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없어?”
쥰코가 말하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있어요.”
“그래, 그럼 가자.”
도윤은 생각했다. 도대체 이 일본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미친년이라고 소리치고 집으로 갈 수도 있었다. 허나 그녀의 말을 계속 듣고 싶었다. 이 답답한 갈증이 전부 풀릴 것 같았다.
“차 어느 거야?”
쥰코가 말하자 남자는 차 리모콘을 들었다. 삐빅- 울리며 불이 깜박이자 쥰코는 새하얀 차로 갔다. 그리곤 조수석을 벌컥 열고는 앉았다.
“빨리 와.”
마치 익숙하듯, 아니 애인이라도 되는 듯 부르는 쥰코에게 이상하게도 편안한 마음이 드는 도윤이었다. 운전석에 앉았다. 안전벨트를 맺다. 시동이 걸렸다.
“어디로 가요?”
그녀에게 행선지를 물었다. 분명 여우에게 홀린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 일본여자라는 여우에게 홀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생판 모르는 여자를 자신이 차에 태울 리가 없었다.
“그냥 가. 갈 곳은 네가 알고 있어. 가슴속 깊이 묻어둔,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았던 것들.”
차가 움직였다. 쥰코는 눈을 감았다. 창문을 내렸다. 시원한 바람이 쥰코의 머릿속을 헤맸다. 그래 이것이면 되었다. 이 남자에게 환상이란 현실을 쥐어주고 다시 또 가면 되었다. 이 남자는 환상 같은 현실에서 무엇을 손에 쥘 것인가. 구원을 얻을까? 진리를 볼까?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설령 진리를 쥐어준들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환상이고 허구일 뿐이다. 라고 말로써 뱉어버리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 그저 환상이고 허구가 되어버릴 터이니까. 아무리 몸부림쳐서 이것이 진리고 구원이다. 라고 말한들 허사다.
“환상, 아니 진리를 잡으면 세상이 달라질 것 같아?”
여자의 말에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아니 하고픈 말은 넘쳐났다. 그러나 무어부터 꺼내놔야 할지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달라지겠죠? 그건 그렇고 이름이나 알려줘요. 전 뭐라고 불러요?”
“쥰코. 노리유키 쥰코. 가명이지만.”
“가명이요? 그래도 쥰코 씨라 부르면 되죠?”
그의 말에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남자는 CD를 넣고 음악을 틀었다. 제목 따위 몰랐다. 그저 조용하고 조용해서 애잔한 선율이었다.
“그러면 환상을 보면 뭐 할 거야?”
“적을 거예요. 내 글로 쓸 거예요. 이것이 진리이니 이것이 구원이니 믿으라고 할 거에요.”
쥰코는 기도 안찬다는 듯 웃었다.
“왜 웃어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걸 믿어? 이건 내 자서전입니다. 라고 말해도 대필 작가가 써줬겠지 이러는 세상이야. 요즘 잘 팔리는 건 자기계발서 밖에 없어. 그 자기계발서 라는 놈도 다 하나같이 비슷한 내용이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둥, 생각을 바꾸라는 둥 기도 안차.”
기도 안찼다. 그런 뻔한 내용으로 책을 낼 거라면 차라리 강연을 하지 그러니? 아니 신도를 모아서 돈을 벌어. 이렇게만 한다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복 받고 돈 벌고 당신이 달라질 겁니다. 그 글을 쓴 작가와 어느 사이비교주가 하는 말이 뭐가 다른 건지. 그런 책 한 권 읽고 달라졌을 인생이라면 진작 달라졌어. 그래 진작… 진작 달라졌다. 이렇게 가슴 아플 리도 없었고 지독한 필연에 시달릴 일도 없었다.
“왜 그렇게 나쁘게만 말해요? 쥰코씨.”
“…그래 어디 한 번 써봐. 무슨 환상을 그리 잡을지는 모르겠지만.”
차는 달렸다. 목적지도 없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도대체 이 여자는 어디서 와서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흘러만 갔다. 과연 이 흐름의 끝에는 원하던 것이 있을까? 나는 바다로 향해갔다. 왜 바다가 가고 싶었는지 몰랐다. 단지 여름이라서? 사람이 버글대는 해수욕장은 싫었다. 그래 어느 외딴 섬이나 바다 같지도 않은 바다를 보고 싶었다.
“쥰코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알아서 어쩌려고?”
“이왕 이렇게 같이 가는 거 말이라도 놓으면 좋잖아요?”
“됐어.”
