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의 ‘을유문화사’와 ‘현암사’
대한민국 출판史의 신세기를 열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뒤 4개월 동안 45개의 출판사가 등록했다.
오랫동안 억눌렸던 민족 문화의 회복 열망이 출판이란 형식으로 대거 분출됐다. 이 가운데엔 지난 66년 동안 대한민국 출판 역사의 정신적 지주였던 을유문화사와 현암사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 두 출판사의 창업 배경과 초창기 활동을 살펴본다.
●1945년 12월 1일
을유문화사, 창립의 발걸음을 내딛다
때는 1945년 을유년(乙酉年)이었다. 한국 출판의 역사를 새롭게 쓰기 시작한 을유문화사의 이름은 이렇듯 60간지 중 22번째의 해 ‘을유’(乙酉)에서 비롯됐다. 1945년은 오랫동안 억눌렸던 민족 문화의 회복 열망이 출판이란 형식으로 대거 분출되던 시기였다. 그 해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 동안 미 군정당국이 공포한 ‘군정법령 19호’에 따라 45개의 출판사가 등록을 마쳤다.
그리고 1946년 한 해 동안엔 150개까지, 1947년에는 584개까지 출판사가 급증했다. 을유문화사도 물론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 출판사가 지금까지 주목받는 이유는 육십 갑자(甲子)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 그 해 을유년의 출판 정신이 외길로 이어 지고 있기 때문이다. 약관 34세의 나이로 이 출판사를 설립한 정진숙. 그가 지난 2008년 96세를 일기로 작고하기 전 펴냈던 《출판인 정진숙》(을유문화사, 2007)에는 바로 그 같은 을유문화사의 외길 출판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다.
‘책을 펴내는 것은 어쩌면 자녀를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장이 지나칠 정도로 매사 간여를 하게 되면 편집진의 독창성을 훼손할 수 있다. 마치 부모의 지나친 간섭을 받고 자란 아이가 독립심이 약한 ‘마마보이’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편집은 편집, 영업은 영업대로 스스로 판단해 최선을 구가하도록 하는 경영방침을 고수했다. 을유 문화사 창립 당시의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늘 스스로를 닦아세 우곤 했다. 책의 판매 동향에 따라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기로 했다. 많이 팔리는 책보다, 좋은 책을 펴내야 한다는 신념 에서 출판을 해왔던 것 같다.’(247쪽)
위당 정인보 선생의 ‘한 말씀’에 자극 받아
1945년 8월, 청년 정진숙은 동일은행(조흥은행의 전신)의 행원으로 광복을 맞았다. 일제 말기,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낱말이 있었다.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조선 사람을 이르던 말이다. 바로 그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8개월 가까이 수원형무소에서 영어 생활을 한 바도 있는 그로서는 바뀐 세상 에서 무언가 보람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광복 이튿날 즉각 사표를 냈다. 영원한 출판인으로서의 정진숙과 66년 을유문화사의 첫 발걸음은 그렇게 시작됐다.
어느 날 우연히 고려문화사에서 편집 일을 하던 조풍연 (1914~1991)과 아동문학가 윤석중(1911~2003), 은행원으로 일하던 민병도(전 한국은행 총재, 1916~2006) 등을 만났 다. 그들은 정진숙에게 느닷없이 출판업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정진숙은 그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 다. 출판과는 거리가 먼 사회를 살아 왔기 때문이다.
“나는 출판에 대해 무지했고, 무엇보다 그다지 돈벌이가 잘될 것 같지 않았어. 그런데 집안 어른이기도 한 위당 정인보 선생께서 우리말, 우리글, 우리 민족의 혼을 되살리는 유일한 문화 사업이 출판이라고 하시는 말씀에 결심을 하게 됐지.”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45년 12월 1일을 D-데이로 잡고 윤석중, 조풍연, 민병도, 정진숙은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 건너편 영보빌딩 4층에 출판사를 차렸다.
‘출판업을 비롯한 문화 사업을 통해 자연과학, 인문과학, 예술 등 각 분야에 걸쳐 정신의 양식을 제공한다.’ 출판사의 설립 목적 또한 또렷했다. 하지만 해방정국 속의 당시 상황은 출판 산업의 3박자라 할 수 있는 저자군과 책을 사볼 독자군이며 인쇄 시설 모두가 열악했다. 이들 30대 초반의 패기만만한 새내기 출판인들은 그러나 현실적 여건만 탓하며 가던 길을 멈출 수는 없었다.
26쪽짜리 한글 교본 《가정 글씨 체첩》을 첫 책으로
“일단 독자들에게 한글부터 가르치자는 생각을 하게 됐지. 그렇게 해서 낸 첫 책이 《가정 글씨 체첩》이란 제목으로, 46 년 2월 초하룻날에 펴낸 스물 여섯 쪽짜리 책이었어. 책 한권 값이 4원이었는데 하도 잘팔리니까 광주 어디선가는 해적판이 나돌기도 했지.”
정진숙 회장이 작고하기 전 한 신문과 인터뷰를 하면서 밝힌 내용이다. 을유문화사의 66년 역사는 이렇듯 26페이지짜리 한글교본이 첫 시작이었다.
