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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을 확인했다. 아는 사람 부탁으로 잠시 일 해줬던 임금이 이제야 들어왔다. 드디어 담배를 살 수 있겠다. 돈을 찾았다. ATM이라는 녀석이 수수료를 잔뜩 뜯어갔다. 서러웠다.
“이런 도둑놈들.”
은행을 나오면서 말했다. 나 같은 서민은 은행거래 따위 하지 말라는 거냐? 통장에 돈을 넣어도 이자는 없고 오히려 한다는 소리가 수수료라 쓰고 보관비라 읽는 돈이나 뜯어간다. 어차피 집에 들어가도 할 일은 없다. 밖에 나와서도 할 일 없기는 매한가지다. 나이 먹고 뭐하는가 싶다. 머릿속에 아게타가 지나갔다. 저런 놈들은 돈도 바가지로 긁고 있겠지. 이름난 스타작가. 베스트작가. 황량몽이 완결되어 출간만 하면 돈방석에 앉아 돈으로 목욕할 것이다. 주머니를 뒤져 또 담배를 찾았다. 아, 진짜 빨리 담배나 사러 가야겠다.
“말보로 레드 하나요.”
집 앞 가까운 구멍가게로 왔다. 어제 본 여자는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익숙한 듯 담배를 꺼내 내 앞에 주었다. 나는 만 원 한 장을 내밀었다. 여자가 이상하게 본다.
“돈 생겼나 봐요?”
저 여자 눈에도 내가 집구석폐인으로 보이나 보다.
“빨리 거스름돈이나 줘요.”
“알았어요. 아 괜히 신경질이야!”
하-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신경질 낼 사람은 나란 말이다. 이 아가씨야.
여자가 내민 거스름돈을 뺏듯 받아들고는 담배를 챙겨 나갔다. 아 재수 없어. 니코틴 금단현상인 것이겠지. 나는 재빨리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아.. 라이터가 집에 있다. 주머니 속 핸드폰에 진동이 왔다. 나는 슬며시 쳐다보았다. 이정은 팀장입니다. 고객님은 한도 3천만 원의 대출…. 뭐? 대출? 나 같은 사람도 대출이 된다고? 바람이 차가웠다. 봄은 언제 온다는 거냐? 오기는 하나? 나는 그냥 집으로 걸어갔다.
◆◈◆
복도에는 사람이 버글거렸다. 남자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차수혁 씨 들어오세요.”
간호사의 말에 남자는 일어섰다. 휘청. 세상이 돌았다. 머리가 지끈 울렸다. 간신히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남자는 걸었다.
“앉으세요.”
하얀 가운 입은 의사가 말했다. 이명이 울렸다. 의사가 뭐라고 했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겨우 자리에 앉았다.
“차수혁 씨는…”
의사가 말했다. 남자는 손을 들었다. 귀가 울려 토악질이 올라왔다. 참아야 했다.
“다른 건 다 됐고. 못 고치는 거죠?”
의사는 말을 하지 못했다.
“저..수혁 씨 이 병은 말이죠.”
“됐습니다.”
남자는 휘청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됐다. 된 것이다. 이런 병 달고 구질구질 살아갈 만큼 돈이 많은 것도 아니다. 아니 살고 싶지도 않았다. 세상이 빙빙 돈다. 병원 복도에 앉았다. 의사가 전에 뭐라고 했더라? 생활습관을 잘 조절하면 된다고?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식습관을 바꿔보라고? 젠장. 그런 건 있는 자들이 하는 거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급급한 사람들에게는 사치일 뿐이다. 수술? 그건 정말 사치다. 돈은 누가 대는가? 구멍가게가 유일한 이 집구석에 이런 병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귀가 울린다. 귀를 잘라버리고 싶다.
