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신앙과 국가 간의 대표적 충돌 사건 〈황사영 백서〉
거룩한 순교인가, 민족의 반역인가!
신앙의 자유와 국가의 안위가 충돌할 때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여기에는 신앙인과 비신앙인 사이에 크게 차이가 있을 것이다. 종교와 국가의 관계는 오래전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현대 국가는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봉건왕조 시대에는 국가가 금압하는 종교를 믿거나 선교 활동을 하다가 혹독한 탄압을 당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았다. 우리의 경우도 신라 초기나 조선 초기의 불교 탄압과 조선 후기의 천주교 탄압은 대표적인 종교 박해로 기록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는 대부분 국가가 종교를 일방적으로 탄압하는 사례이다. 국가가 정교(政敎)를 장악하면서 종교를 정치의 지배 아래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교’를 거부하고 새로운 종교를 창도하거나 이를 믿다가는 수난을 당하기 일쑤였다. 조선 말기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는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과거 국가 간의 종교 전쟁은 제쳐두더라도 현재 나타나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은 심상치 않은 양상이다. 이른바 ‘문명 충돌’은 종교로 인한 전쟁이거나 충돌인 경우가 많았다. 영토 전쟁, 인종 전쟁, 이데올로기 전쟁 등 숱한 전쟁 중에서 가장 참혹하고 가열 찬 것이 종교 전쟁이라 한다. 그만큼 절대적인 신앙심과 배타적인 적대감이 심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벌어진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은 단순히 보면 국가 권력에 의한 천주교도의 탄압이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고자 국가 권력을 부정하는 종교의 도전이었다. 이 사건은 천주교의 입장에서는 순교에 해당하고, 국가의 입장에서는 배족의 행위가 된다.
신앙과 국가 간의 대표적 충돌 사건인 〈황사영 백서〉 사건을 계기로 이후 조정은 더욱 가혹하게 천주교를 탄압하게 되었 다. 문헌 하나가 ‘필화 사건’ 이상으로 역사의 물굽이를 바꾸었다.
신유박해의 천주교도 탄압
초기 한국 천주교 지도자의 한 사람인 황사영은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제천의 배론(舟論)으로 피신, 은거하였다. 천주 교에 비교적 유화적이었던 정조가 죽고, 1801년 순조가 즉위하여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가 어린 임금의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계의 주도 세력이 시파(時派)에서 벽파(僻派)로 바뀌었다.
새로 권력을 장악한 벽파는 천주교를 ‘부모도 모르고 군주도 모르는 무부무군(無父無君) 멸륜지교(滅倫之敎)’로 단정하면서 박해령을 내리고 전국의 천주교도 체포에 나섰다. 이른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동원한 수색에서 수많은 교도가 체포되었고, 300여 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이때 희생된 천주교인은 중국인 주문모(周文謨)와 초대 교회의 지도적 평신도가 대부분이다. 주문모는 피신하였다가 얼마 뒤자수하여 새남터에서 효수되어 순교자의 길을 택하였다.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김완숙, 최필공, 홍교만, 김진숙, 홍낙민 등 초기 교회 지도자들이 붙잡혀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정조의 서제(庶弟)인 은언군의 부인 송씨 등 왕족도 사사당하고, 지방 에서도 수많은 지도급 천주교인이 붙잡혀 처형되었다.
천주교가 한국에 전래하면서 최초로 가해진 대대적인 박해였다. 살아남은 교도들은 위험을 피하여 깊은 산중이나 벽지로 숨어 들었다. 황사영도 체포령이 내려지자 박해를 피해 배론으로 숨었다.
황사영이 배론의 토기 굽는 마을로 피신하여 은거하고 있을때 어느 날 신앙의 동지 황심(黃心)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천주교 박해의 경과와 교회의 재건책을 논의하게 되고, 황사 영은 이를 토대로 자신의 의견을 흰 비단에 꼼꼼히 기록하였다. 조선 정부의 참혹한 탄압상과 천주교 재건 방안을 적어서 중국 베이징의 구베아(Gouvea, A. de) 주교에게 전달하려는 것이었다.
황사영, 그는 누구인가
황사영은 1775년 강화도에서 한림학사 황석범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다산 정약용의 조카딸과 혼인하였다. 어려서부터 스승이자 처숙인 정약종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면서 관직 진출을 단념하였다.
20세 때 주문모 신부를 만나면서 그의 측근 인물로 활동하였으며, 서울로 거처를 옮겨 서울 지역의 지도적 인물로 활약 하다가 신유박해를 맞아 충청도로 피신하여 이른바 〈황사영 백서〉를 쓰기에 이르렀다.
백서는 길이 62센티미터, 너비 38센티미터의 흰 비단에다 한 줄에 95~127자씩 121행, 모두 1만 3,311자를 먹글씨로 깨알같이 썼다. 황심과 신도 옥천희(玉千禧)를 10월에 중국으로 떠나는 동지사 일행에 넣어서 베이징(北京)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옥천희가 9월 20일(음력) 체포되고, 뒤이어 황심도 체포되면서 백서는 압수되고 황사영도 9월 29일 붙잡히는 몸이 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황사영은 대역무도죄로 11월 5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능지처사당하고 부모와 처자, 일가친척이 모두 귀양을 가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다.
