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개봉하여 대단한 흥행성적을 거두었던 영화 <레미제라블>를 보고난 뒤, 프랑스시민혁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왕정이 붕괴되어 시민사회가 권력을 쥐게 되고, 계급이 혁파되었으며, 자본주의가 태동하는데 근간이 되는 산업구조로 재편되는 등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꿔놓은 프랑스혁명은 그러나 단번에 완성되지는 않았다. 그중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은 많이 알아도 1871년 3월 18일부터 72일간 파리에서 진행된 파리코뮌(Commune de Paris)은 덜 알려진 편이다. 이는 수만 명의 희생자를 낸, 19세기 최대의 시민봉기였다. 흔히 미완의 혁명, 익명의 혁명으로 불리는 파리코뮌은 자치, 자유, 평화, 평등, 공동체의 혁명으로 평가된다.
프랑스 파리코뮌 시기의 선언문과 논설
미완의 혁명 ‘파리코뮌’
파리코뮌은 1871년 3월 28일부터 5월 28일 사이에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서 수립된 혁명적 자치 정부를 말한다. 프랑스대혁명의 세례를 받은 파리 시민들은 자유와 평등의식에 충만했지만 거듭된 정변과 쿠데타는 마침내 나폴레옹 3세가 황제가 되는, 제정이 수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내우외한이 겹쳐 1870년 7월 프로이 센의 공격을 받고, 9월에는 나폴레옹 3세가 적군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파리 시민들이 봉기한 건 이즈음이다.
이런 사이에도 프로이센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파리를 공격하고, 국방정부의 총사령관 바젠 장군이 항복하 였다. 7월혁명의 주역이었던 티에르 장군이 주도하는 국방정부는 파리 시민들의 안위나 지방 곳곳에서 전개된 저
항운동은 무시한 채 자기들만 살기 위해 프로이센군과 굴욕적인 화평조약을 서둘렀다. 이에 대한 파리 시민들의 반발 분위기가 고조되자 두려움을 느낀 국방정부는 부랴부랴 본거지를 베르사유로 옮겼다. 시민들은 정부의 잇따른 배신행위에 궐기하여 자치정부를 세웠다. ‘파리코뮌’이 성립된 지 10일 후에 코뮌파 신문 <악숑>은 자치정부 수립의 의의를 이렇게 썼다.
그것은 자연발생적이기는 했으나 예상 밖의 운동은 아니었 다. 단지 공리 공론가들이나 휴지에 지나지 않는 신문 따위가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이 운동의 강력한 출현은 여러 가지 우발적인 원인에 기인하고 있다. 시민의 무장, 그들의 집결, 6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포위당한 채 동고동 락해 온 공동체, 통치자들의 무능력, 아직까지도 영웅적인 행위에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던 민중에 대한 모멸과 불신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세기의 태내에서 생겨난 것으로, 예를 들면 나폴레옹 3세가 통치했던 제2 제정이 존속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일어났을 것이다.
파리 시민들은 정부가 도망치고, 적군에 포위된 상황에 서도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지도부를 조직하고 의회를 구성하고 민병대를 편성하여 적군과 싸웠다. 일찍이 세계역 사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파리 시민 대표들은 2월 29일 코뮌의 목표와 원칙을 선포했다.
파리 시민들은 3월 26일 국민방위대의 중앙위원 선거를 실시하여 이틀 뒤 ‘파리코뮌’을 구성하였다. 이 용어는 새로운 시민정부를 일컬었다. 파리코뮌에는 자코 뱅파, 블랑카파, 아나키스트, 사회주의 계열 등다양한 그룹이 참여하게 되었다. 파리코뮌은 중앙집권적인 조직이 아니라 프랑스의 모든 코뮌 들이 참여한 연방임을 선언하고 대단히 중요한 정책들을 발표했다.
내용 중에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 상비군 폐지, 의무교육 실시, 야간노동 금지, 당사자의 합의에 의한 결혼, 사생아 인정, 재판의 무료화, 집세의 지불유예, 전당포에 보관되어 있는 물품을 주인에게 돌려주기, 주인이 포기한 작업장의 코뮌화 등이 포함되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소극으로
파리코뮌은 92년 전의 프랑스대혁명 때보다 더 발전되고 진보적인 정책과 시책이 많았다.
당시 파리 인구는 200만 명 가량이었다. 1800년 약 60만 명의 인구가 1세기 만에 3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급격한 인구 팽창은 수도의 치안, 위생, 식량공급 등을 악화시키고 실업자를 증가시켰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은 큰아 버지의 후광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1848년 사회적 격동기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던 중 1859년 12월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이듬해 말에는 황제가 되었 다. 이를 지켜 본 칼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루이 보나파르 트의 브루메르 18일>을 쓰면서 저 유명한 “첫 번째는 비극 으로, 두 번째는 소극으로” 라는 명구를 남겼다. 이어서 예언적인 마지막 말로써 논문을 마무리했다.