◆◈◆
폐 속으로 담배연기가 들어왔다. 혈액 속에 니코틴이 흘렀다. 겨우 흥분되던 신경이 차분해졌다. 담배를 처음 핀 때가 언제였던가? 고등학생. 그래 고등학생 때였을 거다. 망한 집구석. 썩어버린 가정. 애초 완전한 건 없었다. 허나 그렇게 부서질 대로 부서져서 바람에 흩날리는 집구석 따위 바란 적 없었다.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 아게타 그놈만 빼면 말이다.
본체 전원을 켰다. 파란불이 번쩍였다. 익숙하게 인터넷을 켰다. 시작 페이지가 나를 반겼다. 제일 먼저 아게타의 새로운 글을 확인했다. 29편 새로운 글이었다. 황량몽 29편.
“아란!”
그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더 크게 외쳤다. 안 들릴 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란은 그 걸음 멈추지 않았다.
“아란!”
율리안이 그의 손을 잡았다. 아란의 눈빛이 차갑다.
“놔.”
“아니, 못 놔!”
아란이 그녀를 거칠게 뿌리쳤다. 그래도 그를 잡자 그는 그녀를 거칠게 후려갈겼다. 율리안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아란.”
차가운 바람 그 속을 가르며 그는 걸었다.
아란 놈 나빴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자를 때려? 그놈은 볼 장 다 봤다는 뜻이다. 여전히 글 속 연인 아란과 율리안은 겉으로만 맴돌았다. 나라를 위해 거칠게 그녀를 내쳐야만 하는 아란. 그것도 모른 채 자신을 버린 줄로만 아는, 그러나 그를 잊지 못하는 율리안. 모든 게 다 비극이었다.
[아게타님, 이번 글도 잘 봤습니다. 너무 슬프네요. 둘이 제발 사랑하게 하면 안 되나요?]
엔터!
뭔가 씁쓸했다. 글은 중반으로 가는데 이 두 커플은 뭐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는 내용이었다. 아게타. 이 자식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닉네임을 눌렀다. 쪽지를 썼다.
[안녕하세요? 아게타님. 황량몽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아란과 율리안 둘의 사이가 너무 애절하네요. 아게타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쓰는지 궁금합니다. 제발 해피엔딩이었으면 하네요.]
보내기를 클릭했다. 쪽지가 보내졌다는 알림창이 떴다. 이제 된 거다. 인기 작가는 무슨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지 알아볼 수 있을 거다. 뭐 기대는 하지 않았다. 뭐 묻는다고 말해줄 리가 없지 않은가. 습관적으로 F5를 눌렀다. 내가 쓴 댓글에 답글이 달렸다.
[아게타바라기님은 정말 아게타님 팬이신가 봐요.]
뭐? 내가 팬? 웃기시네. 이런 건 정보수집. 그래 정보수집이라고 하는 거다.
‘쪽지가 왔습니다. 어서 확인해주세요.’
나는 쪽지를 확인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아게타에게서 쪽지가 왔다.
[감사합니다. 제 글 읽어주셔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엔딩에 대해선 아직 언급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글이란 게 제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딱히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기대한 내 잘못이다. 그래, 뭐 나 같아도 저런 쪽지밖에 더 쓰겠나 싶었다. 재미없었다. 아게타 저놈의 정체를 밝히고 싶었다. 작가 소개도 확인했지만 이렇다 할 게 없었다. 나이도 없고 성별도 없고 좋아하는 장르와 잘 부탁한다는 한마디. 아, 이래서 인터넷은 안 되는 거다.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짜증 나. 부르튼 입술을 쫙- 뜯었다.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마우스를 들어 아게타 닉네임을 눌렀다. 1:1 대화신청. 그래 이거였다.
[아게타님이 1:1 대화를 수락하셨습니다.]
뭐? 왜? 어째서? 몸값 비싼 당신은 이런 거 거절해야지!
나는 당황했다. 막상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게타: 안녕하세요?
하얀 바탕 빨간 돋움체로 인사를 걸어왔다.
아게타바라기: 안녕하세요? 아게타님. 수락해주실 줄 몰랐습니다.
