들러 단재를 찾은 것이었다. 의열단은 1920년 9월 단원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11월에는 최수봉이 밀양경찰서를 폭파했다. 1921년 9월 김익상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1922년 3월에는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 등이 상해 황포탄에서 일본 군벌의 거두 다나카를 저격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는 황포탄 사건으로 체포되었던 오성륜이 상해 일본영사경찰서의 유치장을 파옥 破獄 하고 탈출에 성공했다.
의열단은 국내외에서 일제에 가공할, 그리고 신출귀몰한 테러를 감행하 면서 보다 성능이 좋은 폭탄을 만들고자 상해에서 은밀히 준비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이들은 암살과 파괴에 따른 선전 활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김원봉이 단재를 찾게 된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단재와 김원봉은 만나게 되었고, 한국독립운동사의 항일선언문 중 백미인 <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의열단의 대일 對日 ‘암살과 파괴’ 활동에 철학과 사상이 ‘포장’되었다.
단재는 김원봉과 함께 상해로 와서 왜적을 무찌를 폭탄 제조와 시험 과정을 지켜보면서 역사적인 ‘의열단선언문’의 기초에 들어갔다. 단재가 1923년 1월 상해에서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할 무렵은 ‘민족주의 사상에 무정부주의의 방법을 포용한 혁명적 민족주의자의 시기’로 인식된다.
의열단 이론가 유자명과 함께
단재는 상해의 한 여관에서 선언문을 집필하면서 의열단의 이론가인 유자명 柳子明, 1891~1985 으로부터 무정부주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듣게 되었다.
유자명은 3·1운동에 참가한 후 북경으로 망명하여 북경대학의 오치휘 吳稚暉, 이석증 李石曾 등 중국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곤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도 참가하고, 그 후 의열단의 독립운동 노선에 공명 共鳴하여 가입하고, 의열단의 가장 탁월한 이론가로 활약했다.
유자명은 단재가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할 때에 같은 여관에 합숙하면서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조선혁명선 언>에는 무정부주의의 사상이 많이 섞이게 되고, 단재는 무정부주의 사상을 연마하여 이후 아나키즘에 몰입하게 되었다. 단재는 원고를 집필한 지 1 개월 만인 1923년 1월 전 5장 6,400여 자에 이르는 ‘일제에 대한 폭력투쟁의 정당성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역사적 문서일 뿐만 아니라 민족 독립운 동의 새로운 단계와 독립 항쟁정신을 가장 힘차고도 확고하게 천명한’ 격렬한 어조의 선언문을 완성했다.
단재의 이 노작 勞作 은 김원봉과 의열단원들을 크게 감격하게 했다. 단재가 의열단의 요청으로 ‘의열단선언문’을 집필하면서 <의열단선언>이라고 붙이지 않고 명칭을 굳이 <조선혁명선언>이라고 한 것은 의열단의 활동을 넘어 민족주의 혁명을 선언한 의지의 결합이라 하겠다. 사실 이 문서는 의열단만을 위해 단순히 그 단체의 강령과 규약을 작성해준 것이 아니라 의열단의 무력항쟁에 대한 급진적 민족주의 혁명 이념을 부여한 것이었다. 단재의 선언문에는 ‘무정부주의 방법을 포용한 혁명적 민족주의 사상’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약육강 식과 적자생존의 사회 진화론적 민족주의가 결국은 강자(일제)의 지배를 정당화해주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므로 이에 대한 대응 논리를 찾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단재가 이 선언문을 집필할 때는, 그리고 선언문의 내용을 분석하면, 그는 여전히 투철한 민족주의자였음을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선언문을 집필한 뒤부터는 유자명을 통해 중국의 저명한 아나키스트 지도자들과 교류하면서 점차 무정부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 이 당시 단재의 독립운동 방법론은 ‘민중의 직접 혁명’이었다. 갈수록 세력이 강해지는 왜적과 정규전을 통한 독립전쟁은 비현실적이므로 개인 테러 중심의 의열 투쟁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의열단과 이념적으로 일치하게 된 것이다.
의열단은 단재가 쓴 <조선혁명선언>과 별도로 ‘조선총독부 관공리에게’라는 부속 문서를 첨가해 이를 대량으로 인쇄하여 세상에 공표하고, 의열단의 활동 때마다 폭탄과 함께 이를 현장에 살포했다. 의열단 활동에는 반드시 이 선언문이 살포되어 자신들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고 사건과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막도록 했다.
<조선혁명선언>의 주요 내용
<조선혁명선언>은 5개 부문으로 되어 있다.
제1장은 일본을 ‘조선의 국호와 정권과 생존을 박탈해간 강도’로 규정하고, 이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이 정당한 수단임을 천명했다.
서두에서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토를 없이하여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 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천택川澤 ·철도·광산·어장…… 내지 소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체의 생산 기능을 칼로 베이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가옥세·인구세·가축세·백 일세 百一稅 ·지방세·주초세 酒草稅 ·비료세·종자 세·영업세·청결세·소득세…… 기타 각종 잡세가 축일 증가하여 혈액은 있는 대로 다 빨아가고……’라며 일제의 식민 통치를 ‘강도’ 행위로 규정했다. 서두부터가 3·1독립선언에 비해 투쟁적이며 일제에 대한 적대의식을 분명하게 명시했 다. 제1장에서는 일제의 조선 침략의 경제적 수탈 측면에 초점을 두고, 국문·국사 등 민족말살정책을 고발하면서 일제를 한민족 생존의 적으로 가차 없이 선언한 것이다.
