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의혈 청년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 하얼빈에서 처단하였다. 이 의거는 한국의 독립과 주권을 침해한 국적 제1호 이토를 응징한 독립운동 차원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동양 평화를 유린한 제국주의 침략자를 처단함으로써 국제 평화를 유지하려는 평화운동의 일환이었다. 이토를 처단한 것을 두고 ‘평화운동’이라고 말하는 것이 의아스럽다면, 알제리 전쟁 당시 신학 교수 카잘리스(Casalis)가 “폭력에는 자유를 위한 폭력과 속박하는 폭력이 있다”고 선언한 점을 되새겨보자.
안중근 의사는 한국과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위해 가톨릭 신자임에도 침략 세력의 상징인 이토를 처단하는 ‘폭력’을 행사했다. 이를 두고 일본 일각에서 암살자, 테러리스트 운운하는 것은 폭력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다.
자유를 위한 폭력과 속박하는 폭력
신라의 대표적 지식인이며 불승이었던 원효대사는 일살십활론(一殺十活論)을 제시하였다. 대사가 어느 날 길을 가는데 큰 독사 한 마리가 까치새끼 10마리를 집어삼키려 했다. 대사는 거침없이 지팡이로 독사를 내리쳤다. 제자가 불살 생(不殺生)의 계율을 물으니, “한 마리 독사를 죽임으로써 10마리의 죄 없는 까치새끼를 살리는 것이 참 불법의 가르침” 이라고 답하였다.
중국 혁명의 지도자 진독수(陳獨秀)는 1915년 <청년잡지> 창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사는 한 사회적 악과 싸워서 이겨야 할 일이지 불의에서 도피하여 안일과 한가 속으로 물러나서는 안 된다. (……) 나는 청년들이 톨스토이나 타골이 되기보다 콜럼버스나 안중근이 되기를 바란다.”
중국 혁명 지도자들은 ‘안중근 정신’을 이렇게 수용하였다.
안중근은 폭력주의 상징을 제거함으로써 조선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추구하였다.
크리스천이고, 교육자이며, 독립운동가, 평화주의자로서 자신의 행위에 추호도 후회하지 않으면서 떳떳하게 교수대에 섰다. 일본 정부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진술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지만,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결기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의 삶과 죽음은 헌걸찬 대장부의 신화가 되고, 동양 평화의 영원한 불꽃이 되었다.
안중근은 항소권을 포기하는 대신 《동양평화론》을 쓰고자 했다. 변호사들이 의례적인 공소를 권유했다. “내가 불공평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도 공소권을 포기한 것은 복죄(服罪)했다고 생각지 마시오. 나는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싶지 않을 뿐이오. 상급 법관 역시 일본인이니 그 결과가 빤한 것 아니겠소”라며 공소 권유를 물리쳤다.
그 대신 자신이 오랫동안 구상해온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여 이토를 처단하게 된 의거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또 동양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했다.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하면서 3월 25일로 예정된 사형 집행일을 15일 정도 연기해줄 것을 요청하며 고등법원장의 언약까지 받았으나 일제는 이를 지키지 않았다. 그 대신 고등법원에 항소 하지 않았기 때문에 2월 19일로 사형일이 확정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의 체계를 서문, 전감(前鑑), 현상, 복선(伏線), 문답 등 5 단계로 잡았다. 서문과 전감만 완성하고 뒷부분은 형이 집행됨으로써 완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인류 문화사에는 수많은 명저가 유배지나 옥중에서 집필되었음을 보여준다. 사형 선고를 받아 형의 집행을 며칠 앞두고 쓴 글이나 책은 많지 않다. 안중근은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운 극한 상황, 즉 사형이 선고되고 영하 20도에 이르는 혹한의 감방에서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끝을 맺지 못한 채 생을 접어야 했다. 문화사에 남을 ‘옥중명저’의 전부가 완성되지 못한 것이다.
끝맺지 못한 논설 《동양평화론》 《동양평화론》의 서문에서 안중근은 이 책 서술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물질문명의 발달이 인간을 파괴로 이끌어 도덕을 잊고 무력만 일삼는 서양, 특히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동양 3국의 단합이 급선무이다.
둘째, 서세동점이라는 시대 속에서 러시아 세력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 해야 한다.
셋째, 한때 천명(天命)이 일본에 있었지만 동양 평화를 유린하는 이토를 상대로 하얼빈 에서 의전을 행하였으며 동양 평화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장으로 여순을 선택하였다.
