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을 위한 북디자인의 새 지평 정병규
책의 격 높이는 곳에 그의 호흡과 여백이
북디자인은 책의 얼굴이자 첫인상을 결정짓는 주요 작업이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책에는 책격이 있다. 그 책격을 입혀주는 사람이 북디자이너다.
지난 40여 년간 한 권의 책을 탄생하기 위해 기획하고, 그 책의 고유한 개성을 이미지화하고,
표지는 물론 본문의 글자꼴과 크기, 여백 구분, 종이 선택에 이르기까지
토털 북디자인을 실현한 정병규 디자이너를 인터뷰 주인공으로 초대했다.
지하철 2, 6호선이 환승하는 합정역 7번 출구로 나오자 찬바람이 우르르 몰려든다. 춥다. 그곳에서 정병규 디자이너를 만났다. 그날 맨 마지막에 건넨 질문을 글머리로 푼다.
동북아시아 국가 중 북디자인 수준이 가장 높은 곳은 어딘가요?
중국입니다.
(대답은 아주 간단명료했다. 한국 아니면 일본일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졸지에 머쓱해 진다.)
한국의 수준은요?
꼴찌!
(북디자인은 “사물의 본질을 판단하고 생각의 흐름을 하나의 질서 있는 세계로 인도하며 이미지를 비상시켜 형태로 만드는 일”이 라고 이야기한 사람은 일본의 북디자이너 스기우라 고헤이이다. 그의 디자인에 깊이 공감하는 북디자이너로는 중국의 뤄징런, 대만의 황융쑹, 그리고 한국의 정병규라고 한다. 스기우라 고헤이는 1960년대 중반 이후 북디자인을 책표지에 한정된 그래픽디자인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는 북디자인을 한 권의 책 전체를 ‘유기적으로 구축하는 건축 행위’로 간주했다. 그런데 중국의 뤄징런은 책의 건축적 접근뿐만이 아니라 중국 고서적이 지닌 전통문화와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는 일본 북디자 이너들을 압도하는 발상이었으며, 그는 현대 북디자인에서 ‘전통과 혁신’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포획했다고 본다. ‘전통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향해 가는 길’임을 일깨워준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유구한 인쇄문화의 전통을 가졌다고,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를 개발했고 독창적인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자랑만 해온 꼴이다. 한국 역사와 문화 속에 내재된 진정한 옛 서적의 원리와 해석에 대한 탐구나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에는 지나치게 소홀했다. 정말 한국의 북디자인 수준이 제자리를 찾으려면 지금 북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사람의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현재 한국의 북디자인계 맏형인 정병규 대표가 ‘중국’을 동북아시아의 북디자인 일등국으로 지목하는 이면에는 한국 북디자인계의 실상을 향한 쓴소리로 들린다.)
지금 우리는 출판, 편집, 북디자인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으며, 정병규 디자이너님은 이 가운데 어디에 해당하나요?
혼란스럽지요. 출판 디자인은 책으로만 집중되는 편견이 있고, 책을 만드는 일의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도 있지만 왠지 낯설어요.
편집 디자인을 기능적 의미만 강조한 것 같아요. 그래서 북디자인이라는 말이 가장 적절한 표현인 것 같고, 나 역시 북디자이너로 불리는 게 좋아요.
정병규 디자이너님은 언제부터 책을 사랑하게 됐나요?
영상 매체가 없던 시절에 태어났으니까 세상과 만나는 첫걸음부터 자연스럽게 책을 접하게 됐지요. 특히 아버지의 직업이 군인이어서 나는 할머니 손에서 컸지요. 어린 나의 유일한 장난감은 책이었어요. 경북중과 경북고를 다녔 는데, 나는 학교 교지 만드는 일에 열심이었고, 문학의 매력에 깊이 빠졌었지요. 당시 경북고 미술부는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난 미술부장 일도 봤어요.
하지만 부모님이 원한 공부도 있었을 텐데요?
법대 진학을 원했어요. 4남 1녀 중 내가 장남이었거든요. 그러나 난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입학 원서를 넣었지요. 경북고 출신이 서라벌예대 진학은 당시로선 파격이었지요. 정해진 길보다 뒷길을 택한 거예요.
