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전쟁의 화약고 토머스 페인의 《상식》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독립운동은 처절하고 비참 하다. 북아메리카도 다르지 않았다. 혁명과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전쟁)에는 피압박 민중을 분기시키고 참여시키는 선언문 또는 격문이 요구되었다.
아메리카(미국) 독립전쟁에 불을 붙인 문서는 토머스 페인의 《상식 Common Sence 》이라는 작은 책자(팸플릿)가 그 막중한 역할을 했다.
미국의 초대 부통령이자 제2대 대통령인 존 애덤 스가 “페인의 펜이 없었다면 조지 워싱턴의 칼은 쓸모가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할 만큼 페인과 그의 책은 아메리카 독립전쟁의 불쏘시개와 화약고의 역할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프랑스혁명과 영국의 급진주의 민주화운동에서도 크게 활약하여 ‘세계 혁명의 전도사’로 불리는 혁명가다.
페인은 39세 때인 1776년 1월 10일 《상식》을 출간 하여 불과 3개월 만에 12만 부가 팔리고, 이후 몇 달 사이에 판매 부수는 50만 부에 이르렀다. 당시 아메리카 13개 식민주에서 문자 해독이 가능한 사람 대부분이 읽은 것으로 알려진다.
페인은 1737년 1월 29일 영국의 잉글랜드 동부에 있는 노퍽 주 셋퍼드의 퀘이커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이 가난 하여 그래머 스쿨을 자퇴하고 아버지에게서 코르셋 제조법을 배웠다. 가출하여 선원 생활에 이어 동업자와 코르셋 제작, 1759년 결혼했으나 곧 아내와 사별, 밀수 감시원, 영어 교사, 재혼한 아내와 식료품 가게 운영, 가게의 부채 떠안고 아내와 이혼 등 힘겨운 청춘을 보냈다.
1774년 안면이 있었던 프랭클린을 찾아갔다가 그의 권유로 10월에 독립전쟁의 와중에 있는 식민지 아메리카로 건너갔다. 이듬해 1월 갓 창간한 〈펜실베이니아 매거진〉의 편집을 돕다가 능력을 인정받아 편집주임으로 발탁되었다.
미국 이민하여 독립전쟁의 불 지펴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성격의 그는 미국에 이주하여 지내면서 영국의 식민지배 정책이 얼마나 모순투성이며, 따라서 아메리카의 독립이 중요한가를 절감하였다.
당시 영국은 독일의 영주한테서 용병을 사들이고, 본국의 부랑자와 범죄자들까지 끌어들여 무장시켜서 아메리카 독립군과 싸우도록 했다. 심지어 아메리카 인디언 들을 매수하여 독립군을 학살하는 데 앞장세웠다. 이와 같은 참사를 지켜보면서 페인은 이주민들과 병사들에게 독립의 정신적 지침이 되는 글을 쓰게 되었다.
아메리카 독립군은 대부분 미국의 개척자인 대륙에서 이민 온 농민이나 상공 업자 등 민병들이었다. 오합지졸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는 전투에 필요한 무기뿐만 아니라 독립에 대한 확신의 정신무장이 요구되었다.
페인은 며칠 밤을 지새워가면서 《상식》을 썼다. 그런데 막상 이것을 출판하려는 업자가 없었다. 내용이 대영제국에 대한 ‘반역’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친구의 소개로 스코틀랜드 출신의 공화주의자 로버트 벨을 알게 되었다. 출판으로 손해가 생기면 모두 보상하고, 이익이 생기면 그 절반을 출판사에 준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하마터면 이 세기적인 문서는 햇빛을 보지 못할 뻔했다.
〈펜실베이니아 매거진〉은 ‘《상식-북아메리카의 거주자들에게 호소한다》 정가 2실링, 오늘 제3번가에서 로버트 벨에 의해 출판, 현재 발매 중’이라고 역사적인 문서의 출간 소식을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그러나 입소문을 통해 책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페인은 이 책을 펴내면서 저자를 밝히지 않고 익명으로 처리했다. ‘주목할 만한 초점은 저자가 아니라 주의 主義 그 자체’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그가 갓 이민 온 신출내기이고, 저명인사가 아니어서 책의 판매에 지장이 있을 것을 우려한 때문이기도 했다.
페인이 《상식》에 의도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①정부의 기원과 그 목적을 밝혀 영국 정부의 방식이 어긋난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이에 대해 아메리카의 민중은 당연히 반항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려 한 것.
②영국 헌법의 불합리한 점을 논해 헌법상의 권리 주장이 쓸모없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
③조지 3세의 본질을 폭로하는 한편, 성서나 합리적인 근거에 바탕을 두고 왕정의 불합리한 점이나 잘못된 점을 밝혀 영국 국왕에게 충성하려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독립을 결심하게 하려는 것.
④영국제국 안에 머물러 있어야 아메리카의 번영과 평화가 보증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사람들에게 분리ㆍ독립이야 말로 참된 평화와 번영의 길이라는 것을 설명하려 한 것.
⑤아메리카는 충분히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자신감을 갖게 한 것.
_토머스 페인 지음, 박광순 옮김, 《상식론》, 범우사
페인의 글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대단히 격동적인 내용이었다. 그래서 영국의 식민통치에 기대려는 이주민들의 독립정신에 불을 댕겼다. 타성에 젖은 식민주의의 근성을 버리도록 일깨웠다. 독립만이 영국 및 조지 3세와의 분쟁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확신을 제시했다. 《상식》의 한 대목이다.