네가 빨간 돋움이면 난 파란 굴림이다. 어떠냐?
아게타: 저도 한번 대화해보고 싶었거든요. 아무도 대화를 걸어주지 않던데요?
아게타바라기: 설마요?
아게타: 정말입니다.
막상 아게타랑 얘기하게 되니 할 말이 없었다. 뻔한 얘기만 머릿속에 나뒹굴었다.
-황량몽 잘 보고 있습니다.
내 말에 빨간 대답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아 지금 장난해? 대화가 안 되잖아. 감사합니다. 라니 그러면 내가 또 질문해야 하잖아.
-어쩌면 그렇게 글을 잘 쓰십니까? 너무 부럽습니다.
그래, 이건 본심이었다. 부러웠다. 조회 수 많은 것도 부러웠고 인기 많은 것도 부러웠다.
-저는 별로 잘 못쓴다고 생각하는데요. 바라기님도 아시는지 모르지만, 카민이라는 분이 제 글을 지적해주셨죠.
키보드 위 손가락이 굳었다. 이대로 말 못하면 내가 카민이라는 걸 밝히는 꼴밖에 더 되겠냐. 뭐라도 써야 했다.
-아, 저도 카민님 글은 봤습니다. 그분 강퇴 당하신 것 같던데요.
속이 쓰렸다. 담배다. 이럴 땐 담배밖에 없다. 시뻘건 글자가 올라왔다.
-역시 그렇습니까? 요즘 그분 글이 안 올라와서요.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만약 이게 음성 대화였다면 좆 됐을 거다. 짜증이 밀려왔다.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그분 글도 잘 못쓰던데 조회 수도 좀 낮고 괜히 부러워서 그러는 걸 겁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게 뭐하는 짓이람.
-아니요, 저도 그 사람 때문에 짜증 났으니까요.
‘후-’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짜증 났다는 시뻘건 글자가 핏물 같았다. 채팅 창 깜박이는 커서가 거슬렸다. 점멸하는 커서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저건 몇 초마다 깜박이는 걸까?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 나 재수 없는 인간이다. 됐냐? 그러는 아게타 너는? 너 같은 놈이야말로 사회악이야.
◆◈◆
채팅 창 화면에는 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있었다. 카민. 그놈 말이다. 가뜩이나 아픈 머리 그놈 때문에 더 아팠다. 모니터에는 남은 사용시간이 5분이라고 떠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피씨방이라서 이만 가봐야겠네요. 다음번에 얘기 계속하죠.
그렇게 채팅창에 쓰고는 인터넷 창들을 꺼버렸다. 본체에 꼽힌 USB도 뽑았다. 속이 안 좋았다. 머리가 지끈, 귀가 먹먹했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했다.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어두운 불빛도 매캐한 담배연기도 다 싫었다. 피씨방에서 나온 하늘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깊은 파란색에서 새빨간 색까지 황홀한 바림이었다.
의사가 뭐라고 했더라? 오래 앉아있 지 말라고 했던가? 그럼 하루 온종일 누워 있냐? 산책을 하라고 했던가? 산책은커녕 이렇게 머리가 아픈데 어찌 걸어 다니란 말인가. 모든 게 다 짜증이 났다. 요즘은 귀마저 잘 안 들렸다. 세상은 잔인했다.
시작은 언제였을까? 그래 시작은 이리 머리가 아프지도 귀가 울리지도 않는 아주 지극한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 사람의 글을 보았을 무렵, 심장이 뛰었다. 지독하게도 날카로운 문장. 날카로워서 보기가 너무 힘들었던 그 문장. 그것이 영혼 깊은 곳에 새겨졌기 때문일까? 하루하루가 황야였다. 살아내는 것 자체가 버거웠기에 그 글이…… 아니, 글이란 것이 고팠나 보다. 글은 빛이었다. 겨우 잡은 이것마저 내게서 앗아간다면 세상을 더는 살아낼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