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책들은 분류기호에 따라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호의 의미를 알면 누구나 쉽게 책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 기호가 사랑을 찾아가는 지도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삶에서 만나는 수많은 의문들과 숙제들도 그 기호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면 도서관이 더욱 풍성한 장소가 될 듯합니다.
2003년 개봉한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이하 ‘봄곰’)라는 독특하면서도 모호한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유쾌, 상쾌, 통쾌’라는 카피의 통신회사 CF를 비롯해 많은 CF를 통해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CF 감독 ‘용이’의 영화 데뷔작입니다.
용이는 CF감독 시절 ‘영상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수려한 영상을 만들어내는데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장기는 영화 <봄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관객들에게 풍부한 색감과 질감으로 맛있는 영상을 선사합니다.
“이것은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의 시작입니다”
개봉 당시 <봄곰>은 CF를 연상케 하는 감각적인 영상은 돋보이지만 ‘로맨틱 추리극’, ‘미스터리 멜로’를 표방한 것치고는 이야기가 너무 예상 가능하고 밋밋하다는 혹평을 들어야 했습니다. 또한 배두나, 김남진을 비롯해 오광록, 윤종신, 엄태웅, 권오중, 한영애 등 화려한 출연진과 이색적인 카메오들이 등장했지만 흥행에도 실패를 한 영화입니다.
이처럼 <봄곰>은 평단과 관객들에게는 다소 외면을 당했지만 영화의 배경과 중요 소재가 도서관과 책이라는 점 때문에 도서관 사서들에게는 뜨거운 관심과 환영을 받았습니다. 도서관 사서였던 저 역시도 도서관이 많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망설임없이 이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영화 <봄곰>은 기본적으로 사랑에 늘 실패하지만 언젠가는 운명적 사랑을 하게 될 것이라 믿고 있는 주인공 정현채(배두나)가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대형마트에서 일하고 있는 현채는 아버지(오광록)의 부탁으로 도서관에서 화집을 빌려다주는 심부름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화집에서 다음과 같은 메모를 발견합니다.
나는 네가 너무 좋아, 봄날의 곰만큼.
난 당신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귀여운 곰같이 사랑스럽답니다.
이것은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의 시작입니다.
다음 책은 청구기호 R/740.27/C4701 Gustave Caillebotte ‘창밖의 남자’입니다.
도서관의 책을 식별할 수 있는 좌표와 주소
현채는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메모에 적힌 다음 책을 찾아보지만 책에 적힌 메모들을 하나씩 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그 메모들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믿게 됩니다. 도서관 화집에 메모를 남기는 독특한 사랑고백에 감동한 현채는 화집에 적힌 메모의 내용을 단서로 운명적 사랑을 찾아 나섭니다.
이처럼 도서관 책을 매개체로 사랑을 추리해 나가는 방식은 프랑스 작가 카롤린 봉그랑의 소설 《밑줄 긋는 남자》와 유사합니다. <봄곰>의 처음 제목도 <밑줄 긋는 남자>였다고 하니 영화가 소설의 기본 골격을 차용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도서관 사서에게 <봄곰>이 소설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도서관은 주인공이 알콩달콩한 연애를 펼치는 배경, 즉 병풍에 지나지 않았지만 <봄곰>에서는 ‘청구기호(Call Number)’라는 도서관 시스템적 요소가 영화의 중요한 장치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봄곰>에서 현채는 메모에 적힌 ‘R740.27C4701’, ‘R750.61E2579’, ‘R749.61E2579’ 등의 청구기호를 보고 책을 찾아냅니다. 청구기호는 도서관에 있는 책들의 물리적 위치를 나타내주는 일종의 주소, 좌표라고 할수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보면 마치 암호와 같은 청구기호에는 숫자와 문자를 조합하는 나름의 규칙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화집인 ‘Gustave Caillebotte’의 <창밖의 남자>라는 화집의 청구기호 ‘R 740.27 C4701’를 통해 그 규칙을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맨 앞에 있는 글자 ‘R’은 별치기호로 참고자료(Reference)를 의미합니다. 별치기호는 책의 형태와 성격을 나타내 주는 기호로써 화가들의 화집은 대부분의 도서관에서 참고자료로 구분되어 별치기호 ‘R’을 사용합니다. 그 이외에도 정기간행물(Periodical)은 ‘P’, 시청각자료 (Audio Visual)는 ‘AV’, 학위논문(Dissertation)은 ‘D’ 등을 별치기호를 사용합니다.
도서관 이용자보다 관리자 입장에서 만들어진 산물
다음으로 ‘740.27’은 분류번호로 예술(드로잉, 장식예술)이라는 책의 주제를 의미합니다. 우리나라 도서관에서는 책의 주제를 크게 열 가지로 구분하는 분류법인 DDC(듀이십진분류법), KDC(한국십진분류법)을 주로 사용합니다. 740은 DDC를 사용하여 분류한 번호입니다.
마지막으로 ‘C4701’은 저자기호로 책의 지은이 ‘귀스타프 카이유보트(Gustave Caillebotte)’를 의미합니다. 즉 지은이의 이니셜을 기호화한 것으로 저자기호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도서관에 서는 대부분 저자기호를 만드는데 ‘‘리재철 저자기호표’ 또는 ‘CutterSanborn 저자기호표’ 규칙을 따릅니다.