제2장은 3·1운동 이후 국내에 대두된 자치론과 내정독립론, 참정권론 및 문화운동을 일제와 협력하려는 ‘적’으로 규정하고, 이를 매섭게 규탄하였다.
“내정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 - 누구이냐? 너희들이 ‘동양평화’ ‘한국독립보전’ 등을 담보한 맹약이 먹도 마르지 아니하여 삼천리강토를 집어먹던 역사를 잊었느냐? ‘조선 인민 생명재산 보호’ ‘조선 인민 행복 증진’에 대해 신명 申明-되풀이해서 말함 한 선언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야 2,000만의 생명이 지옥에 빠지던 실체를 못 보느냐? 3·1운동 이후에도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완화시키려고 송병준·민원식 등 12매국노를 시키어 이따위 광론 狂論 을 부름이니 이에 부화하는 자 - 맹인이 아니면 어찌 간적이 아니냐?”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대두한 대일 유화론자들에 대한 단재의 질타는 매섭다. 일찍이 신라의 최치원이 당나라 에서 반란군 두목 황소 黃巢 를 질책하는 글을 써서 말에서 거꾸러뜨리고, 한말 매천 황현이 친일 매국노들을 규탄하여 반역도배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는 사필 史筆 의 맥을 잇는 글이었다.
‘불멸의 문헌’의 역사적 평가
단재가 민족주의로부터 무정부주의로 전환해가던 ‘과도기’에 집필한 <조선혁명선언>은 1920년대 초반 이후 민족주의 독립운동 노선과 독립운동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강도 일본’에도 정치적, 도의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의열단은 이 선언문이 채택된 시기를 전후해서 더욱 치열한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일제는 의열단을 공포의 대상으로 두려워하게 되었다. 의열 투쟁의 결과 일제는 적지 않은 인명과 공공기관이 살상, 파괴됐다. 의열단원 김상옥은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경의 포위 속에서 접전 3시간 반 끝에 서대문경찰서 경부 구리다 외수 명을 사살하고 총탄이 다하여 최후의 일발로 자결하였다. 이어 의열단원 김지섭은 1924년 1월 5일 일본 궁성에 폭탄을 던지려고 시도하다 동경 니주바시 사쿠라다몬에 투척하였으나 불발되어 일본 감옥에서 옥사했다. 또한 의열단원 나석주는 1926년 12월 18일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고 권총을 난사하여 수 명의 사원을 사살하고, 경기도 경찰부 경부보를 사살한 다음 일경의 추격을 받게 되자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 외에도 제3차 폭탄국내반입계 획, 대구부호암살계획, 북경밀정암살기도, 이종암 사건 등 의열단이 기도하고 실행한 의거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단재 신채호는……
申采浩, 1880∼1936. 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 동에서 신광식(申光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세에 성균관에 입학해서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된다. 같은 해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을 쓰고 투옥되자 그의 뒤를 이어서 논설위원으로 활동한다. 1907년 비밀결사단체 신민회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앞장선다. 1914년 《조 선사》의 저술을 시작한 그는 만주를 여행하면서 광개 토왕 왕릉 등 고구려 고적을 답사한다. 1919년엔 임시 정부 전원위원회 위원장으로,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단장으로 추대된다. 같은 해 신대한의 주필로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는 글을 많이 썼고 1921년엔 북경에서 김정묵, 박봉래 등과 ‘통일책진회’를 만들어 <통일책진회 발기 취지서>를 발표한다. 이듬해 북경에서 조선 역사를 연구해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 구초》 등을 저술한다. 그리고 1923년 의열단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을 만들었고, 국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해 임시정부의 창조파로 활약한다. 1925년에는 1월 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에 <조선사연구초>를 연재하 면서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두게 된 그는 미발표 작품인 <전후 삼한고>를 쓴다. 1928년 대만의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된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아 뤼순 감옥에서 복역한다. 그리고 이듬해 《조선사연구초》가 동지들에 의해 서울에서 출판된다. 1931년엔 6월부터 10월까지 조선일보를 통해 <조선사>를 연재했고, 10월부터 12월까지 <조선상고문 화사>를 연재한다. 57세 때인 1936년 2월, 뤼순 감옥 에서 뇌일혈로 의식을 잃은 후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타국에서 옥사한다. 1945년에는 신채호학사가 설립되 었고, 이듬해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조선사>의 서문을 《조선사론》으로 표제하여 광한서림에서 출판한다.
1948년 《조선상고사》를 종로서원에서 발행했고, 1955 년 단재유고출판회에서 《을지문덕》을 순우리말로 번역·출판한다. 1962년 신채호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이 수여되었다. 그리고 2007년 독립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단재 신채호 전집》을 발행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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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16-12-20 18:19: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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