당시 서라벌예대 분위기는 어땠나요?
날씨가 흐리면 흐리다는 건으로, 날씨가 맑으면 맑다는 연유로 아침부터 한잔 걸치는 분위기였죠. 우리 문단의 쟁쟁한 대가들이 망라한 지도교수들과 가까이 지내는 건 더없이 좋았으나 면학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무나 작가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고려대학교 불문학과로 편입했군요?
하지만 문예에 대한 꿈을 완전히 접을 순 없었지요. <고대신문>에 들어갔고 편집국장 노릇을 했는데, 편집과 활자 다루기에 관한 맛을 지겹도록 경험했죠. 참 재미있고 즐거웠어요. 그런데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고대 출신 최영주 등의 석방을 요구하는 기사를 실었으며, 이를 빌미로 대규모 학내 시위가 있었고, 끝내 휴교령이 내려졌지요. 편집국장인 나는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요.
(유신 체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1975년 <고대 신문> 편집국장이던 정병규는 구속 학우의 석방을 요구하는 ‘대학 신문인 언론 선언’을 직접 작성하고 제작한 혐의로 도피하느라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대 입학 31년 만인 지난 2000년에 졸업장을 받았다.)
출판계와 인연을 맺은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1975년 월간 <소설문예>의 편집국장이 됐지요. 이 문예지는 홍상수 영화감독의 모친이신 전옥숙 여사가 발행인이었는데, 전 여사는 훗날 영화사 씨네텔 대표이기도 합니다. 당시 이 문예지의 주간은 소설가 이청준 선생이었고 송영, 이제하, 강호무 작가들이 이 문예지의 단골 문인들이었지요.
(이후 정병규 대표는 당시 유명 출판사였던 신구문화사에서 출판산업의 선구자 중 한 분인 이종익 사장의 신망을 받았고, 1976년에는 민음사 박맹호 사장을 만나게 된다. 아마 이런 분들을 만난 것이 북디자이너 정병규를 있게 한 자양분이었을 것 같다.)
민음사로 갈 때 일화가 있지요?
신구문화사의 동료였던 강희주 씨가 다리를 놨어요. 박맹호 사장과 사고방식이 비슷한데, 두 사람이 만나면 시너지 효과가 클 것이라기에 일단 만났지요. 그런데 ‘난 교정은 못 본다. 아침 출근도 어렵다’고 했죠. 사실 이 정도면 당시 출판사 편집부의 조직원이 되긴 원초적으로 틀린 거죠. 그런데 박맹호 사장은 짤막하게 ‘괜찮다’였어요. 그래서 몇 달 동안 오후에 출근 했고, 교정이 아닌 당시 용어로 ‘와리스께’라고 하던 레이아웃에 집중했죠. 하지만 조직의 보이지 않는 분위기에 눌려 다른 직원과 똑같이 아침 출근도 했고, 본격적인 책 만들기 작업에 빠졌지요.
(그 무렵 ‘새롭지 않으면 썩는다면서 늘 새로운 모험을 시도하게 했던 박맹호 사장에게서 받은 영향은 그 후의 삶에 크게 작용했다’고 정병규 대표는 회고한다. 그의 첫 작품이라고 할수 있는 ‘오늘의 작가상’ 첫 수상작 한수산의 소설 《浮草》 표지는 채색 회화를 주로 사용하던 당시 표지 디자인의 고정 관념을 깨고 단색에 제목 활자를 크게 키워 ‘튀게’ 만들었다. 책표지 만들기를 ‘장정’으로 불리던 당시에는 혁명 같은 일이었다고 평가받았다.)
그러던 민음사를 나와 홍성사를 설립하셨지요?
지금은 저명한 목사로 활동하는 친구 이재철과 함께 1978년 홍성사를 설립했지요. 당시 이재철 사장은 중동의 건설 붐을 타고 해외 근로 자를 송출하는 항공사를 경영했는데, 이는 독점 사업이었어요.
