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전봉준의 〈창의문〉
최초의 반봉건·반제 농민혁명
봄이 오면 그가 생각난다. 사형대에 올라서도 의연히 뜻을 지킨 대장부, “새야새야 파랑새야….” 한 마리의 파랑새, 암장된 역사의 무덤 헤치고 뚜벅뚜벅 걸어 나온 신세기 민중의 벗, 키는 작았으나 얼굴은 하얗고 눈빛 형형했던, 아! 그사람 녹두 전봉준.
동학농민혁명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일본처럼 낡은 봉건군주체제를 벗어던지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동학혁명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모르는, 왕조체 제의 지배구조에서 조금도 헤어나지 못했을지 모른다.
영국의 명예혁명, 독일의 종교개혁, 미국의 독립전쟁, 프랑스의 대혁명,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혁명, 중국의 5·4운동, 스페인내전, 인도의 사티아그라하운동 등 세계적 강대국들은 대부분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민중의 의식세례’를 받으면서 근대국가로 발전하였다. 일본은 근대적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은 유일한 강국이다. 그래서 국가주의, 전체주의의 위험성이 농후하다.
우리나라도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민중의 각성을 가져 오고, 이것을 뿌리로 하여 3·1운동, 독립전쟁, 4월 혁명,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 촛불시위로 계승되는 반봉 건·반제·반독재의 면면한 전통을 이어왔다. 동학혁명 이전의 모든 저항운동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저수지로 흘러들고, 이후의 모든 항쟁은 여기서 발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학혁명은 조선말기 최제우(1824~1864)가 당시 중국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고,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는 것을 보고 민족적 위기를 느끼게 되면서 태동한다. 그는 서학, 곧 천주교의 전래로 우리 전통사회가 붕괴되는 것을 보고, 이에 대항하는 민족고유의 새 종교운동이 필요함을 절감한다.
최제우는 구도행각에 나서 여러 곳을 순회하고 오랜 수도생활 끝에 기독교적인 영향과 유·불·선 동양 3교의 사상을 바탕으로 ‘인시천 人是天 ’의 교리를 완성, 동학을 창도 한다. 그는 불행하게 사도난정 邪道亂正 의 죄목으로 사형되 었으나 “백성이 곧 하늘이다”는 만민평등, 천지개벽의 혁명사상은 살아남았다. 그래서 한 줄기는 “사람을 한울처럼 섬긴다”는 최시형의 종교운동(천도교)으로 퍼지고, 다른 줄기는 전봉준의 ‘보국안민’, ‘척왜척양’의 혁명사상으로 전개되었다.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중을 중심으로 하는 동학혁명 지도자들에게는 다산 정약용의 실사구시 實事求是의 실학사상 특히 행동을 요하는 『경세유표』가 전해지고, 이것이 농민혁명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였다.
한국사에서 최초로 비조직적인 수십 만 명의 농민을 동원하는데 성공한 전봉준(1854~1895)은 젊은 시절부터 사회개혁의 뜻을 품고 활동하다가, 30세가 될 무렵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접주가 되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이 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조선8도의 실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만큼 조선왕조는 부패타락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전봉준은 국가정치와 사회제도의 전면개혁을 단행하여 보국안민의 동학사상을 펼칠 뜻을 굳히고, 척왜척양·부 패계급 타파 등 4대 강령을 내걸고 마침내 고부의 백산에서 궐기했다. 전봉준은 동학 접장 출신이지만 대단한 학식과 전략을 갖춘 혁명가다. 그의 격문은 의분이 넘치고 피가 끓게 하였다.
우리가 의義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의 본의가 단연 다른 데있는 것 아니고,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자는 데 있다. 안으로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는 데 있다. 양반과 부호 밑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민중들과 방백, 수령 밑에서 굴욕을 당하고 있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나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갑오년 정월
호남 창의 대장소
재 백 산在白山
전봉준은 봉기를 앞두고 각지의 동학접주와 동지들을 모으고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면서 ‘사발통문’을 이용하 였다. 사발통문은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호소문이나 격문을 쓰고 나서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게 사발모양으로 둥글게 돌려가며 적은 통문 通文 을 말한다. 전봉준과 주모자들은 커다란 사발 밑바닥에 봉기의 대의를 적고 참여자들이 서명하여 비밀리에 회람시켰다. 1968년 12월 정읍군 고부면 송준섭의 집에서 발굴된 사발통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사.
2. 군기고와 화약고를 점령할 사.
3. 군수에게 아부하여 인민을 갈취한 탐리를 쳐 징계할 사.
4. 전주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올라갈 사.
백성이 쇠잔하면 나라 망해
전봉준은 손화중·김개남과 함께 갑오년(1894) 4월〈창의문 倡義文 〉을 발표하고 동학혁명 진군의 나팔을 울렸다.
한국사의 근대를 여는 계명성이고 동아시아의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뇌성이었다.
공경 이하 방백 수령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함을 생각지 않고 부질없이 일신의 비대와 가문의 윤택만을 꾀하고 과거 의문을 돈벌이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응시의 장소는 교역의 시장으로 변하였도다. 허다한 돈과 뇌물은 국가로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개인의 사복만 채우고 있도다. 국가에는 누적된 빚이 있으나 갚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교만과 사치와 음란한 일만을 거리낌없이 일삼으니 팔로八路가 어육이 되고 만인은 도탄에 허덕이도다. 관리들이 탐학하니 어찌 백성들이 곤궁하지 않으리오.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라, 근본이 쇠잔하면 나라가 망하도다.
