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의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길은 예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나는 중국 출장이나 여행 때면 루쉰기념관을 찾는다. 베이징과 상하이 그리고 그의 고향인 저장 성 사오싱에는 루쉰의 기념관이 있다. 세계적으로 문인의 기념관이 수도와 제1의 국제도시, 고향에 각각 세워진 사례는 흔치 않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몇 대학에 더 있을 것도 같다.
중국인들은 루쉰(魯迅, 1881~1936)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인민이나 지도층이나 다르지 않다. 청조를 타도하고 외세를 거부하면서 민국(중화)을 세우는 데 루쉰의 기여도는 적지 않았다. 그는 반청·반봉건·반제의 기치를 든 혁명적 문인이었다. 베이징에 머물 때는 한국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이회영, 류자명 등과도 교분이 있을 만큼 우리에게도 낯익다. 여대생 쉬광핑과의 열렬한 로맨스는 중년의 혁명가에게도 뜨거운 순정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반청·반봉건·반제 기치 든 혁명적 문인
루쉰은 21세 때인 1902년 의학을 공부하여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도쿄의 고붕 (弘文)학원에 다니면서 열심히 일본어를 공부한다. 꿈은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많은 중국 학생이 유학하여 청조를 타도하려는 단체가 조직되었다. 루쉰도 이들과 어울리면서 점차 사회·정치의식에 눈을 떴다.
루쉰은 개인의 병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사회·인민의 병을 고치는 일이 더욱 시급하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문학을 통해서 사회 혁명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총을 들고 하는 혁명보다 문학으로 중국 인민의 낡은 의식을, 노예근성을 바꾸기로 작정했다. 반청 조직인 광복회에 가입하여 동지들을 사귀는 한편 문학 수업에 낮밤을 잊었다.
청년 루쉰의 생애를 결정적으로 바꾸게 한 것은 일본 사회의 변화였다. 일본은 1894~1896년 청일전쟁으로 노대국 청나라를 굴복시키고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 파기, 랴오둥반도와 대만과 팽호 섬 할양, 배상금 2억 냥 지불, 통상의 이익 부여 등 많은 이권을 중국에서 갈취하였다. 작은 섬나라가 중국 대륙을 침략하여 청조를 패배시킬 만큼 막강한 국력을 갖고 있었다.
루쉰이 일본의 작은 도시 센다이에 있는 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1904~1905년) 일본은 다시 러시아를 침략했다. 동양 천지가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있는 정세를 일본 현지에서 지켜본 청년 루쉰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자칫하다가는 중국 대륙 전체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일본 체류 7년 만인 1909년 여름에 귀국한 루쉰은 항저우에 있는 절강양급사범학당에서 생물과 화학을 가르치며 일본인 교사의 통역을 담당한다. 부중학당의 교사직을 사임하고 고향에서 문학 수업에 열중하던 1911년 7월 신해혁명의 발화점이 된 무창(武昌) 봉기가 일어나자 사오싱 지역도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학생들의 요청으로 학교에 돌아온 루쉰은 학교 업무를 관장한다. 이후 루쉰은 교육부 총장인 채원배(蔡元培)의 요청으로 남경중화민국 임시정부의 교육부에 들어가 교육 개혁에 참여한다.
일본에서 청일전쟁 지켜보며 위기감 느껴
루쉰이 중국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은 1918년 4월 백화문(白話文)으로 단편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를 써서 진보개혁 잡지 〈신청년(新靑年)〉 제4권 5호에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때 루쉰이라는 필명이 처음으로 사용 되었다. 〈광인일기〉는 갖은 괴롭힘을 당하다가 정신병을 앓게 된 어느 환자의 일기체 형식을 취한다. 루쉰은 광인의 입을 통해 중국의 전제주의와 전통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루쉰의 대표작이라면 아무래도 《아큐정전(阿Q正傳)》을 꼽을 수 있다. 1921년 12월 〈신보부 관〉에 중편소설로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큐(阿Q)’라는 인물이다. ‘아(阿)’ 는 친근감을 주기 위해 사람의 성이나 이름 앞에 붙이는 접두어고, ‘큐(Q)’는 변발한 청나라 사람들의 머리 모양을 상징한다. 루쉰은 주인공 아큐를 통해 중국 인민의 무지와 몽매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주인공 아큐는 집도 없고 일정한 직업도 없어서 사람들에게 불려다니면서 잡일을 하며 먹고산다. 그래서 지역 토호, 깡패, 심지어 지방 치안대로부터 박해를 당한다. 외모도 볼품없고 글자도 모른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온갖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이상한 자존심을 갖고 있어서 사람들이 경멸하면 자신도 그들을 경멸한다. 심한 따돌림으로 마을을 떠난 아큐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자신이 혁명왕이라고 떠벌리고 다닌다. 하지만 곧 혁명은 시들해지고, 아큐는 마을 권력자의 집을 약탈하는 용의자로 체포된다.