이 밖에도 청구기호에는 연도와 권차를 표시해 주는 권연차기호, 동일한 책이 몇 권 있는지를 알려주는 복본기호 등으로 구성되어 도서관 이용자가 책을 식별할 수 있도록 좌표와 주소처럼 유일성을 지닙니다.
책의 형태, 성격, 주제, 저자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고유기호가 ‘청구기호’라는 명칭으로 사용되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과거 도서관은 지금 과는 달리 자료실을 개방하지 않고 이용자들이 원하는 책을 사서가 찾아 주는 시스템으로 서비스를 했습니다. 즉 과거에는 자료의 관리, 인력 등의 문제로 도서관을 폐가제로 운영하였는데 이 때 도서관 이용자들이 필요한 책을 사서에게 청구할 때 적어주던 기호가 바로 ‘청구기호’였습니다.
이 때 사용하던 명칭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의 도서관이 이용자들에게 자료실을 개방하는 개가 제로운영하고 있어 ‘청구기호’라는 명칭이 시의적절하지는 않습니다만 어쨌든 그 명칭은 현재까지 도서관에서 그대로 사용되고 있으며 도서관의 모든 책은 청구기호 순서대로 책장에 배열되어 꽂히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청구기호보다는 경험으로 해결
청구기호는 도서관 사서에게는 책을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정리할 수있게 해주는 수단이 되고, 이용자에게는 필요한 책을 보다 빨리 찾을 수있게 해주는 수단입니다.
그런데 이 청구기호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규칙에 의해 조합되지만 도서관 사서가 아닌 일반인 입장에서는 다소 어렵고 생소합니다. 어쩌면 도서관 이용자보다는 관리자 입장에서 만들어진 산물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도서관 자주 찾는 이들은 청구기호가 지시하는 위치로 문제없이 찾아가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사실 적지 않은 이들이 청구기호보다는 경험에 의해 책을 찾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은 ‘이쪽 책장에는 동화책이 많더라’ 혹은 ‘저쪽 코너에는 그림책이 있더라’ 등의 축적된 경험과 기억에 의해 읽고 싶은 책에 접근합니다. 그래서 어린이 도서관에는 책을 책장에 배열할 때 책의 형태와 성격을 먼저 고려합니다.
영화 <봄곰>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청구기호를 통해 쉽게 책을 찾지만 현실에서는 그리 녹록치가 않습니다. 사실 도서관 초보 이용자들이 사서의 도움 없이 청구기호만으로 책을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도서관에서도 이러한 점을 알기에 사람 들이 읽고 싶어 하는 책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책장 양 옆에 청구기호 배열 순서를 표지판으로 만들어 붙여놓기도 하고, 청구기호 출력할 수 있는 프린터를 별도로 비치해두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용자들의 고충이 완벽하게 해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여러 권의 책을 사서에게 찾아달라고 하는 것은 이용자나 사서에게나 매우 번거로운 일입니다. 사서와 이용자 모두를 위해 책의 주소 혹은 좌표를 보다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섬세하고 친절한 서비스가 도서관에 필요하다고 봅니다.
삶의 의문과 숙제도 쉽게 풀어나갈 수 있다면
가령 청구기호를 출력해 줄 때 책의 위치를 자료실 평면 배치도 위에 표시를 해준다든지,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길 찾기 서비스처럼 검색대에서 책이 있는 곳까지 가는 길을 알아보기 쉽게 동선을 그려서 함께 출력해주는 서비스를 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또한 자료실 안내도나 표지판도 ‘문학 자료실’, ‘사회 과학 자료실’ 등 사무적이고 딱딱한 명칭보다는 ‘시의 세계에 빠져보시려면 이쪽으로’ 혹은 ‘역사의 한가운데 서보시려면 저쪽으로’ 등 재미있고 이색적으로 꾸며 보는 것도 이용자들의 이해를 돕는 데 좋을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도서관 이용자들이 책과 좀 더 빠르고 쉽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도서관과 사서가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들이 쌓이고 쌓이면 영화 <봄곰>에서 주인공 현채가 도서관 청구기호를 따라가며 사랑을 찾아가듯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삶 속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의문과 숙제를 도서관 청구기호를 통해 보다 쉽게 풀어나갈 수 있게될 것입니다. 어쩌면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그런 노력을 쌓아가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통해 도서관 청구기호의 의미를 조금이나 알게된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봄날의 곰보다 더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일 것입니다. 적어도 도서관 사서에게는 말입니다.
사족 하나, 영화 <봄곰>에 나오는 도서관에서는 이야기 전개상 ‘참고자료’인 화집을 대출해주지만 대부분의 도서관에서는 이용 및 보존의 문제로 대출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사족 둘, 2010년 개봉한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액션 영화 <레드>에서도 도서관 청구기호가 사건을 풀어가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사족 셋, 도서관 책에 메시지를 적어 사랑을 전하는 것이 로맨틱하고 기발한 프로포즈 방법일 수는 있겠지만 공공재산인 도서관 책에 낙서를 하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될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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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17-02-09 10:38: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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