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5월 27일 이른 아침, 프랑스 파리. BNF(프랑스국립도 서관)로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40대 중반의 동양 여성은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박병선. 1927년 생. 서울대학 사범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에 이곳 파리로 유학와 1967년부터는 이곳 BNF에서 계약직 사서로 근무 중이었다.
같은 시각 오후. 상춘의 나른한 한 때를 보내고 있던 한국에 서는 프랑스 현지로부터 타전된 한 통의 외신보도로 크게 술렁 였다. 특히 사학계와 서지학계를 중심으로 한 지식 사회의 술렁임은 가히 충격적이었고, 1면 톱기사용 신문 조판을 위해 빠른 손놀림으로 활판을 찾던 문선공들의 입가에는 먹지 않아도 배부른 대만족의 미소까지 번졌다.
“KOREA, 금속활자를 쓴 세계최초의 나라로 공식 인정! 지금까지는 1455년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인쇄한 ‘42행 성서’가 이 분야 세계 최초로 공인돼 왔으나 오는 29일부터 10월까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펼쳐지는 ‘세계 책의 역사’ 종합전을 통해 처음 공개되는 한국의 ‘직지’가 그보다 78년 앞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는 사실을 유네스 코가 전격 인정하면서…” 독일의 오랜 자부심이 무너지던 순간 .
비슷한 시각 독일의 공영방송 ZDF는 큰 충격에 휩싸인 가운데 이 같은 사실을 독일 전역에 긴급 뉴스로 내보냈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00∼1468)의 고향인 독일 남서부 도시 마인츠 시민들은 유네스코의 이번 결정을 즉각 반박하려는 움직임마저 일었다. 특히 독일출판인서적상협회가 매년 주최하는 세계 최대, 프랑크푸르트도서전 조직위는 향후 나타날 파장까지를 고려하며 대책 마련에 부산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크푸르트도서전의 명성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이라는 구텐베르크의 문화사적 혁명과 늘 맞닿아 있었고, 지난 15세 기부터 있어왔던 부흐메세(Buchmesse)라는 이름의 도서전 자체가 인쇄업의 발달이란 이 지역의 역사적 전통 산업과 직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속활자로 상징되는 인쇄술의 혁명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어 중세의 패러다임까지 바꾼 세계사적 사건이 었다. 그리고 그것은 증기기관차의 발명으로 비롯된 1800년대의 산업혁명과 빌게이츠와 스티브잡스로 대표되는 작금의 인터넷혁명이며 스마트폰 혁명과도 비교되는 인류사적 사건이었 다. 그 거대 물줄기의 시원(始原)이란 오랜 자부심이 한 순간 동양의 작은 나라 코리아의 문화사적 저력에 무너졌고, 독일 시민들은 세계지도를 펼치며 아시아 대륙 끝자락의 대한민국을 새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세계 문화사를 다시 쓰게 만든 재불 사학자
박병선(Dr. Byeon-seon, Park). 외신은 그녀의 이름 석 자에 주목했다. 동시에 의미 있는 세계 문화사적 사건을 타전하는 기사 속에 이 재불 여성 사학자의 오랜 고투를 곁들이는데 인색할 수 없었다.
“유네스코가 후원하는 ‘책의 역사’ 전을 준비하면서 세계 고서 전시회에 내놓을 동양 서적을 찾다가 우연히 서고 구석에 방치돼 있던 작은 책 한 권을 찾게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서관 직원들은 이 책을 중국 서적으로 알고 있었다. ‘직지(直指)’라는 제목이 선명한 이 책을 보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구한말 당시 저들이 가져간 우리 책 직지가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는 데는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외신은 그녀와의 직간접 인터뷰를 통해 세계 인쇄사를 다시 쓰게 된 배경을 집중 조명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또한 세계 지성의 이목을 끄는 ‘책의 역사전’을 앞둔 가운데 자관 소속 사서의 노력으로 이렇듯 세계가 놀랄 만한 빅뉴스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데 대해 크게 기뻐했다.
한국의 관련 학계에선 냉소적 반응만
“이 책이 바로 1377년에 금속활자로 인쇄한 직지라고 얘기 했을 때 도서관 관계자들은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는 1455년 독일의 구텐베 르크로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이 아주 오랫동안 또렷하게 각인돼 있었기 때문이다.”
〈사적으로 본 한국의 민속학〉이란 논문으로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는 한편 직지가 구텐베르크의 42 행 성서보다 무려 70년 이상 앞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란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그녀는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동아일보와 인터뷰한 내용 하나만으로도 당시 그녀의 학자적 외로운 싸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하고도 남을 정도.
