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상 ? 한여름 #.01_소설연재작
  • 환상(幻想)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단지 환상일 뿐이라고…
    무엇을 그렸어도 무엇을 보았어도
    그것은 단지 허무맹랑한 헛것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한여름>
    바람이 불었다. 작열하는 한여름의 태양이 몹시 뜨거웠다. 그런 뜨거운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맴- 맴-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여행용 트렁크 가방을 질질 끄는 여자가 있었다. 보기에도 더워 보이는 시뻘건 기모노에 새카만 머릿결이 흩날렸다. 딸깍거리는 게다(下?)-왜나막신-가 신경을 긁어댔다. 힘들게 걸었다. 몇 백 년은 되어 보이는 한옥. 그 건물로 여자는 걸었다.
    “기설.”
    한옥 문이 벌컥 열렸다. 물빛 한복을 단아하게 입은 여자가 있었다.
    “ラン…。”(란….)
    신도 제대로 못 신고 뛰어나왔다. 이 더위에 기별도 없이 어찌 왔는가 말이다.
    “어찌된 일이야?”
    “…ラン、 もう 全部 終ってしまった。”(…란, 이제 다 끝나버렸어.)
    기모노를 입은 여자는 힘겹게 그리 내뱉고는 쓰러져 버렸다.
    시원했다. 목이 타들어가던 더위가 죄 가셔버린 듯 시원했다.
    “정신이 들어? 이렇게 더운 날에 기모노가 뭐야? 쓰러진 거 기억나?”
    머리를 시원하게 틀어 올려 비녀 하나를 꽂은 여자가 걱정하는 눈치로 물어보았다. 기모노의 여인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끝나버렸다는 게 무슨 뜻이야. 기설.”
    기설이라 불린 여인은 쓰게 웃었다.
    “내가 기설이라 부르지 말랬지.”
    능숙한 한국어로 일본여자가 말했다.
    “내 맘이다.”
    여자는 입을 샐쭉 내밀고는 웃었다. 물빛 한복이 무릎까지만 와있었다. 댕강 잘라버렸는지 원래 그런 건지 새하얀 다리가 시원했다.
    “다 끝나버렸어. 란.”
    “뭐가?”
    란이라는 여자는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누워있던 여자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핑- 세상이 돌았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전부 끝이 났어. 이젠 더 이상 아파하지 않아도 돼.”
    여자의 말에 란의 표정이 굳었다. 여자의 말이 무엇인지 알아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가는 거야?”
    여자는 물었다. 새하얀 벚꽃이 흐드러졌다. 가장 아름다울 때였다.
    “고마워!”
    “고마워!”
    쌍둥이 같이 닮은 여자아이가 동시에 외쳤다. 웨이브 진 흑발, 웨이브 진 금발의 두 어린 여아였다.
    “정말…가는 거니?”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지 여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응, 가야지.”
    “응, 가야지.”
    예정 된 것이다. 이것도 지독한 필연이었을 뿐이다. 벚꽃 흐드러지게 피던 날 가겠다고 약조했었을 뿐이다.
    “잘 가. 카린, 코린.”
    “쥰코도 잘 있어!”
    “쥰코도 잘 있어!”
    두 여자아이의 모습이 흐려졌다. 서서히 투명하게 빛 바라듯 그리 사라졌다. 그 곳에는 벚나무 하나 그리 서있었다.
    보내야 했던 것이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지독해도 아파해도 필연이었을 뿐이다. 쥰코는 쓰게 웃으며 짐을 챙겼다. 가야했다. 이제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떠나게 되어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은 신(神)의 섭리 안에 있을 뿐이었다. 인간이 아무리 바동거리며 얻어내려고 한들 신의 계획에 없다면 이뤄질리 없었다. 서러워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도 이리 돼야만 하는 거라면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서 이리로 왔어.”
    쥰코의 말을 듣던 란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게 뭐냐? 결국 너 도망쳐 왔잖아!”
    소리치는 란에게 쥰코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대꾸할 자격도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란. 기란.”
    쥰코의 말에 란은 눈을 흘겼다. 더웠다. 더위가 턱턱 달라붙어 축축 늘어졌다.
    “너 왜 이렇게 됐니? 뭐가 문제야? 그냥 좀 편하게 살면 안 돼?”
    “…란.”
    언제부터 이렇게 돼버린 것일까? 그날 그 겨울비가 질척질척 내리던 날. 필연이 깨져버려서? 아니면 그 아이들이 하늘로 올라가서? 무엇인지 몰랐다.
    “너, 또 도망칠 거잖아.”
    란의 말에 쥰코는 쓰게 웃었다. 기란의 말이 맞았다. 분명 자신은 도망쳐 다닐 것이다. 이번 연에 이렇게 도망쳐 버렸으니 말이다. 이 목숨 끝나는 날까지 그렇게 도망쳐 버릴 것이다.
    “그러면 안 돼? 내가 무슨 잘못인데? 왜 나만 이래야 하는데! 나도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 나라고 뭐 이러고 살고 싶은지 알아?”
    쥰코는 악에 바쳐 말했다. 뭐가 서러웠던가. 그저 하염없이 쏟아냈다. 듣기 싫었다. 도망쳐도 된다고 누가 말해줬으면 했다.
