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일 다 부질없으므로
무량무위를 말하는 것은 아닌지
감악산 정수리에 서 있는 글자가 없는 비석 하나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너무 크고 많은 생 담고 있는 나머지
점 하나 획 한 줄도 새길 수 없었던 것은 아닌지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씀을 지녀
입 다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도 아니라면 세상일 다 부질없으므로
무량무위를 말하는 것은 아닌지
저리 덤덤하게 태연할 수 있다는 것을
저렇게 밋밋하게 그냥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도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_ 이성부 〈백비〉
<백비>를 찾아서
한 해가 저물고 또 새해 새 아침이 왔다. 2016년의 시작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지나고 2017년을 맞았다.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 이성부 시인의 생애 마지막 시집 《도둑 산길》(2010년 책만드는집 발행)을 잡았다. 시집 본문의 첫 장을 넘기자 시 〈백비〉가 눈길을 멈추게 했다.
감악산 정수리에 서 있는 글자 없는 비석 하나 /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 너무 크고 많은 생 담고 있는 나머지 / 점 하나 획 한 줄도 새길 수 없었던 것은 아닌지……
이렇게 시작한 11행짜리 〈백비〉는 가슴을 철렁 내려놓게 만든다. 나는 지난해, 아니 지난 세월 동안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되돌아본다.
〈백비〉를 만나러 감악산 정수리로 향했다. 이성부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몇 해가 되어간다. 그가 2012년 2월 28일 세상과 이별했으니…….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덧없는 시간이 흐른 것이다. 한 해가 마감됐고 새로운 해의 시작 점에서 한 시인의 떠남을 추억하니 숙연한 마음이 쓸쓸하다.
허허롭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을 터.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듯이……. 그것을 불변의 진리라 했던가.
이성부 시인의 《도둑 산길》은 그의 아홉 번째 시집인데, 그 이전 시집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2005년 창비 발행) 를 내놓은 지 5년 후였다. 그 5년 동안 ‘놀라운 손님 한 분이 찾아와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2005년 7월 간암 선고를 받은 것이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발간이 2005년 2월이 었으니 몇 개월 후의 일이었다.
이성부 시인은 간암 선고를 받고 간동맥색전술이라는 치료를 몇 차례 받으며 산행을 계속했고, 5년 동안의 창작 결과 물로 《도둑 산길》을 상재했다. 간암과 투병하면서 산에 오르고 시를 쓴 이성부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산이라는 것이 다니면 다닐수록 새로운 것처럼, 내가 쓰는 산시(山詩)도 언제나 그 새로움을 기록하기 위해 천착 한다. 산에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더 모르는 것이 많아지는 경지가 또한 산이다. 시를 오래 쓸수록 시가 과연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세계와 비슷하다. (……) 그래서 나는 산행을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독서는 산을 즐기는 것과 같다)이라고 말한 퇴계 이황의 글에 동의한다. 미지의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얻는 즐거움과 신선한 재미의 세계가 산행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성부 시인의 산 사랑, 시 사랑은 감악산 정상에 아무런 글자 하나 없이 밋밋하게 서 있는 비석을 보고 쓴 시 〈백비〉 를 통해 나의 가슴과 뒤통수를 후려친 것만 같다.
감악산으로 들다
내가 아는 감악산(紺岳山)은 충북 제천시 봉양읍과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을 경계한 감악산(886m)과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양주시 남면, 연천군 전곡읍에 걸쳐 있는 감악산 (675m) 두 곳이다. 한자 표기는 두 산 모두 같다.
내가 가려 하는 〈백비〉가 서 있는 감악산은 경기도의 산이다.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함께 쏟아져 나온다 하여 감악산(紺岳山)이라 했겠다. 즉 감색 바위산이다. 산 이름에 악(岳)이 끼어 있으면 험한 산이라는 의미인데 성깔깨나 있겠다 싶어 은근 걱정이 앞선다.