보국안민의 방책을 생각하지 않고 밖으로 향제를 설치하여 오로지 제 몸만을 위하고 부질없이 국록만을 도적질하는 것이 그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는가.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일지라도 국토에 몸 붙여 사는 자라, 국가의 위망을 좌시할 수가 없다. 팔로가 동심하고 수많은 인민이 뜻을 모아 이제 여기에 의기義旗를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의 명세를 하노라.
금일의 광경은 비록 놀랄만한 일이기는 하나 경동하지 말고 각자 그 업에 안착하여 다 함께 태평세월을 빌고 함께 임금의 덕화를 입게 된다면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노라.
동학군은 황토현 전투의 승리와 호남의 심장부 전주성을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로 북진을 계속해나갔다.
정부가 청군을 끌어들이고 일본이 천진조약을 내세워 출병하면서, 정부의 요청으로 ‘전주화약’이 성립되고, 동학군은 우금치에서 관군, 일본군과의 대결에서 대패한 데 이어 태인전투를 끝으로 분쇄되었다. 전봉준은 상금을 탐낸 농민의 밀고로 잡혀 서울로 압송되고, 1895년 3월에 처형 되었다. 41세의 젊은 나이로 ‘척왜’의 대상으로부터 ‘척살’ 되고 말았다.
‘키 작고 눈빛 형형한’ 아, 그 사람
‘백성’ 이라고 하기에는 근대의식이 깨어있고 ‘민중’이라 하기에는 전근대의식에 젖어있는, 그래서 ‘군집’이라 불러야 할 수십 만 무리를 이끌고 봉기한 인물.
오랜 세월 길고도 질긴 압제의 전통을 깨부수고 분연히 일어선 비범한 범인, 동양 3국에 태풍의 눈이 된 작은 거인. 어느 시인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려다가 거기에 깔리고 그 핏자국 으로 새 길을 낸 위인으로 말하기도 한다.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아픔을 자신의 상처로 보듬으면서 죽어간 순교자, 나라가 위급한 상태임을 보고 목숨을 바친 ‘견위수명 見危授命 ’의 호국인,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한 ‘십생취의拾 生取義 ’의 의인.
지배자들이 동비 東匪 ·토비 土匪 ·비적·역도·반역자라 부르고, 자신들은 동도 東徒 또는 의병이라 부른 무리의 수괴, 몇 세기를 앞서가다가 목이 베인 허균이 가름한 항민 恒民 ·원민 怨民 ·호민 豪民 을 차례로 일깨운 호걸, 아비는 장살당하고 젊은 부인은 병사한 비운의 사나이, 태어난 곳도 자라난 곳도 엇갈리는 불우한 소년.
아비의 훈도를 받고 마을서당 훈장으로 스스로 깨친 학인, 먼 나라의 체 게바라와 가까운 나라의 루쉰이 의학을 공부하여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혁명의 길에 나선 것에 훨씬 앞서 약을 팔아 토민들의 병을 고치다가 혁명가가 된 민중해방의 선구자.
거침없이 암소의 배를 갈라 송아지를 꺼내먹는 관리들의 횡포를 용납할 수 없었던 진짜배기 농군, 동학교도와 농민들의 추대를 받고 ‘광제창생’의 깃발을 든 저항인.
탐학한 고부군수 조병갑의 죄상 밝히고 ‘제폭구민’의 횃불을 든 혁명가, 사발통문 통해 기의 起義 를 알리고 동지 모은 전략가.
‘21개조 기율’을 공포하고 창고문을 열어 빈민에게 곡식 나눠준 구세인, 황토현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계급장 없는 장군, 호남의 심장부 전주성을 접수한 맹장, ‘척왜척양’의 깃발을 든 순결한 민족주의자.
청군에 이어 왜군의 침입에 “동족상쟁은 안 된다” 선포 하고 전주성에서 철수한 호국인,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한 농민자치의 민주지도자, 일본군 무라타 소총에 죽창으로 맞선 다윗, 시산혈해 우금치전투에서 피흘린 패전 지장, 가롯 유다의 탈을 쓴 농민의 배신으로 붙잡힌 조선의 예수. 일본군의 구명 유혹을 뿌리친 충혼지사, 사형대에 올라서도 의연히 뜻을 지킨 대장부, “새야새야 파랑새 야….” 한 마리의 파랑새, 암장된 역사의 무덤 헤치고 뚜벅 뚜벅 걸어 나온 신세기 민중의 벗, 키는 작았으나 얼굴은 하얗고 눈빛 형형했던, 아! 그 사람 녹두 전봉준.
전봉준은…
조선 후기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로서 본관은 천안이며, 초명은 명숙明叔이다.
별명은 녹두장군으로 전라도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에서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 다. 1890년(고종 27)경인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 그 뒤 얼마 안 되어 동학의 제2 세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되었다. 동학에 입교하게 된동기는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동학은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로, 충효를 근본 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하여서였다고 한다. 동학을 사회 개혁의 지도 원리로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 나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