을유문화사는 그 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나기까지 일주 일에 한 권꼴로 책을 많이 펴낼 만큼 활발하게 움직였다. 이미 1947년엔 한글날을 맞아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학회와 함께 미국 록펠러재단으로부터 종이를 지원받아 《우리말 큰사전》 (전 6권)을 펴내기 시작했는가 하면, 1948년엔 ‘박물관 총서’를 간행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영보빌딩에 있던 사무실을 인민군들이 점령 했었지. 을유 식구들은 숨어서 피해 다닐 수밖에 없을 때였는 데, 그들이 우리 책들을 바리케이드로 사용하다가 철수할 때모조리 태워버려 초창기 책 일부가 없어진 게 많이 아쉬워.”
우리 출판계의 정신적 지주이자 산 역사인 을유문화사의 처음은 이렇듯 역사의 수난사와 정비례하며 어수선했다. 하지만그 속에서도 선구자적 출판 정신으로 펴냈던 《소파 동화 독본》 (전5권)이며, 어린이잡지 《주간 소학생》의 창간과 《그림얘기 책》 등의 다양한 어린이책 발간이며, 학술지 월간 《학풍(學風)》 을 창간했던 일 등, 이 출판사의 초창기 출판 이력이야말로 세계 7대 출판강국으로 성장한 우리 출판 역사의 소중한 마중물로 기록되게 됐다.
‘책으로 내가 살고, 우리 국민 전체가 살아야 한다는…’
어디 그뿐인가? 양주동의 《여요전주》 같은 학술서적을 화려한 양장본으로 출간했던 일이며, 한국전쟁 중에 펴냈던 주요섭의 《사랑손님과 어머니》 같은 문학서 출간이나 1959년 진단학 회와 함께 본격 통사인 《한국사》(전7권)를 펴내기 시작했던 일이며, 세계문학전집(전6권. 1965년에 완간)의 간행을 시작한 일 등등은 우리 출판 역사를 정리하는 데 있어 단 하나라도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기록으로 남게 됐다.
‘어려움 속에서도 7,000여 종의 책을 펴낸, 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반드시 해야 된다는 의지, 책으로 내가 살고 우리 국민 전체가 살아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였다. 그렇기에 이해타산보다는 영구히 빛바래지 않고 남을 책을 만들어야 했다. 출판은 기업 이상의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출판을 해서는 안 된다. 책 한 권을 낼때 쏟아야 하는 노력과 정성을 감안하면,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서 책이라는 상품은 너무도 비효율적이다. 출판인에게 분명한 사명감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출판인 정진 숙이 우리 출판계에 남긴 영원한 유훈 ‘한 말씀’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1945년 12월 25일
현암사, 《건국공론》을 창간하다
‘나는 오십여 년 동안 책바치로 살아 왔다. 이십대에 잠시 공무원을 지냈지만 일본 지배하의 공무원 생활은 나에게 큰 희망이 될 리 없었다. 날마다 죽음의 긴장감이 감돌던 그 지긋지긋한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드디어 해방이 되었다. 육이오 동란으로 정치, 경제, 사회가 모두 무서운 격랑 속에 휘말렸지만 나는 어떤 순간에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많은 가족과 온갖 신고 (辛苦)를 겪었지만 그래도 길이 있었다. 바늘구멍 같은 틈새가 오솔길이 되기도 하고 오솔길이 큰 길로 확 트이기도 했다. 그동안 나를 도와준 여러 선후배에게 항상 빚진 마음이지만, 돌이켜 보면 후회 없는 삶이었다. 내 생애도 이 책바치로 마감할 것이다.’ 현암사를 창업한 조상원 회장(1913~2000)이 생전에 펴냈던 회고록 《그래도 길이 있었다》를 통해 밝힌 대목이다. ‘책바치’란 가죽 신을 만드는 장인을 일컫는 ‘갖바치’에서 따온 말이리라.
1945년 12월 25일 현암사는 대구에서 ‘건국공론사’란 이름으로 창업, 시사종합지 《건국공론》 창간호를 통해 세상과 첫 인사를 나눴다. 1949년 12월 《한국공론》으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해방 정국 속에서 휴간과 복간을 반복했던 이 잡지의 창간호 발행 부수는 3만부. B5판 32쪽 분량에 정가는 4원 50전이었다.
젊음 하나만 믿고 덜컹 창간한 잡지의 어려움
이 잡지를 창간했던 조상원은 1913년 경북 영풍에서 태어나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우체국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독학으로 주경야독한 끝에 1932년 2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했던 자수성가형 수재였다.
그 뒤 경북도청 학무과 등에서 공무원으로 재직하다 광복을 맞은 그는 해방 직후 대구일보에서 판매부장 겸 지방부장을 지내다 그만두고 곧바로 그 해 12월 《건국공론》을 창간한다. 그의 말을 빌자면 ‘활자 호수도 모르고, 젊음 하나만 믿고 덜컹 창간한’ 이 잡지는 당시 혼란기 속의 한국 지식인 사회에 많은 기여를 했다. 하지만 그의 의지와 달리 문화적 토양이 척박했던 시기, 출판 사업이란 건 결코 녹록한 게 아니었다. 잡지는 한국 전쟁 중 전시호까지 내며 버텼지만 1952년 5월을 끝으로 발행을 멈추고, 조상원의 출판 집념은 일단 실패로 돌아간다.
