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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그리운 부석사>의 영주 부석사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정호승 시 <그리운 부석사>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정호승 시인의 <그리운 부석사>는 그의 다른 시집에서도 읽었지만, 2005년에 구매한 시선집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컬러판을 곁에 두고 마음이 애잔할 때 자꾸 펼쳐본 시다. 정호승 시인은 사랑의 명상가, 혹은 전령사로 그가 살며 사랑하며 껴안은 기쁨과 슬픔, 외로움을 읽는 이에게 따뜻하고 부드럽게 전해준다. 그의 등단은 화려하다. 한국 일보 신춘문예 동시(1972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1982년)에 당선되어 3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등 베스트셀러 시인이다. 이후로 산문집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를 펴내 많은 독자를 위로하고 있다.

“세상 속에서 홀로 일어나세요. 용서하고 용서받으세요. 사랑을 시작하세요. 바로 당신이 용기입니다.” 정 시인은 이렇듯 낮은 목소리로 사람을 다독인다. 겸허하고 따뜻하고 부드럽다. 그는 <그리운 부석사>가 실린 시집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배고플 때 밥을 먹지 밥그릇을 먹는게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밥그릇을 먹고 있다. 시는 밥이지 밥그릇이 아니다.
결국은 인간이라는 밥 사랑이라는 밥…… 그 밥 한 그릇을 그대에게 올린다……. 
나는 생각해본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밥을 먹었는지 밥그릇을 탐했는지……. 이번의 걷기 여행이 마무리되면 그 답이 나올 것같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 선암사 해우소 앞 /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정호승 시 <선암사> 
 
정호승 시인은 선암사로 가라고 등을 떠밀었지만 내가 탄 기차는 그리운 부석사(浮石寺)로 가고 있었다. 서울에서 대중 교통을 이용해 부석사로 가려면 고속버스를 타고 영주에 도착, 부석사행 버스를 이용하는 방법과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여유롭게 가는 길이 있다. 기차를 이용하면 영주까지 가지 말고 풍기에서 내려야 한다. 영주까지 갔을 때 부석사행 버스는 풍기읍으로 되돌아와 부석사로 가기 때문이다. 풍기역 에서 나오면 곧바로 버스 정류장이다.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서 27번 버스를 타면 소수서원 → 단산 → 노곡 → 부석 → 임곡 입구를 거처 종점인 부석사에 승객을 풀어놓는다. 입춘이 지난 지 한참이 되었지만 부석사 주차장은 겨울의 매운 바람이 몰려다녔다. 절로 가는 길옆에 나물이며 먹거리를 파는 할머니들이 중무장한 옷차림으로 웅크리고 길손을 맞이한다.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부석사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입산하면 <太白山 浮石寺>라 적힌 일주문에 들어선다. 문 없는 문, 일주문을 지나면서 ‘태백산 부석사’라는 현판 글이 의아해 지도를 펼쳐봤다. 나는 지금껏 ‘소백산 부석사’로 잘못 알고 있었다. 영주시 부석면 끝자락에 있는 부석사는 봉화군 물야면과 인접해 있다. 물야면이 강원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그 뒷산은 태백산이 지척인 선달산이다. 백두대간의 마루금이다. 그렇다면 부석사는 소백산에서 멀어지고 태백산이 가까울 터. 좀 더 자세히 보자면 태백산(太白山)과 소백산(小白 山) 양백(兩白) 사이에 있는 봉황산 중턱에 부석사는 터를 잡았다. 1,400여 년 전의 일이다. 지금도 잘 닦아진 도로를 빼고 나면 오지 중 오지인데 그 옛날은 어떠했을까. 676년(신라 문무왕 16년) 화엄종의 종조(宗祖) 의상국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절터는 풍수적 의미가 깊겠지만 나는 알 턱이 없다. 의상이 절을 세우려 할 때 다른 세력이 거칠게 저항하며 방해하는 무리가 많았다. 이에 중국 유학 시절 의상을 흠모하던 선묘낭자의 화신이 나타나 조화를 부려 커다란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려 방해자를 물리치고 절을 지었다 하여 부석사(浮石寺)다. 선묘신룡이 들었다는 바위, 부석(浮石)이 지금도 있다. 

