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5·4운동의 횃불이 된 잡지 <신청년>
반봉건·반제 혁명으로 중국 정치·사회의 개혁을 꿈꾸다
중국 베이징에서 1919년 5월 4일 일어난 5·4운동은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여 궐기한 학생운동이지만, 이를 계기로 하여 전국적으로 전개된 반봉건·반제국주의 투쟁이었다. 또 신문학운동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직접적인 원인은 프랑스 베르사유회의에서 중국이 열강에 국토의 일부가 할양하는 등 국치를 겪으면서부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제는 중국을 침략하면서 독일로부터 산둥 지역의 이권을 빼앗고,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를 압박하여 ‘21 개 조약’을 받아냈다. 이 밀약이 알려지면서 인민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으나 중국 정부는 일본에 무력항쟁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청일전쟁 에서 패한 이래 계속 일본에 밀리고 있었다. 오로지 국제 여론이 일제의 부당한 요구를 해결 해주기를 기대했으나 1919년 1월 개최된 베르 사유회의는 오히려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천두슈와 후스가 주도한 문학 혁명
이 소식을 접한 중국인들은 분노에 떨면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학생들이 속속 귀국하여 상하이를 중심으로 산발적인 시위에 이어 마침내 5월 4일 베이징의 각 대학생 3,000여 명이 시위에 나섰다. 시위 대는 ‘21개 조약’의 조인 책임자인 조여림(曺汝霖)의 집을 습격하고, 주일 공사 장종상(章宗祥)을 구타, 공관을 방화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과 경찰의 충돌이 벌어지고 학생 수십 명이 체포되었다. 베이징의 학생들은 이에 항의 하여 동맹휴학으로 맞섰고 감옥은 학생들로 만원이 되었지만,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이리하여 베이징의 학생 시위는 전국의 주요 도시로 번지고, 시민·노동자·상인들까지 참가하는 전국적인 반봉건·반제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중국 정부가 시위대의 요구를 몇 가지 받아들이면서 5·4운동은 신문학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중국의 5·4운동에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한국의 3·1운동, 러시아의 1917년 10월혁명 등 여러 가지 외적 영향력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학생·지식인들을 분기케 하는 데는 <신청년(新靑年)>이라는 잡지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신청년>을 빼놓고 5·4운동을 설명하기란 한국에서 4·19혁명을 논하면서 <사상계>를 제외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천두슈(陳獨秀)가 상하이에서 <청년잡지(靑年雜誌)>를 발간한 것은 1915년 9월 15일이다. 상하이를 발행 장소로 택한 것은 조계지여서 상대 적으로 정부의 간섭을 덜 받기 때문이었다. 1916년에 펴낸 제2권부터는 제호를 <신청년>으로 바꾸었다. 이어서 천두슈가 1917년 베이징대학 문과대학장으로 초빙되면서 발행 장소가 베이징이 되고, 이 대학의 저명 교수를 비롯하여 진보적 신문학운동의 기수들이 속속 참여하게 되었다.
제3권부터는 후스(胡適)와 저우쭤런(周作人-루쉰의 동생), 리다자오 (李大釗), 첸쉬안퉁(錢玄同) 등이 글을 쓰고 ‘신청년 사단’이 형성되면서이 잡지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고, 지식인·학생들의 필독서로 인기를 모았다. 이들 외에 다수 진보 성향의 문인이 편집과 필자로 참여하여 ‘신문학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청년잡지>로 시작해 <신청년>으로 명성
천두슈는 <청년잡지> 창간사 〈청년에게 삼가 고함〉에서 이렇게 쓴다.
청년은 초봄과 같고 아침 해와 같고 온갖 풀이 싹트는 것과 같고 예리한 칼날이 막 숯들에서 갈려나온 것과 같아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기이 다. 사회에서 청년은 인간의 몸에 있는 신선하고 활발한 세포와도 같다.