    “쥰코. 내가 알던 당당했던 노리유키 쥰코는 어디로 간 거야? 넌 기설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어!”
    “하하…하하하하하!”
    紀雪. 노리유키. 기설. 쥰코를 처음 알았던 그날 란이 불렀다. 자매 같지 않느냐고 기란. 기설 그렇게 불렀다. 쥰코는 그때 웃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그건 성이지 이름이 아니지 않냐 맞받아 쳤다. 그래도 불쾌하다고 화내지 않았다. 별명 같아서 기분 좋다고 그냥 그렇게 부르라고 했다. 가끔 짜증은 냈지만 싫어하진 않았다. 의자매 같은 쥰코와 란이었다.
    젊은 남자였다. 무엇을 찾는 건지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란은 자신의 마당에서 기웃거리는 남자에게 시선이 꽂혔다.
    “여기서 뭐하시는 거죠?”
    란의 말에 남자는 머쓱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아…저기 여기, 책방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아, 들어오세요.”
    “네?”
    “찾던 책방이 여기라고요.”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책방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여자는 앞장서서 한옥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그제야 깨달았다. 문화제로 지정되어 있을 법한 이 오래된 가옥이 그가 한참을 찾아 헤매던 책방이었다.
    “무슨 책을 찾으세요? 여기는 고서(古書)밖에 없어요.”
    요즘 뜬다던 앱북이나 이북 같은 건 취급도 하지 않았다. 아니 자기계발서나 판타지, 로맨스 이런 장르 문학도 없다. 어디 진품명품에 나가야 할 것 같은 고서적이 가득했다. 남자는 한옥을 둘러보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그런 한옥이었다. 한옥을 채우고 있는 가구도 오래된 고가구뿐이었다. 어디 공장에서 찍어 나온 듯한 양산품 따윈 없었다. 시대의 흐름을 거꾸로 돌리는 듯 했다.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대청마루 위 놓여 있는 3DTV였다.
    “뭐 찾으세요?”
    란이 물었다. 남자는 화들짝 놀랬다.
    “뭐가 좋을까요?”
    남자의 말에 란이 질려버렸다는 표정이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쥰코가 웃었다. 한옥에 어울리지 않는 일본인형 같은 여자가 나오자 남자는 더 놀란 눈치였다.
    “고민이 한가득 이군요. 당신.”
    쥰코가 말했다. 남자는 쥰코의 말에 당황해 아무런 말도 못했다. 붉은 입술에서 또렷한 한국어가 나왔다. 그저 얼어버렸다.
    “…쥰코?”
    란의 물음에 쥰코는 고개를 저었다. 도망쳐 왔는데 어째서 다시 이러고 있는지 몰랐다. 히로키군도 잊고 그리 왔는데, 지독한 필연 그렇게 끊어내고 왔는데 어째서 이러고 있는가 말이다.
    “당신의 소원 들어주도록 할게요. 단 동등한 대가가 필요해요.”
    남자는 그저 멍하니 서있었다. 뭐라 말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이상하게도 못했다.
    “이름.”
    그녀의 말에 뭐에라도 홀린 듯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신도윤입니다.”
    “그거면 됐어요.”
    쥰코는 일어섰다. 빨간 기모노 자락에 검은 나비가 흩날렸다. 나비보다 더 검은 머릿결이 물결쳤다. 인형 같은 그녀의 모습에 도윤이라는 남자는 넋이 나갔다.
    “나랑 어디 좀 가요.”
    “..기설!”
    다시는 기설이라 안 부른다고 해놓고서 란은 다시 그리 불렀다.
    “하루 뿐의 환상이야. 이 남자는 환상을 쫓고 있으니까. 내가 환상이 되면 되지 않겠어?”
    쥰코의 말에 란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렇게 되어버릴 필연이었다. 훗날 그립다고 사무치게 그리워해도 환상일 뿐이듯이. 그 환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있을 것이다.
    쥰코는 남자의 손을 잡고 나왔다. 게다를 신었다. 딸깍거렸다. 도윤이라는 남자는 멍청한 건지 이 상황을 즐기는 건지 쥰코에게 붙잡혀 나왔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버럭 화도 못 냈다. 여자에게는 언제나 친절해야한다는 교육을 어린 시절부터 받고 자란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단지 멍청한 것일까? 순진하기만 해 보였던 그와 이 사람이 겹쳐 보이는 쥰코였다.
    “환상을 잡으러.”
    “네?”
    당황하듯 반문해왔다. 쥰코의 붉은 입술이 익숙하듯 호를 그리며 웃었다.
    “당신, 환상을 찾고 있잖아. 지독한 환상.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을 환상. 그것만 잡을 수 있다면 현실이 될 것 같고 현실이 된다면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잖아. 안 그래?”
    남자는 여자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지독한 환상을 찾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신(神)의 섭리, 진리 같은 것들을 겪어보고 싶었다. 그것이 아무리 타인들이 허무맹랑한 환상이라 하는 것이어도 좋았다. 그 환상이 눈에 펼쳐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진리였고 구원이었다.
    매미가 시끄럽게 울었다. 고막을 죄 찢어놓을 듯 그렇게 울었다. 서럽고 서럽게 한이 서린 듯 울어댔다.


  • 글쓴날 : [12-05-21 14:58]
    • 장미나 기자[dcon@myde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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