 
흙길을 걷다 보면 당간지주가 기다린다
 
슬슬 겨울이 질 때쯤의 펼쳐진 하늘은 진하고 파랗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 범종각, 안양루, 무량수전으로 향하는 길은 흙길이어서 걷기에 편하고 한적하다. 길 양편에 곧게 뻗어 있는 은행나무 가로수는 가을이 절정이란 생각이 들자 설렌다.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색종이처럼 휘날릴 거란 상상을 하면 누군들 부석사 길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어디 그뿐인가.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 펼쳐진 사과나무밭에 열려 있을 빨간 사과의 아름다운 빛깔을 떠올려 보시라.

그렇지 않아도 걷고 쉬고 즐기는 행복한 소백산 자락(自樂)길 가운데 과수원길 구간이 있다. 부석사 초입이다. 봄이면 사과꽃 하얀 길이었다가 여름이면 녹음 짙은 녹색길, 가을이면 세상이 온통 빨개 지는 사과밭 사이를 지나는 길이다. 매표소에서 절의 경내인 천왕문까지는 1킬로미터 남짓이다. 길은 적당하게 오름을 계속하면서 일주문을 멀리하고 오른쪽으로 강줄기처럼 유연하게 휘어 돈다. 일주문과 천왕문 중간쯤을 걸었을까. 당간지주가 기다리고 있다. 길 왼편에 4.28미터 높이로 우뚝 서 있다. 보물 제255호. 당간은 절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대 불(佛)·보살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한다. 이 깃대를 고정해주기 위해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부석사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때 작품이다. 당간지주 사이에 연꽃잎을 장식한 원형의 간대석이 놓여 있다. 소박하고 아름다우며 간결하고 단아하다.

조곤조곤 걸어 오르는 비탈길이 끝나는 지점에 돌계단이 시작되고 천왕문 안으로 안내한다. 사천왕이 지키고 있는 문을 통과하면 부석사 경내다. 범종루가 올려다보인다. 안양루, 무량수전으로 가려면 범종루를 받치고 있는 나무 기둥 사이를 통과해야 한다. 범종루 받침 기둥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말없이 보여주었다. 나무 기둥은 갈라지고 빛이 바래 있었다.

범종루에는 목어, 법고, 운판이 걸려 있었다. 목어는 머리와 비늘이 용이었다. 그냥 물고기가 아니었다. 부석사가 해동 화엄종 수사찰(首寺刹)일 수밖에 없는 단초를 보여주는 듯했다. 용이 되어서라도 의상 대사의 구법 의지를 지키려 했던 선묘낭자의 연모의 정이 떠오른다. 구도자에 보냈던 여인의 사랑이 신앙의 힘으로 승화된 것이다. 천왕문에서 무량수전으로 이어지는 108개 돌계단은 극락정토에 다다르는 찰나의 연속이다. 수량수전까지 딛고 올라야 하는 108개의 돌계단은 아홉 개 석축으로 구성돼있다. 화엄의 구품정토(九品淨土)를 상징하고 있는 것. 내가 걷는 발걸음 하나라도 허투루 걸을 수 없음이다. 
 


안양루·무량수전·석등 
 
범종루에서 안양루로, 안양루 밑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부석사 본전인 무량수전(국보 제18 호) 앞마당이다. 마당으로 올라서자 석등(국보 제 17호)이 반긴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빼어난 조각 솜씨를 보여주는 명품이다. 아름답고 화려하고 기품이 서려 있다.

높이 2.97미터의 8각 기둥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네 개의 창을 만들었다.

