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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라고 쓰고 ‘우울증’이라고 읽는 시대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펴냄 | 2012년 3월 5일 출간 
 

독일의 최고 권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 2010년 10월 2일 자는 한병철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의 철학적 업적을 조명하는 특집 기사를 내보냈었다. 이 기사는 한병철 교수를 새로운 종류의 문화 비판 개척자로 묘사하고 있다. 문화 비판은 니체, 프로이트, 아도르노, 벤야민 등 독일 사상의 중요한 전통을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독일 최고의 권위지가 한국 출신의 철학자에게 문화 비판의 혁신자라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은 범상하게 넘겨볼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에 유학, 철학 공부를 시작해 독일의 권위 있는 출판사들에서 꾸준히 저서를 출간해온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이제 이 책을 통해 독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로, 서양 철학의 언어를 구사 하며 그 속에 동양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새로운 종류의 문화비판가로 떠올랐다.

사실 이 책은 유럽에서도 철학서로는 놀라울 정도로 출간 즉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커다란 화제가 된 바 있다. 독일의 거의 모든 주요 신문과 방송 매체가 이 책을 비중 있게 다루었고, 시대의 핵심적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친 책으로 격찬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현대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적대성 내지 부정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냉전, 면역학, 규율사회)에서 그러한 부정성이 제거된 사회, 즉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로의 변화가 20세기 후반 이후 일어났다는 것. 한 교수는 이 새로운 사회를 ‘성과사회’, 그리고 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을 ‘성과주체’라고 명명한다. 과거의 사회가 금지(‘해서는 안 된다’)에 의해 이루어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성과 사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긍정의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는 성공하라는 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규율이며, 성공을 위해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이다(‘Yes, we can!’). 그러나 부정성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긍정성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귀결되며 타자의 위협이나 억압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짓누른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확인 하려는 자아는 피로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은 우울증을 낳는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저자는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요약해놓고 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던 책의 성과사회 모습은 상당 부분 우리의 현실과도 일치 한다. 이 점은 긍정의 힘을 통한 성공을 설교하는 처세 관련 책이 한국의 도서 시장에서 얼마나 많이 팔리고 있는지만 보더라도 확인된다. 한국인이 바라는 이상적 사회의 모습은 아마도 능력(업적)과 성공의 일치일 것이다.

하지만 ‘능력(업적)=성공’이라는 이상은 능력(업적)을 최상의 가치로 만드는 성과사회의 패러다임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이상적 사회의 목표가 될 수 없음을 이 책은 깨닫게 해준다. ‘존재하려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가 모든 개개인의 마음속에 내면화된 지상 과제가 될 때 사회는 한병철의 말대로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양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병철

고려대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철학, 독일 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1994년 하이 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00년에는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데리다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독일과 스위스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피로사회》(2010)를 통해 독일에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가장 주목받는 문화비평가로 떠올랐으며, 한국에서는 2011년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 《하이데거 입문》 《죽음의 종류-죽음에 대한 철학적 연구》 《죽음과 타자성》 《폭력의 위상학》 등여러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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