안중근은 이 글에서 만국공법에 대해 이를 신뢰하면서도 일제의 행위, 즉 을사늑약과 한일신협약 등 한국 침략을 경험하면서부터 만국공법과 엄정중립을 제국주의의 침략 논리로 인식했다. 자신은 의병 전쟁 과정에서 일본군 포로들을 만국공법의 정신에서 풀어주었는데, 일제는 의병 중장 신분으로 적장(이토)을 포살한 자신을 ‘암살자’로 여기는 부당성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자 했다. 이어서 만국공법과 중립주의가 침략 논리로 둔갑하는 그 허구성을 논박하려 했다. 안중근의 한계 또한 없지 않았다. 일제에 대한 안중근의 인식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안중근이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을 비판하는 초점을 이토 히로부미 개인에게 맞추고 정작 침략 정책의 최고 책임자인 일본 천황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 일본 천황을 옹호하고 이토 히로부미만을 비판 하는 논리는 안중근의 자서전과 공술에서 누차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상 논리가 단순히 공판 투쟁 과정에서 자신의 일신을 구하기 위한 임시방편적 대응책이 아니라 안중근이 평소 지니고 있던 지론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동아시아 현재 및 미래의 ‘평화 구도’와 공동체의 모델로 인식되는, 대단히 선구적인 제안 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열강이 중국을 침략하는 것을 보고 서양 제국주의에 대한 한중일 3국 연대를 주장했으나 아시아주의가 일본의 침략주의에 이용당하자 일본의 침략주의를 억제하는 틀로 아시아주의를 구상하고 있었다. (……) 분쟁의 축을 협력의 축으로 바꾸는 역전의 모델로 현대 동아시아 각종 분쟁지의 해결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생각한다.”
안중근은 히라이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장과 나눈 대화에서 《동양평화론》의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했다.
새로운 정책은 여순을 개방하여 일본과 청국 그리고 한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의 대표를 파견, 평화회의를 조직한 뒤 이를 공표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이 야심이 없다는 것을 보이는 일이다. 여순은 일단 청국에 돌려주고 그것을 평화의 근거지로 삼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 재정 확보에 대해 말하면 여순에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하여 회원을 모집하고 회원 1명당 회비로 1원을 모금하는 것이 다. 일본과 청국 그리고 인민 수억이 이에 가입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은행을 설립하고 각국이 통용하는 화폐를 발행하면 신용이 생기므로 금융은 자연히 원만해질 것이다. (……) 이상의 방법으로 동양의 평화는 지켜지나 일본을 노리는 열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문제에 대해서는 일본과 청국 그리고 한국의 3국에서 각각 대표를 파견하여 다루게 한다. 세 나라의 청년들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는 2개국 이상의 어학을 배우게 하여 우방 또는 형제의 관념이 높아지도록 지도한다. (……) 금일의 세계열강이 아무리 힘을 써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있다. 서구에서는 나폴레옹 시대까지 로마 교황으로부터 관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이 제도를 거부한 뒤로는 이 같은 의식을 치르지 않게 되었다. 일본이 앞서 말한 것은 패권을 얻은 뒤 세 나라의 황제가 로마 교황을 만나 서로 맹세하고 관을 쓴다면 세계는 이 소식에 놀랄 것이다. 오늘날 존재하는 종교 가운데 3분의 2는 천주교이다. 로마 교황을 통하여 세계 3분의 2의 민중으로부터 신용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대단한 힘이 된다.
안중근은 동양 평화를 위하여 한국, 일본, 중국의 3국 연합 화평회의를 개설하고 은행을 설립하여 공통 화폐를 발행 해야 한다는 것을 언급했다. 오늘날 EU와 같은 지역 경제 공동체를 제안한 것이다. 놀랄 만한 제안이고 선각적인 혜안 이다.
100년의 시공을 뛰어넘는 선각적인 혜안
안중근은 100년 전에 동양 평화가 짓밟히는 참담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앞날을 예견하면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했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의 집필을 이유로 공소권까지 포기할 만큼 생애 최대 목표를 여기에 두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게 된 ‘15가지 죄’ 중에서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를 들었다. 안중근에게 동양 평화는 생명을 내놓을 정도로 중대한 가치이고 목표였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탐구하는 것은 과거 그의 발언에 주석을 다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현재적 가치’로써 미래 화하고 ‘지나간 미래’로써 현재화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그것만이 안 의사의 숭고한 죽음과 고결한 사상을 계승하는 길이 될 것이다.
안중근은 동양 평화를 파괴한 이토 히로부미의 처단은 동양 평화를 진작시키는 길이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형장에서도 “동양 평화를 삼창하고 죽음을 맞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100년의 시공(時空)을 뛰어넘는 식견으로써, 오늘 우리 동양인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준다.
김 삼 웅: 金三雄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 제7대 독립기념관장을 지냈으며,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희생자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자문위원, 《친일인명사전》 편찬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친일정치 100년사》 《곡필로 본 해방 50년》 《을사늑약 1905년, 그 끝나지 않는 백 년》 《통일론수난사》 《백범 김구 평전》 《녹두 전봉준 평전》 《안중근 평전》 《김대중 평전》 《리영희 평전》 《송건호 평전》 등이 있고, 가장 최근 작품으로는 《진보와 저항의 세계사》와 《노무현 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