글을 모른 아큐는 자신의 사형 선고장에 서명하기 위해 붓을 들었지만, 난생처음 잡아보는 붓이라서 자기 이름 밑에 동그라미를 그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형장에서 곧 목이 날아가는 순간인데도, 동그라미를 잘못 그린 데 대해 마음이 상했다. 루쉰은 이 소설에서 무지하고 비뚤어진 중국 국민성을 파헤치면서 신교육과 학문을 통한 인민의 깨우 침을 역설하였다.
소설보다 수필에서 더 빛나는 루쉰의 글
작고한 리영희 교수가 지적한 대로 루쉰은 어느 측면에서 보자면 소설보다 수필이 더 우수하고 중국 혁명에 끼친 영향도 훨씬 컸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번역된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에는 그의 대표적인 산문 몇 편이 실렸다. 리영희 교수는 특히 〈‘페어플레이’는 늦춰져야 한다〉를 꼽았다. 다음은 요지다.
‘남들이 건드리더라도 따지지 않는 것’은 너그러운 도(道)다. 물에 빠진 미친개를 두드려 패지 않고 도리어 그 개에게 물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착한 사람이 제 스스로 사서 고생하는 것이다.
남몰래 숨어 사람을 죽이는 귀신들을 자비롭게 대하다 보면, 귀신들이 자꾸만 늘어나 퍼지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가서는 현명한 젊은이들이 이러한 어둠의 세력이 꾸미는 계략에 맞서기 위해 더욱 많은 힘을 쓰고 더욱 많은 생명을 바쳐야만 한다.
나중에 밝은 빛의 세력이 어둠의 세력과 끝까지 싸우지 않고, 만약 사악한 세력이 제멋대로 날뛰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너그럽게 감싸는 것인 줄로 착각하여 마냥 덮어놓고 내버려두기만 한다면, 오늘날과 같은 혼돈의 상태는 영원토록 끝나지 않을 것이다.
개혁에 반대하는 자들이 개혁자들에게 휘두르는 매서운 손끝은 지금껏 느슨하게 풀어진 적이 없다. 그들이 사용하는 사납고도 무서운 수단을 이미 더 이상 덧보탤 것이 없을 정도로 끔찍해졌다. 개혁자들만이 꿈속에 잠겨 언제나 손해를 보아왔다. 이때문에 중국은 늘 개혁을 이루지 못했다. 앞으로는 이러한 태도와 방법을 바꾸어 그들을 매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루쉰의 수필은 폐부를 찌르는 글이다. 청조의 타락과 관리들의 부패, 지식인(언론인)들의 탈선과 침묵을 예리하게 비판한 것이다. 지인들이 〈신청년〉 발행을 준비하면서 원고를 청탁할 때 루쉰은 말한다.
“이런 상황을 그려보자구. 쇠로 된 집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창문 하나도 없이 꽉 막혀서 깨뜨려 부수기가 너무나 어려운 그런 집이 있다고 치세. 그런데 그 안에는 아주 깊은 잠에 빠진 사람이 많이 있네. 오래지 않아 이들은 모두 숨이 막혀 죽고 말걸 세. 하지만 잠들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죽는 거니까 곧 죽음에 닥쳐 느끼게 되는 슬픔 따위는 결코 느낄 수가 없다네. 지금 자네는 큰 소리를 쳐서 그래도 비교적 의식이 깨어 있는 몇몇 사람을 깨우려 하고 있네. 그런데 그렇게 깨우는 것은 말이야, 끝내는 구해낼 수 없는 이 불쌍한 몇몇 사람을 굳이 깨워 죽음이 닥쳐왔다는 고통을 겪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네. 자네는 상황이 이러함에도 그들에게 떳떳하다고 생각하나?”