(홍성사에서는 작가 서정인, 강호무, 이제하 등의 작품을 ‘홍성 정예 작가 신서’ 시리즈로 출간했다. 반응은 찻잔 속의 폭풍이었다. 당시 신인 작가이던 박범신의 작품집 《토끼와 잠수함》은 그를 인기 작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정병규의 주력은 인문, 사회과학 분야였다. 《소유냐 삶이냐》(에리히프롬),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 《불확실성의 시대》(G. H. 갤브 레이스), 《산업 사회의 계급과 계급 갈등》(랄프 다렌도르프) 등을 ‘홍성 신서’로 내놓았는데, 세계적 학자들의 저서를 국내에 소개하자 학계의 인식 지평이 삽시간에 넓어졌다. 이 가운데 《소유냐 삶이냐》는 인문서이면서도 30만 부가 팔리는 대박이었다. 이런 기획의 근원지는 정병규의 ‘메모 노트’였다. <소설문예> 편집장 시절 부터 참고하려고 외서 전문 서점을 드나들며 해외 신간 정보를 수집할 때 꼼꼼하게 메모한 분량은 대학 노트 일곱 권쯤 되는데, 이것이 기획의 가장 요긴한 밑천이 됐던 것이다.
그 당시 ‘홍성 신서’의 표지 디자인은 굵고 가는 선을 대비시켜 테두리를 쳤다. 시각 이미지를 부각시킨 제목의 글자꼴도 ‘홍성 신서’ 표지 디자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8개월 남짓한 기간에 17권의 책을 펴냈던 그의 열정은 ‘홍성 신화’로 불렸다.)
그런 가운데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어요?
그보다 앞서 1979년 여름 일본 도쿄에서 2개월 동안 ‘유네스코 편집자 트레이닝 코스’가 열렸지요. 당시 박맹호 사장이 출판협회 부회장이었는데, ‘가서 잠시 쉬다 오라’는 거예요. 그 과정에 많은 생각을 했죠. 거기서 북디자이너가 나의 미래라는 생각을 굳혔죠. 자료도 광범위하게 모으고, 밤 12시 전에는 집에 들어간 적이 없었지요. 그러면서 민음사와의 거래 관행도 만들 었죠. 그러다가 해외여행 자유화가 됐고, 마침 동생이 파리에서 생활하고 있어 그곳으로 일정을 잡았죠. 공부하는 유학이 아니라 유럽의 북디자인 자료와 실물을 직접 보고 싶었어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체류 경비는 마련했는데, 정작 식구들이 먹고살 생활비를 빼먹은 거예요. 이를 민음사, 열화당 등 몇 개 출판사에서 책임져주었지요. 고마웠지요.
(짧으나마 시각 커뮤니케이션의 본고장에서 견학과 관학을 동시에 마친 정병규는 한국에 돌아와 ‘정병규디자인’을 설립하고 새로운 책의 개념을 펼치기 시작했다. 첨단 미디어와 달리 책은 사람의 손이 닿아야 비로소 그 세계가 열린다. 그리고 책은 물질의 상태를 뛰어넘어 상상의 논리와 감동의 공간을 인간에게 제공한다. 그래서 정병규는 ‘책은 살아 있는 생명’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북디자인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저자와 독자, 그리고 편집인 간의 커뮤니케이션 매체여야 하고, 북디자이너의 독자적인 개성이 그곳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병규에게 있어 책은 어떤 의미인가요?
책은 나에게 애와 증을 동시에 일으키는 대상이죠. 삶의 희로애락과 등가물인 셈이죠. 그러나 50대 이후엔 생각이 바뀌었어요. 책은 나의 존재 이유예요. 책은 문명의 조건이기도 하고, 인간의 조건이기도 해요. 책은 인류의 생각을 나누고, 인류에게 지식을 알리고, 또 인류의 문화를 축적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도구예요.
한국의 북디자인이 처음으로 시도된 시기는 언제부터인가요?