“32살에 활자 호수도 제대로 모르면서 출판에 뛰어들어 50 년이라는 긴 세월을 '출판쟁이'로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개인적인 적성 때문이었습니다. 15살 때 책에서 본 좋은 동시를 인찰지 위에 베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일종의 출판이었던 셈이지요. 아무리 힘들어도 책을 만드는 일이 즐겁게만 느껴졌으니 출판쟁이가 제 팔자였던 것 같습니다.”
지난 1995년 창립 50주년을 맞아 <출판저널>과 인터뷰를 하면서 밝힌 조상원 회장의 ‘출판쟁이 팔자’는 1차 실패에도 불구하고 꺾일 줄 몰랐다. 1951년 12월, 출판사 이름을 ‘건국공 론사’에서 ‘현암사’로 바꾼 뒤 처음 펴낸 책 《처세철언》(조상원 편저, 1953)이 재미(?)를 보면서 계속 이어지는데….
1959년 《법전》 발간 계기로 안정기를 맞다
-1954년 10월, 《셰익스피어 이야기》(찰스 램)를 제1권으로 ‘현 암문고' 시리즈 출판 시작. 이후 《장난꾸러기》(루드비히 토마), 《적과 흑》(스탕달), 《대지》(펄벅) 등을 잇달아 출판하다.
-1956년 7월, 대구에서 서울 삼청동으로 이주하다. 이때 대구에서 가지고 있던 인쇄 시설 일부를 옮겨 오다. 현암사의 삼청동 시대가 개막되다.
-1959년 4월, 일본식 ‘육법전서'라는 이름을 탈피한 대한민국 법령집 《법전》 편찬 작업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대망의 탄생을 맞이하다. 제호의 신선함과 관련 조문 참조를 삽입한 편찬 방법의 독창성으로 《법전》 초판은 발매와 동시에 매진되면서, 정가 4천 환짜리가 6천환으로 암거래되는 기현상이 일어나다.
홈페이지(www.hyeonamsa.com)를 통해 이 출판사의 연보를 살피다보면 바로 이 시기, 《법전》을 펴내던 1959년 시점을 분수령으로 현암사는 사뭇 분주해지기 시작하는데, 다음은 《법전》에 대한 창업자 조상원의 열정을 읽을 수 있는 대목 이라 눈길을 끈다.
“《법전》이 처음 나올 때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아버님은 안방에 조그만 책상을 갖다놓으시고 편집 작업을 하셨 는데 옆에 요강이 있었습니다. 화장실 갈 시간도 아끼기 위해 서였죠. 3년 동안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2000년 돌아 가시기 직전까지도 《법전》의 교정·교열을 보셨어요.”(금년 3 월 작고한 아들 조근태의 생전 회고) 그로부터 50년. 현암사는 자금 사정이 좋아질 때마다 미개척 분야로 눈을 돌려 한국 출판시장의 저변을 확장했다. 한국학 단행본의 붐과 경서 열기 등이 바로 대표적 사례였는데, 급작스럽게 침투해온 서구문화의 범람을 동양사상으로 맞서겠다는 뜻으로 출간한 《신역 사서삼경》은 공전의 히트까지 쳤다.
이밖에도 1966년, 뒷날 계간 문예지시대의 개막을 본격적으로 예고했던 국내 최초의 계간 문예지 <한국문학>을 창간했던 일이며. 1969년 우리 학자 100명을 동원해 고전 100권을 해제한 《한국의 명저》를 발간함으로써 한국학 붐에 불을 지핀 일이며, 1970년 ‘현암신서’ 시리즈를 통해 한국 출판계에 단행본 붐을 일으킨 일이며, 1970년대 초 일찍이 서양사 일변도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동서양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조명하는 대중적 세계 역사서를 편찬한다는 방침 아래 《대세계사》(전18권) 을 출판한 일 등등, 이 출판사의 지난 시기 업적은 곧 대한민국의 출판 역사와 정확히 맞물리며 창립 66년을 맞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돈을 저축하느니 인심을 저축하겠다’는 자세로
“출판사를 경영해오면서 ‘돈을 저축하느니 인심을 저축하겠 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려울 때마다 주위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70년대 중반 무리하게 《육당 최남선 전집》 15권을 내고 회사가 최고의 재정적 위기에 봉착 했을 때에도 계몽사를 비롯한 동료 출판사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현암사를 창업하고 일궜던, 대한민국 출판의 역사를 다시 쓰고 진보시켰던 영원한 출판인 조상원 선생이 생전에 즐겨 했던 ‘말씀’이다. 독자와 출판인 모두 기억해둘 일이다. 우리 현대사속 출판계의 시원(始原)엔 바로 이처럼 재물보다 덕(德)을 먼저 생각했던 ‘큰 어른’이 있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