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비집고 나왔다. 그 밤. 질척거리던 겨울비가 세차게 내리던 그날.
“쥰코씨!”
비오는 밤거리에 우산하나 없이 그저 걷는 둘이다. 쥰코는 눈물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는 액체로 얼굴을 뒤 엎은 채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까부터 소리치는 히로키를 무시하다 결국 쥰코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왜!”
화가 났는지 소리치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했다는 듯 히로키는 의문의 표정을 띄운다.
“말 좀 해요! 화났어요?”
“어….”
화가 났다면서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녀의 손목을 홱- 낚아채서 그녀를 세운다. 쥰코는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며 노려본다.
“왜 화났어요?”
“네가 내게 화냈으니까!”
“네?”
알 수 없는 말에 히로키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차가운 겨울비가 그들을 향해 퍼붓는다.
“화냈으니까! 네가,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의문을 가지고 추궁하고… 결국 믿지 않은 거잖아! 전생의 하시모토 료처럼….”
그리 말하고 나는 어떻게 했더라. 모든 것이 끝나버려서, 세상이 무너진 듯 끝나버려서, 서럽게 울었다. 빗속에 그를 버려두고 추워서 바들바들 거리는 몸을 억지로 끌고 집에 돌아와 울기만 했다. 이젠 사라질 것이다. 그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조차 두려워서 도망쳐 버릴 것이다. 잊을 것이다. 지독한 필연. 너 같은 남자는 모른다. 그리 말하며 정리했다.
“쥰코.”
“쥰코.”
카린과 코린이 그녀에게 걱정하듯 물어왔다.
“걱정… 하지 마. 저 벚꽃이 온전히 필 수 있도록 할 테니까.”
그래 저 벚꽃 흐드러지게 필 때까지… 그때까지.
그녀는 눈을 감았다. 다음 날이면 그가 올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가지고. 필요 없었다. 이미 얄팍했던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 흩날렸다. 사과해서 돌려질 마음이 아니었다. 단순한 믿음? 신뢰? 그런 사소한 것들이 아니었다. 영혼이 바스러졌다. 더 이상 구원할 방법도 없이 전부 깨져버려 살아갈 수도 없었다.
“미안해. 난 갈게. 저 벚나무는 잘 자랄 거야. 내가 기도해 두었으니까.”
“쥰코!”
“쥰코!”
아이들은 그녀를 붙잡았다. 쥰코는 고개를 저었다. 새파래진 입술. 옷을 갈아입고 우산을 썼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벚꽃 피는 날. 가장 아름답게 피는 날 그때 배웅하러 돌아올게.”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세차게, 세차게 퍼부어 내렸다. 그 비 내리던 밤 어디로 가려 했을까. 그저 어둠속을 걷고 걸었다.
세상은 진작 어둠이었다. 그 어둠속 빛이란 건 어디 있는 걸까? 모든 게 다 부질 없었다. 그리 말했던 사랑도 전부 흩어졌다. 이리 될 필연이었더라면 신(神)의 섭리 안에 이뤄진 모든 것일 뿐이었다면 그 끝도 있음이었다. 신(神)은 극복하지 못할 아픔을 주는 이가 아니니 말이다.
소금 냄새가 났다. 비릿한 내음에 쥰코는 눈을 떴다. 바다였다. 바다라 부르기엔 참으로 볼품없는 바다.
“다 왔어요.”
“…그런 것 같네.”
쥰코는 차에서 내렸다. 새하얀 차가 해변가에 있었다. 게다 안으로 모래가 들어왔다. 타비(足袋)-일본식 버선-에 모래가 밟혔다. 서걱서걱 거렸다. 그런 것일랑 모른다는 듯 걸었다. 새파란 바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새빨간 기모노를 입은 백옥 같은 여인이 있었다. 한 폭의 그림이었다.
바람에 날렸다. 기모노 자락이 날렸고 검은 머리칼도 날렸다. 무게 없이 날려 곧 그녀 또한 날아갈 것 같았다.
“여기엔 왜 왔어?”