무량수전 앞마당에 오르면 순례자들은 여기서부터 몸도 마음도 바쁘다. 아니 제일 바쁜 건 눈과 다리가 아닐까. 무량수전 정면에서 바라보면 처마에 걸려 있는 공민당 글씨 <無量壽殿> 네 글자.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전과 다르게 무량수전은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에게 자비를 보내는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아미타불은 무량수불, 무량불광이라 부른다. 건물은 1043년(고려 정종 9년) 부석사를 중창할 때 지은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그야말로 무량수전에 대해 여러 군말 없이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고 최순우 선생의 글을 여기 옮기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온 목조 건축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문 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은 외관에만 있지 않았다. 안을 들어가 봤다. 천장을 막지 않았다. 내부의 기둥 들보 서까래 등을 노출해 리듬감과 입체감을 극대화시켜 새로운 창작품을 연출시 켜놓았다. 고색창연한 나무의 빛깔이 밖에서 스며드는 보조광선을 받아 오묘한 감흥을 안겨주었다. 모셔진 불상 또한 명작이었다. 아미타여래상은 흙으로 만든 소조불(塑造佛)에 금을 입혔다. 전형적인 고려시대 불상으로 건강한 모습이 아름답다. 건물은 남향하고 있는데 본존불은 동향하고 있어 특수한 배치를 보여준다. 

 
부석·선묘각·조사당 
 
무량수전 건물에서 밖으로 나오니 눈이 시리게 펼쳐지는 소백산 줄기의 산봉우리가 망망대해에 떠 있는 조각배의 모습이다. 구름 위를 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안개 낀 바다를 항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저 멀리 가까이에서 펼쳐진 풍경들 모두가 무량수전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극락정토를 향하고 있는 우주만상이여. 부석사에서 바라보는 제1경은 소백산 자락으로 빠져드는 일몰이 명작이다. 해는 늦은 오후로 가면서 조금씩 산 그리메를 늘이며 기울고 있다. 무량수전 왼쪽으로 가면 선묘신룡이 들어 올려 나쁜 무리를 물리쳤다는 부석(浮石)이 있다. 큰 바위에 浮石 이라 새겨져 있다. 무량수전 오른쪽으로 선묘낭자의 사당 선묘각이 있다.

선묘각은 한 칸의 작은 집이다. 선묘의 초상이 모셔져 있다. 문을 열고, 예를 올리고, 돌아서 조사당 웅진전 자인당으로 향한다.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옆으로 오르는 산길을 따라가는데 어느 예쁜 사람이 바위 위에 꼬마 눈사람을 만들어놓아 순례자들에게 기쁨을 안겨준다. 몇 시간 동안 촬영하느라 얼었던 맨 손가락이 따뜻해진다. 어느 예쁜 마음이여, 복 받으시라.


조사당(국보 제19호)은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국사를 모신 곳이다. 가는 길은 처음엔 흙길이었을 터. 지금은 황톳길에 돌을 박아놓아 산사태나 미끄러움 없이 오를 수 있다. 잎을 떨군 겨울나무들이 하늘 높이 서있다. 떡갈나무, 단풍나무 교목들이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사당 앞 소나무가 근육질을 자랑하며 건강하게 서 있다. 조사당 문은 닫혀 있고 조사당 정면 반쪽 자리에 ‘선비화’가 철창에 갇혀 있다. 선비화는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하고 지팡이를 꽂아두었는데 나무로 자라 아직도 꽃이 핀다는 것. 이 선비화의 학명은 골담초이며 이를 보호하기 위해 순박한 철조망을 쳤다.

자인당으로 향한다.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보물 220호)이 모셔져 있다. 길은 좁은 옛길로 변해 걷는 맛이 새롭다. 자인당에서 불상 두 기를 보고 올랐던 산길을 내려오는데 햇살이 붉어진다. 해가 지려는 모양이다.

걸음을 조금 빨리해 내려가 무량수전 앞마당에 섰다. 해가 지려면 아직몇 뼘은 남아 있다. 해 빠지기를 기다리며 산으로 둘러싸인 부석사 절집을 내려다본다. 멀리 산줄기들의 능선이 황금빛 라인을 만든다. 어느 봉우리는 어둠에 가려 사라졌다. 지는 햇살은 더욱 붉어지고, 그러다 어두워지면 추워질 것이고, 밤이 오면 길도 끝나는 것일까. 하루의 이별 순간이 오고 있다. 시 한 편을 떠올린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정호승 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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