여자의 말은 짧았다. 아니 줄곧 반말이었다. 초면에 반말을 찍찍하는 여자인데 화가 나지 않았다. 유창한 한국어 실력 전혀 한국어를 못해서 하는 반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러면 계속 쥰코 씨라고 불러요?”
“맘대로 해.”
무슨 여자가 이런가 싶었다. 겉보기에는 20대 후반? 30대? 어림잡아 그렇게 보였다. 그것도 잠시였다. 에어컨을 켜고 있었지만 더웠다. 왜 더운지 몰랐다. 답답하고 더웠다.
“하루뿐이야.”
“네?”
쥰코라고 하는 여자의 목소리는 듣기 좋았다. 청량감이 있었다. 다른 일본여자들처럼 귀여운 척 하는 발음도 아니었다.
“오늘 하루. 타임리미트(time limit). 오늘이 지나면 다 깨져버릴 환상을 너는 찾으러 가는 거야.”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단지 정말 오늘이 지나면 전부 꿈같은 현실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애초 환상을 찾으러 가겠다는 목적도 이상했다.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이런 말에 옳다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찾아야했다. 잃어버린 무언가를,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이었다. 3년 전에 시작했던 이 여행이 마치 오늘로 끝나 버릴 것 같았다.
짐을 쌌다. 이 더러운 직장 때려 칠 것이다.
“도윤 씨.”
“잘 있어요.”
직장 동료가 걱정하듯 물었다. 그래 잘만 다니던 회사 더럽다고 걷어 차버리는 멍청한 사람이 여기 있었다.
“회사 그만두고 뭐 하시려구요?”
“여행이요.”
내 말에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어디로 가게요? 유럽?”
“나를 찾는 여행이나 해볼까 해요.”
여행을 하겠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돼는 충동이었다. 잃어버린 나를 찾겠다고 뚜렷한 계획도 없이 시작했다. 모아놓았던 돈도 떨어지고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었다. 3년간 찾지 못했던 그 무엇이 이제 와서 나타날 리가 없건마는 나는 왠지 환상을 볼 것 같았다.
무엇을 나는 잃어버렸을까? 그런 것은 치기 어린 청소년 시절 찾아야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 내가 찾으려는 것은 자아(自我)도 아니고 진로(進路)도 아니다. 진실(眞實). 그것이다. 내가 살아야만 하는 진실. 이 세상의 진실. 이 잿빛 세계를 살아내야만 하는 목적이다.
“바다… 좋아해요?”
“일본 섬나라야. 지긋지긋하게 봐.”
힘겹게 꺼낸 말을 여자는 단칼에 잘라버렸다. 뭐가 불만인 걸까? 왜 이렇게 말끝마다 부정이 물들었을까?
“바다 갈 거예요.”
“…사람 많을 거야.”
“해수욕장 말고요. 바다 같지도 않은 바다.”
그래 바다에 갈 것이다. 퇴색 돼버린 낡은 옛적 일. 전부 지나간 그 일이 눈앞에 선명했다. 나는 그 일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던 것일까?
새하얀 파도가 부서졌다. 산산이 부서져서 내는 소리가 시원했다.
“영화에서 보면 이런 곳에다 꼭 뿌리더라.”
나는 무엇을 뿌리냐며 물었다.
“골분(骨粉).”
그 단어가 심장에 박혔다. 얼마나 선득하던지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긴 머리 바닷바람에 날리는 여자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도 죽으면 이런데다 뿌려줘!”
“금하연!”
“헤헤헤헤.”
웃음소리 해맑았다. 마치 어린 애처럼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난만하게 여자는 웃었다.
“하연아,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왜? 사람은 언젠가 죽는 거야. 그러면 영화처럼 이런데다 뿌려지는 게 멋있지 않아? 낭만적이잖아.”
낭만은 무슨, 얼어 죽을 낭만. 낭만 두 번만 더 찾다간 정말 죽어버릴 것 같았다.
“됐어. 뭐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래? 재미없어.”
뾰로통하니 입술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마냥 귀여웠다.
“금하연.”
“됐다고, 기왕 바다에 왔으니까 회나 먹으러 가자! 오징어 회!”
그녀는 내 팔에 팔짱을 끼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검게 물결쳤다.
“쥰코 씨는 회 좋아하세요?”
“일본인이 물고기 못 먹는 거 봤니?”
정말 쥰코라는 이 일본여자는 너무나도 달랐다. 방금 기억 속에서 흘러넘치듯 나왔던 하연이와는 전혀 다른 타입이었다. 그런데도 싫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엇이 좋은지도 몰랐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햇살을 피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