“하지만 몇 사람이라도 깨어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이 쇠로 된 집을 깨뜨려 부술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냐?”
그렇다. 나는 비록 내 나름의 확실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희망을 말하는 것까지 뭉개버릴 수는 없었다. 희망은 미래에 속한 것이므로 그런 것은 절대 없다는 나의 증거를 가지고서 그런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그의 말을 꺾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나는 그에게 글을 써보겠노라고 응답하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맨 먼저 써본 〈광인일기〉였다.(〈철의 방에서의 외침〉)
생명의 길은 가시덤불 딛고 나아가는 길
‘한 사람의 유능한 작가는 또 하나의 정부와 비슷하다’는 말이 있다. 영국의 셰익스피어, 독일의 괴테, 러시아의 도스 토옙스키와 톨스토이, 프랑스의 로망 로랑, 이탈리아의 단테, 인도의 타고르…….
루쉰의 치열한 문필 활동까지 작용하여 청조는 멸망하고 신해혁명을 계기로 중국에는 5천 년 역사상 처음으로 민국이 수립되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은 장개석과 모택동으로 상징되는 국공합작이 결렬, 내전 등을 겪었다.
루쉰은 역사의 진보 법칙을 믿으면서 많은 글을 쓰고 연설을 하며 베이징대학, 베이징여자사범대학 등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다음은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에 나오는 〈생명의 길, 진보의 길〉이다.
인류의 멸망, 그것은 몹시 쓸쓸하고도 슬픈 일이다. 그러나 몇몇 인간의 멸망은 결코 쓸쓸하거나 슬픈 일이 아니다. 생명의 길은 진보의 길이다. 그것은 언제나 무한한 정신, 삼각형의 비탈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는 길이며, 그 어떤 힘도 그것을 저지하지 못한다.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부조화는 아직도 매우 많으며, 인간 스스로 위축되고 타락하여 퇴보하는 현상도 많다. 하지만 생명은 이때문에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그 어떤 암흑이 사상의 흐름을 가로막는다 해도, 그 어떤 비참함이 사회를 엄습한다 해도, 그 어떤 죄악이 인간의 도덕을 모독한다 해도, 완전을 갈망하는 인간의 잠재력은 이러한 가시덤불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생명은 죽음 앞에서도 미소를 짓고 춤을 추며, 명멸하는 인간들을 딛고 다시금 앞으로 나아간다.
길이란 무엇이던가? 없던 곳을 밟고 지나감으로써 생기는 것이 바로 길 아니던가! 가시덤불을 개척함이 아니던가! 길은 예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생명은 진보적이고 낙천적이다. 그러기에 인류는 결코 쓸쓸하지 않을진저.
루쉰(魯迅)은……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 1881~1936). 중국의 문학가 겸 사상가. 저장 성 사오싱에서 태어났다. 1902년 일본에 유학하여 고분학원을 거쳐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문학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의학을 단념, 국민성 개조를 위한 문학을 지향하였다. 1909년 귀국하여 고향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신정부의 교육부원이 되어 틈틈이 금석탁 본(金石拓本) 수집과 고서 연구에 심취하였고, 1918년 문학혁명을 계기로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하여 가족제도와 사회 구조의 폐해를 폭로하였다. 이어 〈공을기(孔乙己)〉 〈고향〉 〈축복〉 등의 단편과 산문시집 《야초(野草)》를 발표하여 중국 근대문학을 확립하였는데, 특히 그의 대표작 《아큐정전(阿Q正傳)》은 지금도 중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학생운동 사건에 연루되어 베이징을 탈출, 혁명문학을 주창하는 급진적인 활동으로 문학뿐만 아니라 폭넓은 사회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판화 운동도 주도하여 중국 신판화의 기틀을 다지기도 했다. 그의 문학과 사상에는 모든 허위를 거부하는 정신과 현실에 뿌리박은 강인한 사고가 뚜렷이 부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