‘마침내 황제의 망토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어깨에 걸쳐 지는 순간, 나폴레옹의 동상이 방돔의 원기둥 꼭대기에서 굴러 떨어지게 될 것이다.’ 예언대로였다. 1871년 5월 16일 코뮌 정부는 파리 시내 방돔광장의 원기둥을 파괴함으로써 루이 나폴레옹의 권력은 몰락하였다. 파리코뮌이 선포되던 날 2만 명의 국민 위병과 일반시민이 시청앞 광장에 모여 대대적인 축하 행사를 벌였다. 시민들은 “공화국 만세”, “코뮌 만세”를 외치고, 코뮌계열의 신문 <민중의 외침>은 ‘축제’란 제목 아래 이렇게 썼다.
코뮌이 선언되는 날, 그것은 혁명적이고 애국적인 축제의 날, 평화롭고 상쾌한 축제의 날, 도취와 장엄함 그리고 위대함과 환희에 넘치는 축제의 날이다. 그것은 1792년, 사람들이 서로를 기쁨에 넘쳐 바라보던 나날에 필적하는 축제의 하루이 며, 제정 20년과 패전과 배반의 여섯 달을 위로해 준다. 코뮌이 선언되었다. 오늘이야말로 사상과 혁명이 결혼하는 축전 이다. 시민군 여러분, 내일은 어젯밤 환호로 맞아들여 결혼한 코뮌이 아기를 낳도록. 항상 자랑스럽게 자유를 지키면서 공장과 가게의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 승리의 시詩는 끝나고, 노동의 산문散文이 시작된다.
파리코뮌은 1789년의 혁명에서 이루지 못한 목표와 가치를 구현하고자 개혁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다. 시내의 치안질서는 자율적으로 이루어지고, 마을의 작은 그룹에 서도 자율적 코뮌 활동이 전개되었다. 파리코뮌의 소식은 인근 도시는 물론 멀리 지방으로까지 전파되고 프랑스 국민 전체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와는 달리 주변 유럽의 국가들은 혁명의 불길이 옮겨 붙을까 전전긍긍하였다.
잔인한 학살, 진보 코뮌정신 남겨
파리코뮌에서는 시민의 참여와 직접 민주주의 형태로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아테네 민주주의’ 이래 최초의 직접 민주주의가 실시되었다. 시민들은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되었다.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의회가 입법권과 함께 각 분야의 행정기관 일까지 맡다보니 업무가 과다해지고 의원들과 혁명적 열기에 넘치는 시민들과의 사이에 알력이 생겼다.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하여 공안위원회를 설치했으나 여기서 다수파와 소수파로 분열되었다. 적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베르사유를 거점으로 파리코뮌의 섬멸작 전을 준비해온 티에르 장군은 정부군 외에도 지방에서 징집한 6만 명과, 프로이센에 포로가 된 프랑스군 40만 명을 귀환시켜 파리탈환작전을 개시했다. 오합지졸의 시민군과 정부군의 대결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여기에 파리코뮌은 정부군의 총공세 앞에 지휘부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토론과 논쟁으로 날밤을 세웠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군사위원회 지휘관 로셀은 다음과 같은 사임서를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다.
코뮌 의원 동지들, 모두들 토론은 하나 아무도 따르지 않는 지휘의 책임을 나는 계속하여 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코뮌은 토론은 하나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다. 중앙위원회는 토론은 하나 행동할 능력이 없다. 이렇게 지체하고 있는 사이에 적은 무모하고 맹렬한 공격으로 요새를 포위하고 있다. 나는 물러간다. 나에게 마지스 감옥에 수감될 영광을 다오.
파리를 장악한 정부군은 잔인하게 파리코뮌을 학살했 다. 시민군 중에 용감한 사람들이 맨 손으로 대항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5월 28일까지 8일 동안 파리는 피바다, 불바다, 살육의 현장이 되었다. 뒷날 사가들은 이 시기를 ‘피의 주간’ 이라 불렀다.
3만 명이 현장에서 학살당하고 즉결재판에서 2만 명 이상이 처형되었으며, 4년여 동안 계속된 재판에서 3만6천여 명에게 징역형 등이 선고되었다.
파리코뮌은 인류의 진보와 저항, 자치와 평등사상에 큰발자취를 남긴 짧은 기간의 실험으로 끝났지만, 반동세력 에게 무참하게 짓밟혔다. 프랑스의 보수집단은 오로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프로이센에 항복하고, 이에 저항하며 자치정부를 수립한 시민들에게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루이 나폴레옹이 반시대적인 황제에 등극하고, 이를 유지하고자 프랑스의 공화정을 무너뜨렸다. 노동자들은 착취의 대상이 되고, 국부는 소수의 기득권자들의 손에 쥐어졌다. 시민들이 일어서고, 자치ㆍ자율ㆍ평등의 코뮌을 세웠지만, 졸속이었고 논쟁으로 날밤을 지새우다 72일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파리코뮌은 현실적으로는 주체세력도 주역도 없는 익명의 혁명이었지만, 유럽의 지배자들에게 국제혁명운동이 가져다 줄 공포감과 사회혁명의 절박감을 실감시켜 주었다. 파리코뮌 선언 다음날 페릭스 피아가 <코뮌>지에 쓴글에서 ‘파리코뮌’의 역사적 의미를 살피게 한다.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전례 없는 혁명을 이룩하였다. 3월 18일의 여러분의 혁명은 다른 모든 혁명과 구분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 독자적인 위대함은 극히 민중적이고, 극히 집단 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익명으로 만장일치를 통해 이루어진 관리인이 없는 최초의 혁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