책의 역사와 함께 시도됐다고 봐야죠. 개화기 이후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에도 분명 북디자인적 요소가 다분히 있어요. 다만 직업적인 북디자이너가 없었을 뿐 그런 분위기를 감각과 여기로 실행한 분이 있었죠. 그 당시에는 편집과 디자인을 나누지 않았어요. 당시 서울 신문사에 근무하던 이중한 선생은 토털 편집인 이었지요. 소설가 김승옥 선생도 감각이 풍성한 북디자이너였다고 봐요. 태평양화학의 사외보 <향장>의 편집장 오규원 시인도 빼어난 시각디자이너셨어요. 여성지의 편집자로 이름을 날린 백승철, 민윤기 선생 등도 기억에 남는 분들이에요. 아무튼 어느 날 불쑥 튀어나온 것이 북디자이너가 아니죠.
(그렇다. 이 같은 분의 면면이 있었기에 우리의 북디자인 역사가 있는 것이다. 그 역사를 정리하는 것도 꼭 이루겠다고 약속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정병규는 북디자이너라는 자리매 김을 위해 독보적인 길을 개척했다.)
매킨토시가 등장하면서부터 시각디자인 전반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큽니다. 정병규 디자이너님은 이를 어떻게 활용하셨나요?
매킨토시의 구체적 시스템이나 운영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 인해 교수와 학생의 구분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매킨토시의 능력은 놀랄 만큼 탁월해요. 아날로그로 할 때는 교수가 그은 직선과 학생이 그은 직선은 확연히 차이가 있었 어요. 그런데 매킨토시로 그은 직선은 교수나 학생이나 똑같아요. 오히려 학생이 선생을 앞질러가는 경우도 있어요. 이것은 세계적인 추세이고 심각한 현상이에요. 삶의 경험 따위는 무시 해도 된다는 거예요. 따라서 디자이너는 점차 익명화되고 있어요. 질보다 양만이 앞서는 거예요. 디자인의 결과물은 점차 퇴보하고 있어요.
상상의 영역을 기계가 빼앗기 때문이에요. 밤무대의 의상처럼 화려할 뿐 디자인일 수 없는 결과물이 범람하고 있어요. 그것을 개성이나 효율성으로 포장하지만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만 가져올 뿐입니다.
북디자인의 구성 요소는 무엇인가요?
이미지와 활자, 그리고 종이입니다. 기획된 이미지이든 아니든 이미지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야지요. 사용된 활자의 종류가 적으면 매우 안정되고 단정해 보이지요. 반면에 활자의 종류가 많으면 다채롭고 호기심을 느끼게 하지요. 종이는 이미지와 활자를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북디자인에서 대표적인 물질이 종이예요. 그러므로 이 세 가지 구성 요소들을 ‘시각 문법’에 의해 독창적으로 결과물을 생산 해야지요. 단순히 안과적 의미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북디자인의 구성 요소가 담은 역사와 예술을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타이포그래피는 북디자인의 절대적 요소인데, 우리 한글의 디자인적 가능성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글은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이지만 반면에 불편한 문자이기도 해요. 한글은 《훈민정 음해례본》이라는 매뉴얼을 가지고 태어난 문자 예요. 그래서 그 헌법을 어겨선 안 되지요. 그러므로 대학에선 한 학기쯤 《훈민정음해례본》 에 대한 강의를 반드시 해야 합니다. 한글 폰트 개발의 역사는 30년쯤 됩니다. 하지만 본문용 활자는 납활자를 쓰던 시절에서 한 발짝도 나아진 게 없어요. 부끄러워요. 최근 폰트 회사들이 꾸역꾸역 개발하고 있는 글꼴들은 정말 한숨 나게 해요. 거기에다 한글을 풀자는 주장도 있습니다. 변화도 좋고 개혁도 좋지만 결코 건드려선 안 될 것이 있어요. 훈민정음을 창제할때 이미 사용 매뉴얼을 문서로 작성했어요. 그 매뉴얼의 테두리 안에서 변화를 모색해야 합니 다. 이것이 알파벳과 한글의 차이예요. 특히 갤리그래피라는 한글을 너무 혹사하고 있어요.
이런 것이 한국 북디자인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요인이지요.
종이책의 위기는 북디자인의 미래마저 불투명 하게 만드는 건 아닌가요?