신진대사는 언제 어디서고 도사리는 진부하고 부패한 것들을 자연 도태 시키는 경로이자 신선하고 활발한 것에 공간의 위치와 시간의 생명을 부여한 것이다. 인간의 몸은 신진대사의 도를 따른다면 건강하지만, 진부 하고 부패한 것이 인간의 몸 세포에 가득 찬다면 죽을 것이다. 사회가 신진대사의 도를 따른다면 융성할 것이나 진부하고 부패한 분자들이 가득 하다면 망할 것이다.
천두슈는 잡지를 발행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창간호에 실었다.
첫째, 국력이 기울고 도(道)와 학문이 쇠미하였으니 이후의 책임은 청년에게 있다. 본 잡지는 청년들과 장래의 수신치국(修身治國)의 도를 논하고자 한다. 둘째, 향후 모든 거동과 조치는 세계와 관계가 있다. 우리나라 청년은 비록 칩거하여 연구에 골몰할 때이지만 눈을 들어 세계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본지는 각국의 사정과 학술 사조를 전심전력으로 주입하여 타산지석으로 삼고자 한다. 셋째, 본지는 평이한 문장으로 심오한 이치를 논할 것이다. 무릇 학술과 현황들이 청년의 흥취를 충분히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최대한 기술하여 청년 제군들이 과학 연구 이외의 시간에 정신적 도움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신청년>은 호를 거듭할수록 내용이 알차고 참여 지식인도 많아졌다. 창간 당시 천두슈의 단독 주편(주간)에서 집단 공동 편집위원 체제로 바뀌었다. 제6권부터는 천두슈를 비롯하여 첸쉬안퉁, 가오이한, 리다자오 등 6인의 편집위원이 각기 능력과 지혜를 모았다. 따라서 잡지의 질이 그만큼 향상되었다.
신문학 이론의 모태가 되기도
<신청년>은 정치 개혁이나 진보 사상만을 소개한 것이 아니었다. 많은 지면을 신문학운동에 바쳤다. 미국 유학 중에 천두슈에 의해 불려 나온 후스는 제5호에 실린 〈문학 혁명론〉에서 신문학 이론으로 여덟 가지를 제안했다.
이제까지의 형식에 얽매인 구문학의 폐단을 버리고 언어 형식과 글쓰기의 쇄신을 주장한 것이다. 그 여덟 가지를 살펴보면 반드시 말에 내용이 있을 것, 옛사람을 모방하지 말 것, 문법을 중시할 것, 병도 없이 신음하지 말 것, 진부한 상투어를 버릴 것, 전고(典故)를 쓰지 말 것, 대구를 따지지 말 것, 속어와 속자를 기피하지 말 것 등이다.
<신청년>이 지향하는 목표는 반봉건·반제 혁명으로 중국의 정치·사회의 개혁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와 함께 신문학을 통한 의식 개혁과 문학 혁명이었다. 천두슈는 <신청년> 제3권 제3호에 실린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소견을 밝혔다.
문학 개량의 소리가 이미 국내에서 일어나 찬성과 반대가 각각 절반을 차지한다. 제 생각에 이의의 수용과 자유로운 토론이 물론 학술 발전의 원칙이지만, 중국 문학 개량에 대해서만큼은 백화(白話)가 문학의 정종(正 宗)임이 분명하므로 반대를 용납해서는 안 되고 토론의 여지를 주어서도 안 된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절대 적으로 옳으며 다른 비판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국 문화가 만약 언문일치의 경지에 이르면 국어를 문장으로 써서 의사를 전달하고 경물을 묘사하는 것이 어찌 불변의 진리가 아니겠는가? 여기에 무슨 이의가 있고 토론을 해야 한단 말인가?
중국의 저항 문인 저우수런이 1918년 루쉰이라는 필명으로 중국 최초의 근대적 단편소설인 <광인일기>를 5월 호에 발표하면서 적극적으로 혁명 대열에 나섰다. 이 소설은 루쉰과 <신청년>의 명성을 크게 올렸다. <신청년>은또 그해 4월부터 ‘수감록’이라는 칼럼을 신설해서 루쉰을 비롯해 진보적 지식인들의 사회와 시사에 대한 단평을 실었다. 다음은 루쉰이 쓴 4월호의 〈문득 떠오른 생각들〉의 한 부분이다.