“나는 그 일을 위해 3년 동안 거의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며 지냈어요. 시간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하겠어요. 먹으려면 장을 봐야 하는데 장을 보러 나갈 시간이 없었어요. 그러니 매일 물만 끓여서 커피하고 빵하고 먹는 게 보통이었어요. 머리가 딴 데 있어서 장을 보러 가도 하나만 사고는 다 샀다고 생각하고 돌아오기가 일쑤였죠. 얼마나 나 자신이 답답했겠어요. 너같은 맹꽁이도 없다 생각했어요. 이렇게 산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 었어요. 이렇게 살아도 살아는 나더라고요.”(2011년 4월 15일 자) 한국 관련 학계로 서신을 띄워 자문을 구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할 일 없으면 잠이나 자라’는 냉소적 반응이기 일쑤였다. 지금 보자면 갸웃할 내용이지만 ‘그 땐 실제로 그랬다는 게’ 그녀의 회고담이고 보면 당시 우리 학계와 10월 유신을 코앞에 둔 군사정부의 문화적 취약성이 그대로 들어나는 대목이라, 쓴웃 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마침내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국가
일본어와 한자 해독까지 능통했던 그녀는 일본과 중국의 인쇄사를 참고하면서 가정용 오븐으로 직접 활자를 구워내는 등의 다양한 실험과 조사를 통해 유네스코 후원 ‘책의 역사 전’을 앞두고는 마침내 프랑스국립도서관 측도, 유네스코도, 세계 관련 학계까지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쾌거를 거머쥐는데, 다음은 ‘책의 역사 전시회’ 하루 전,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는 파리 특파원 발 조선일보 기사다.(1972년 5월 28일 자) <고려 금속활자 ‘세계 최초’ 공인-파리에서 진용석 특파원. 한국이 금속활자를 쓴 세계최초의 나라로 공인받게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는 이전 부터 이 사실이 밝혀지긴 했으나 세계적으로 공인돼 있지 않아 그 후에 발명된 독일의 구텐베르크의 활자가 세계 최초의 것으로 세계 모든 문헌-문 서-서적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유네스코가 현재 파리의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열고 있는 ‘책의 역사’ 종합전에 새로 발견해낸 고려 때 책자 ‘직지심경’(우왕 3년=1377년 인쇄. 필자 주 : 《직지심체》의 잘못된 표현이었음. 말하자면 오보 였음)을 전시함으로써 공인된 것이다.
유네스코 관계관과 파리국립도서관의 동양서적 전문가 마리 로즈세규이 여사는 ‘한국이 구텐베르크보다 75년가량이나 금속활자 인쇄술을 창안 실용화한 것을 세계문화사에서 새 사실’ 이라고 지적하고, ‘우리는 이번 국제전을 계기로 모든 세계의 문헌-교과서-백과사전을 정정토록 통보, 조처할 의무가 있다’ 고 말했다.> 그로부터 29년의 세월이 흘렀던 2001년 9월 4일, 이런 과정을 거쳐 세상 밖으로 나와 우리 문화 유산의 자부심을 세계에 과시한 ‘직지’는 마침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1886년 한·불수 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초대 주한 프랑스공사에 부임한 콜랭 드 플랑시가 이를 약탈해 간 시점부터로 보면 가히 두 세기 만의 결실인 셈이다.
프랑스에서 만난 ‘외규장각 도서’와의 또 다른 숙명
아시아나 항공 502 편을 통해 외규장각 도서 297권중 1차분 75권이 우리나라에 돌아오던 날, 국민 대다수는 환호했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군대가 약탈해간지 145년만의 귀환이었으니 정부의 외교적 성과 또한 높이 평가됐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박병선 박사의 심정은 착잡했다. 그녀는 외규장각 도서가 떠나는 파리 샤를-드골공항을 찾지 않았다. 영구 반환에 대한 애착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
‘박사님은 기자를 보고 잘 왔다면서 열변을 토하신다. 내가 (곁에서) 전해 들었는데, 나라에서 프랑스 정부와 외규장각 도서의 영구임대를 추진 중이라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고, 그런 일은 기자들이 들고 일어나서 막아야 한다며, 꼭 내 부탁을 들어달라면서 외규장각 도서의 영구임대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지난해 5월 직장암 수술을 받기 위해 내한했을 때 병실을 찾았던 한 네티즌이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소개한 글 한 토막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녀의 이 같은 분노에는 절대적 이유가 있었다. 직지를 세상에 소개한 의미 이상의 공적 한 가지가 바로 외규장각 도서와 직결돼 있기 때문인데, 직지가 그랬듯 외규장각 도서 또한 그녀가 없었다면 ‘임대 절차’라는 궁색한 결실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직지 발견 이후 5년만이던 1977년, 그녀는 사학자로서 또 한번의 숙명을 프랑스 국립박물관에서 만나게 된다. 도서관 동료와 함께 점심을 먹다 우연히 ‘닥터 박이 관심 가질 만한 책 뭉치가 별관 서고에 방치돼 있다’는 귀띔을 듣게 되면서 비롯된 숙명. 그토록 찾아 헤매던 외규장각 도서와의 조우는 그렇게 간단했다.
“완전 반환만이 답이다. 영구 임대는 안 돼”
“프랑스로 유학을 간다며? 사학도로서 반드시 프랑스 어딘 가에 묻혀 있을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 보도록 하거라.”
1955년 프랑스 유학 1호생이란 기록을 갖고 서울을 떠나기전 서울대 은사였던 이병도 교수(1896∼1989)가 던진 이 같은 엄명(?)을 그녀는 프랑스 체류 내내 단 한 차례도 잊은 적이 없었다. 차라리 허탈했다. 이렇게 쉽게 만날 숙명이었는데…. 그녀는 프랑스 해군 관련 기관들을 이 잡듯 뒤지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직지 대모’로 불리는 박병선 박사는 파리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프랑스 교민 사회의 어머니 역할까지 맡아냈다. 프랑스 체류 56년째. 결혼도 마다한 채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의 존재만을 찾아 한 평생을 바친 그 공로에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국민훈장 동백장으로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