그렇지 않아요. 책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린 문제예요. 시각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분명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이는 디자인을 통해서 책의 이미지를 변화시킬 풍요로운 개척의 시대요, 좋은 기회라고 봐야죠. 책은 주인이 많을수록 좋아요. 출판사 사장도 책의 주인이고, 책을 인쇄하는 사장도 책의 주인이고, 제본하는 사장도, 그 책을 산 독자도, 그 책을 만든 디자이너도 모두 책의 주인이에요. 이 많은 책의 주인이 결코 종이책의 위기를 가만히 보고만 있질 않을 겁니다. 그 많은 주인은 분명히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책을 만들어 한결 책의 격을 높여줄 것입니다.
많은 책을 만들면서 본인만이 아는 모험이나 파격을 시도했을 텐데요?
북디자인의 매력은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거예요. 따라서 실험의 연속이에요. 실험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디자이너의 역량을 판가름하지요. 하지만 그 실험을 티가 나게 해서는 안 되죠. 항상 감추어야 합니다. 감추어진 실험, 곧 그것이 모험이고 파격이니까요.
어떤 클라이언트가 마음에 드시나요?
돈을 많이 주는 의뢰자가 좋을 수 있겠죠. 하지만 출판사가 모두 영세한 상태인데 나만 디자인 비용을 높인다고 선뜻 주는 클라이언트는 없어요. 어느 면으로 보면 내가 가장 싼 북디자이너인지도 몰라요. 출판사 주머니를 누구보다잘 알고 있으니까 비싸게 부를 수가 없어요. 그보다는 내게 무조건 일감을 던져주고 고민하게 하는 클라이언트가 최고의 클라이언트지요. 긴말이 필요 없잖아요.
요즘은 어떤 일을 구상하고 계신가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시각적인 인문 분야 책을 100권 정도 선정해서 펴내고 싶어요. 근대 이후의 자료를 찾아 80여 권의 후보 목록을 작성했는데, 곧 나머지도 끝낼 겁니다. ‘불황일 때 독점적 아이디어로 승부하라’는 말은 정말 와 닿는 진리예요.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 출판계는 현재 배가 부른 상태예요. 배가 부르면 발밑이 안보인다잖아요. 파리 기메박물관에 들렀는데, 1층에 동양권 국가의 책이 디스플레이 되어 있어요. 한국 관련 책은 단 세 권뿐이었어요. 정말 부끄럽고 기가 막혔어요. 우리 문화의 바탕을 알리는 책이 그곳을 채울 수 있도록 내가 그일을 하고 싶어요.
북디자인계에는 ‘정병규 유파’가 있다고 합니다.
정디자인을 오랫동안 운영했으니 약간의 가까운 동료, 후배가 있지요.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그런 유파를 일부러라도 만들고 싶어요.
결과물에 대한 친근성이나 디자인에 관해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유파를 만들면 힘이 되잖아요. 결과는 항상 제3자가 참견해야 이뤄지잖아요. 교양으로의 디자인 시대, 자기가 좋아서 하는 디자인 시대가 곧 올 거예요.
이럴 때 새로운 디자인의 가능성도 보일 거예요. 그런 가능성을 얻어내려면 하나의 유파가 형성되어 에너지를 축적하는 것은 바람직하니 까요.
(국내 북디자이너 1세대로 불리는 정병규 대표는 여전히 깐깐하다. 그동안 책은 정보를 지배했고, 예술을 지배했다. 책은 지나치게 오만해졌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를 맞아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 어떤 것은 사라지기도 하고, 어떤 것은 새롭게 태어나기도 한다. 인터넷의 생활 화와 e-Book이 새롭게 탄생함으로써 그것이 책을 대체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역시 책은 책이다. 정병규 디자이너의 이런 강의는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정병규 디자이너는……
1946년 대구 출생. 경북중과 경북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불어불문과 학사.
1983년 프랑스 에콜 에스티엔느에 입학했다. 1975년 <소설문예> 편집부장을 지냈으며, 민음사 편집부장과 홍성사 주간을 맡았다. 1984년 정디자인 실을 설립. 중앙일보 편집국 아트디렉터와 경원대 초빙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정병규학교 대표를 맡고 있다.
2010년 제51회 한국출판문화상 백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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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17-01-12 10:58: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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