타격을 가하는 외에는 아무것도 효험이 없을 것이니, 제발 우리들은 법령들의 폐기에 너무나도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영토를 얻기 위한 것만큼 법률을 위해 벙커 힐 전투 같은 희생을 치른다는 것은 커다란 우를 범하는 것이 다. (……) 그것은 한 도시, 한 주, 한 군, 한 왕국의 문제가 아니라 한 대륙의 문제이다. 그것은 하루, 1년, 한 시대의 관심사가 아니다. 후세들의 문제가 이 투쟁에 얽혀 있다. (……) 이제 대륙의 연립과 신념과 명예의 씨앗을 뿌릴 때가 왔다. 대륙의 혁대가 너무 느슨하게 매어져 있다. 독립은 우리들을 한데 묶어 합치게 하는 유일한 희망이다.
페인의 《상식》을 읽은 아메리카의 평범한 이주민들은 혁명의 열기에 빠져들었다. 독립보다는 영국에 세금을 바치 면서 적당히 살아가는 것이 편하다고 인식했던 사람들이 속속 독립전쟁에 참가하고 ‘절대독립론’이 식민지 주민의 대세가 되었다. 《상식》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이제까지 영국과 화해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많이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달콤한 꿈처럼 사라져버리고 우리는 이전과 똑같은 상태에 있다.
어떤 사람이 미국은 이제까지 영국과 결합하고 있었기 때문에 번영한 것이고, 따라서 장래의 행복을 위해선 지금까 지와 마찬가지로 결합하고 있는 것이 필요하고, 이렇게 하면 마찬가지 결과를 얻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따위 말보다 바보 같은 것은 없다. 그러한 말이 성립될 수 있다면, 아기는 우유로 잘 크니 고기는 결코 먹이지 말아야 한다든가, 인생 최초의 20년간은 다음 20년간의 선례가 된다는 말이 성립될 것이다.
그렇지만 영국은 조국이 아니냐고 어떤 사람은 말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영국의 행동은 더욱 파렴치한 것이다. 짐승 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새끼는 잡아먹지 않는다. 야만인일지라도 동족과는 싸우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주장이 참말이면 그것은 오히려 영국을 비난하는 것이 된다.
영국과 식민지가 결합함으로써 강대해진다는 것에 관해선 이제까지 과장되어 왔다. 결합하면 세계를 상대로 할 수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이 어떻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고, 또 이 말 자체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미국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또는 유럽 어느 곳이든 영국의 군비를 돕기 위해 주민이 수탈당하는 것은 결단코 보아 넘길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세계를 상대로 해서 도대체 어쩌려는가?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은 무역이다. 그리고 그것을 확실히 해내면 전 유럽에게 평화와 우호를 보장받을 것이다. 미국을 자유항으로 하는 것은 전 유럽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상식’을 벗어난 미국 사회의 냉대
미국은 마침내 독립전쟁에 승리하고 아메리카합중국이 건국되었다. 얼마 뒤 독립전쟁의 이념적, 정신적 기반을 제공한 페인은 영국으로 돌아가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혁명의 성찰》에 대항하여 프랑스혁명을 지지하는 《인간의 권리》를 발표했다.
페인은 영국 정부가 탄압하려 하자 프랑스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시민권을 부여받고 프랑스혁명에 참여하여 국민의회 의원에 피선되었다. 그리고 제정 의원으로 활약하였다. 루이 16세의 처형에 반대하다가 자코뱅당에 체포되어 투옥 되었다. 다행히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의 주선으로 풀려나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에 머물렀다.
미국인들은 독립전쟁의 영웅 페인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가 무신론자라는 이유 때문이다. 극심한 냉대와 증오가 따랐고 생활고에 어려움을 겪었다. 심한 음주는 건강을 해치게 되어 1809년 72세로 생을 접었다. 장례식 참석자는 흑인 2 명을 포함하여 6명에 불과했다. 교회에서 장지를 거부하여 주 정부의 도움으로 뉴로셀 농장에 묻혔다가 10년 뒤 영국의 언론인 코벳이 유해를 영국으로 옮겨갔으나, 언제인지 유골은 분실되고 말았다.
1776년 7월 4일 선포된 미국 독립선언문은 《상식》에 담긴 페인의 주장이 대부분 그대로 수용되었다. <뉴욕 시티즌> 은 페인의 사망 기사에서 ‘그는 약간의 선행과 많은 해악을 끼치면서 오래 살았다’고 썼다. ‘상식’을 벗어난 행위였다. 혁명가는 어디서나 당대에는 냉대를 받는 것 같다.
토머스 페인은……
18세기 미국의 작가, 사상가, 언론인, 혁명이론가로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미국의 초기 정치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미국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에서도 직접적인 활약을 보였다. 전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꾼 대사건에, 그것도 두 번이나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은 그가 인류 역사에 있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잉글랜드 노퍽의 코르셋 제조업자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13세 이후에는 학교 교육을 중단한 채 코르셋 장인, 교사, 담배업자, 말단직 세무공무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치와 사회의 모순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권유로 미국 으로 이주한 그는 1776년 1월 《상식Common Sense》을 출판하여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고, 1791년과 이듬 해에는 《인권Rights of Men》을 발표해 프랑스혁명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이후에도 《위기The Crisis》 《이성의 시대The Age of Reason》를 발표하며 급진적이고 자유로운 사상을 가졌던 그는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질시와 배척에 시달리다 1809년 빈곤과 고독 속에 파란 많은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