그녀가 물었다. 하얀 얼굴 빨간 입술 인형 같았다.
“그녀가 있어요.”
“그녀?”
쥰코의 반문에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잠들었어요. 바다에…….”
그렇게 말한 그의 미소가 섧었다. 그 미소를 여자는 바라만 보았다.
“..상처. 첫 번째 지독한 상처구나.”
마치 보았던 것처럼 쥰코가 말해왔다.
“어떻게 그렇게 말해요? 나에 대해서 뭐 알아요!”
화가 났다. 그래 처음부터 이렇게 화를 내야했었다. 그것이 옳았다. 너무나도 뒤늦게 화를 내고 있었다.
“너…피 흘리고 있잖아.”
숨이 막혔다. 그래 아팠다. 지독하게도 아팠다. 너무 아파서 온몸이 부들거렸고 숨도 쉬지 못했다. 그 아픔은 독했다.
여자는 휘날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에게 걸어왔다. 바다가 부서졌다. 산산이 부서져 찬란했다.
“상처는 그저 내버려두면 곪아 터져. 그리고 썩어버려. 썩으면 손도 못 대. 흉터는 지독하고 그거 볼 때마다 아파 눈물 흘리고. 누가 상처 건들면 서럽고 서러워서. 죽는 것 보다 더 독해.”
그를 올려다보며 말하던 쥰코는 피식 웃으며 모래사장에 앉았다. 모래 같은 건 사소하다는 듯이…….
“어떻게 살아 왔데? 아팠잖아. 죽도록 아팠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상처 따위 없다는 듯 살았을 거 아냐.”
부서지는 파도 보며 말했다. 소금기 가득한 바람이 불었다. 저 멀리 해수욕장에선 사람들이 버글거렸지만 그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녀 옆 도윤도 앉았다. 모든 게 지쳐버린 듯 털썩 주저앉았다.
“본 것처럼 말하네요.”
화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누군가 알아 줬으면 했다. 누구도 아팠겠지. 라고 말해준 사람이 없었다.
“시작. 그건 언제야?”
그건 주문이었다. 말할 수 있게 용기를 주는 주문. 그녀의 편안한 말에 그는 핏빛으로 얼룩진 고통을 뱉어버렸다.
시작은 지금도 선명한 그 시절. 마치 그 관문 통과하면 세상이 네 것이라도 되는 듯 어른들이 그리 말하던 관문을 통과하고 얼마 안 된 때였다.
“신도윤!”
긴 머리 찰랑이는 여대생이었다.
“시끄러워.”
“야!”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때문인지 잔뜩 골이 난 얼굴이었다.
“줘!”
“뭘?”
주어도 없이 말하는 통에 그는 도통 알아듣지 못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라?”
“어.”
“3월 14일이다 이 멍청아! 사탕 내놔!”
내가 왜 사탕을 줘야하는가? 그리고 난 제과회사의 상술에 넘어갈 정도로 어리지 않단 말이다.
“왜 내가 너한테 사탕을 줘야해?”
“그럼 네가 먹은 초콜릿 뱉어내!”
머리가 아파왔다. 지난달에 내가 초콜릿을 얘한테서 받은 적이 있었나. 기억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었다.
“나 너한테서 초콜릿 안 받았거든.”
내말에 금하연은 기가 막히는 표정을 지었다.
“야! 먹고도 기억을 못해? 네가 과대한테 줄 거 뺏어가서 먹었잖아.”
그제야 머릿속을 훑어 지나는 장면이 있었다. 그거 하나 먹었다고 얼마나 울었는지.
“그래서 내가 초콜릿 사줬잖아. 그런데 무슨 나한테 와서 사탕이야? 너 나 좋아하냐?”
“에이씨! 바보 같은 놈!”
그렇게 말하고는 사라졌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그래 시작은 이랬다. 어디 영화에서 나올 법한 우연이 빛나는 만남도 아니고, 소설에서 나올 법한 아름다운 만남도 아니다. 이런 것이 어째서 나와 그녀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시작이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