폭군의 전제는 사람들을 냉소꾼으로 만들고 ‘어리석은 자’(차라리 강시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의 전제는 사람 들을 죽은 시체로 만든다. 사람들은 점점 죽어가고 있는데, 스스로는 오히려 올바른 도를 행하여 그 효과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만일 세상에 아직도 참된 삶에의 의지를 가진 자가 있다면, 감히 말하고 감히 웃어젖히며 감히 울음을 터뜨리고 감히 분노하며 감히 욕을 해대고 감히 때려 부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이 저주스러운 곳에서 이 저주스러운 시대를 격퇴시킬 수 있으리라.
<신청년>의 파급효과는 날로 높아갔다. 큰 도시뿐만 아니라 지방의 대학에서도 학생·교수들이 읽고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마침내 1919년 5월 4일 베이징대학 등 13개 대학생 3,000여 명이 사방에서 천안문광장으로 모여들었다. 학생들의 손에는 <신청년>과 각종 구호 깃발이 들려 있었다.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외쳤다. “21 개 조를 철폐하라!” “칭다오를 반환하라!” “주권을 지키자!” “비굴하게 사느니 죽음을 택하자!” “매국노를 국민의 힘으로 처벌하자!”
진보 지식인 사회의 중심이 되다
손문이 주도한 1911년의 신해혁명이 청조를 타도한 반왕조 혁명이었다면, 5·4운동은 반봉건·반제 국주의에 그 뿌리를 둔 운동이었다. 이와 더불어 신문학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지만, 곧 노동자·상인들이 대거 참여하는 민중운동으로 확대되고, 이러한 저항운동의 결과 6월 22일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중국 대표는 강화조약의 조인을 강력히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로도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이 1년간더 꾸준하게 계속되어 일본의 대 중국 수출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고, 또 일본인과의 충돌사건이나 군벌의 탄압에 대한 항쟁 등을 비롯한 반제·반군벌 투쟁이 전국의 여러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중국의 5·4운동이 온전히 <신청년>의 영향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라고만 단정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1917~1919년에 걸쳐 전개된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 아래 마르크스주의적 영향을 받은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 기도 했던 점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에 따른 <신조(新潮)> <매적평론(每適評論)> <성기평론(星期 評論)> <상강평론(湘江評論)>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창간되어 중국의 개화와 국제 정세 분석, 군벌 타도, 반봉 건·반제의 각종 논설을 실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창간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들이 참여하여 전국적인 판매 조직을 갖췄던 <신청년>의 비중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따라서 중국 5·4운동과 신문학운동의 기수는 단연 <신청년>이라 해도 결코 지나친 주장만은 아닐 것이다.
<신청년> 창간을 주도한 천두슈(陳獨秀)는……
중국의 사상가이자 혁명가이며 정치가. 안후이 성 화이닝 출생. 일본과 프랑스에 유학하고, 1917년에는 베이징대학 문과대학장으로 후스(胡適)와 함께 백화문 (白話文)을 제창하기도 했다. 1921년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회를 개최, 중앙서기에 피선되었다. 이듬해 제2 차 전국대회에서 중국국민당과의 연합전선 수립과 코민테른 가입 등을 결의하고, 당 기관지 <향도주보(嚮導 週報)>도 발간했다. 1927년 국공합작이 깨지자 코민테 른은 합작 실패의 책임을 물어 그를 총서기직에서 축출하였다. 1929년 당적을 박탈당하자 <전당 동지에게 고하는 글(告全黨同志書)>을 발표, 코민테른의 중국 혁명 지도상에서의 오류와 당시 당 중앙의 오류를 규탄하여 트로츠키파(派)로 지탄받았다. 당 조직을 획책 했다는 이유로 체포·구금되었다가 출옥한 후 만년에는 사상적인 전환을 가져와 영·미식 민주주의를 찬성 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