백서는 원본이 압수된 이후 의금부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 년 갑오경장 뒤, 고문서를 파기할 때 우연히 당시의 서울교구장 이었던 뮈텔(Mutel, G. C. M) 주교가 입수하여 1925년 한국 순교복자 79위(位)의 시복식 때 로마 교황에게 전달되었다.
백서에 담긴 주요 내용
백서의 내용은 1785년 이후의 한국 천주교회의 사정과 박해의 발생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고, 신유박해의 전개 과정과 순교자들의 약력을 소개한 데 이어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자수, 순교의 과정 등을 상세하게 적었다. 특히 문제가 된부분은 폐허가 된 조선 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는 방안에 대한 언급이었다.
황사영은 이 대목에서 구베아 주교가 조선의 종주국인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이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6만 명을 조선으로 보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서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은 경제적으로 무력하므로 서양 제국에 호소하여 성교홍통(聖敎弘 通)의 자본을 얻고자 한다. 둘째, 북경 성당과 조선 천주교 신도와의 연락. 셋째, 조선은 청국 황제의 명을 받들고 있으 므로 청국 황제의 명으로 선교사를 조선에 받아들이도록 할 것. 넷째, 청이 조선을 병합하고 그 공주를 조선이 취하여 의관을 하나로 할 것. 다섯째, 서양으로부터 군함 수백 척과 정병 5~6만, 대포, 기타 필수 병기를 가지고 와서 조선 국왕에게 위협을 가하여 선교사의 입국을 자유롭게 해줄 것 등이다.
청국에는 〈가백서〉 만들어 보내
황사영은 정부의 심한 탄압으로 교도들이 참혹하게 희생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외세의 무력을 빌려서라도 복수를 하고, 교회의 세력을 회복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다음은 백서 가운데 청국에 대한 ‘경제 지원’을 요청하는 부분이다.
금년 박해가 끝난 후 화를 입은 사람은 전 재산이 다 없어졌고, 살기를 도모한 사람들은 산속으로 도망하여 가난한 형편은 도리어 갑인년(1794년 주문모 신부를 받아들인 해) 이전보다 더 심해서 설령 무슨 계책이 있다 하더라도 시행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비록 파괴된 뒤이지만 진실로 재물만 있으면 아직도 할 일이 있습니다.
다음은 ‘군사 동원’의 부분이다.
만약 함선 수백 척과 정병 5~6만 명을 얻어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 겸하여 글 잘하고 사리에 밝은 중국 선비 3~4명을 데리고 바로 이 나라 해변에 이르러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고 말하기를 “우리는 서양의 전교하는 배요. 자녀나 재물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교황의 명령을 받고, 이 지역 생령을 구하러 온 것이니 귀국에서 선교사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이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오.
아무리 신교(信敎)의 자유라는 신앙상의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외세를 끌어들여 자기 나라의 국왕에게 위협을 가하 라는 요청은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시 조선 정부는 황사영의 백서를 압수하여 그 내용에 아연실색하여 관련자들을 즉각 처형하는 한편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한층 강화하였다.
이와 함께 백서의 사본이 중국에 전달되어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이 알려질 것을 염려하여 중국에 파견하는 동지사 편으로 신유사옥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별도의 〈토사주문(討邪奏文)〉을 만들어 보냈다. 그리고 〈황사영 백서〉의 내용을 16행 923자로 대폭 축소하여 청나라 예부(禮部)에 제출하게 하였다. 이렇게 축소된 백서를 〈가백서(假帛書)〉라고 한다. 여기에는 중국의 감호책이나 종주권 행사 등에 관한 내용은 전부 삭제하고 서양 선박과 군대 파견을 요청한 사실만을 추려서 천주교인 박해의 정당성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황사영이 처형(또는 순교)된 지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행위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종교인들은 신앙 자유의 입장에서, 일반인들은 애국의 입장에서 접근하였다. 과연 황사영의 행위는 신앙을 위한 거룩한 순교인가, 아니면 반역인가.
황사영(黃嗣永, 1775~1801. 11. 5)
세례명은 알렉산데르. 한림학사 황석범(黃錫範)의 아들로 태어 났다. 정조 14년(1790) 16세의 나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의 맏형인 정약현의딸 정명련과 결혼한 후 천주교도가 되었다. 1794년 한국에 온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지도하는 명도회(明道會)에 가입하여 스승 이자 처숙인 정약종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신앙생활에 충실하기 위해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단하고 관직 진출을 단념했다. 순조 1년(1801) 신유박해 때는 제천 배론의 산중에 피신, 토굴 속에서그 유명한 <황사영 백서>를 썼다. <황사영 백서>를 쓴 배론(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은 지금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가 되었고, 그가 태어난 강화도 갑곶의 생가 터와 그의 묘가 있는 양주시 장흥도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