그러면 그렇지, 감악산은 경기도의 5악(五岳)에 속한다.
가평의 화악산, 개성의 송악산, 안양의 관악산, 포천의 운악 산과 함께. 기록에 의하면 산세가 험하고 폭포, 계곡, 암벽 등이 발달하여 파주시에서 가장 높은 맏형격의 산이다. 파주 시에서 가장 높은 산(?)이란 말에 자신감이 조금 붙는다. 파주 근처에 높은 산이 없지 않은가.
감악산을 오르기 위해 서울에서 가는 코스는 다양하다.
의정부에서 버스를 이용하거나 불광동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파주시 적성면으로 진입해 의정부행 버스나 택시를 이용해 법륜사 입구에 도착, 산행을 시작한다. 나도 이런저런 궁리 끝에 춥고 눈 내리는 뒤끝이라 승용차로 자유로를 택하기로 했다(참고:필자의 출발지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이었음).
이른 아침이라 자유로는 비교적 한산했다. 비어 있는 자유로를 여유 있게 달리는데 파주출판도시를 지날 무렵 복병을 만났다. 교하 근처에 당도하니 시야를 덮치는 안개 군단이 달리는 차의 속도를 급격히 저하시켰다. 통일전망대를 지나 적성면에 도착할 때까지 안개는 몰려왔다가 사라지기를 몇 차례 거듭했다. 화석정을 지날 때는 길옆 나뭇가지에 핀 하얀 서리꽃이 환상이었다. 어떤 연인은 승용차를 갓길에 세워놓고 생애 최초의 풍광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걱정이 앞섰다. 안개가 걷히지 않으면 사진을 찍어도 허당이다. 안개 속의 산행이란 듣기엔 낭만 만점 이겠지만 막상 닥치면 대처 불능이다. 언젠가 백두대간 종주 때 대관령을 지나 선자령으로 향할 때였다. 안개의 집중 포위를 당해 드넓은 초지(草地)에서 일행을 잃고 얼마를 헤맸는지 모른다.
감악산 초입, 법륜사휴게소 앞이다. 부지런한 등산객들이 길 양옆에 승용차를 주차해놓고 벌써 떠났다. 나도 요령껏 주차를 마치고 등산화를 조인다. 그때 한 대의 대형버스가 등산객을 풀어놓는다. 나도 그 속에 끼어 걷는다. 법륜사 까지 포장이 잘된 길이다. S자로 휘어진 길이 굽어 돌면서 이어진다. 포장된 산길이라 힘이 덜 들 것 같지만 길이 조금 가팔라서 초심자들은 욕심을 내면 안 된다. 갈 길이 아직 먼 데서둘러 힘을 뺐다가는 뒤늦게 고생이 따른다.
오르는 길은 다리 힘이 적당하게 팍팍할 정도다. 조금 지치는가 싶으면 법륜사 백옥석 관음상이 하얗게 미소를 보낸 다. 곧바로 극락교다. 극락교를 건너 절 안으로 들거나 곧바로 등산로를 따르거나 걷는 사람 마음이다. 산을 오르는 건여기부터 비포장 산길이다.
묵은밭 지나 임꺽정봉으로
675m의 감악산은 높지 않은 산이다. 그렇다고 쉬운 산이라는 말은 아니다. 산은 산마다 산의 품격이 다르며 사람에게 주는 매력이 다르다. 감악산의 매력은 단연 조망권이다.
날이 좋을 때 개성 송악산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쾌청한 날이면 북한산까지 바라보인다.
법륜사를 지나 산길을 따라 오르면 걷기에 귀찮을 정도로 많은 돌이 깔려 있다. 몇 년 전 태풍으로 산사태가 나면서 쓸려온 돌이다. 쓸려 내린 돌길을 지나 개울을 건너고 나무 데크를 통과하면 숲길이지만 돌 위를 걸어야 한다. 개울을 따라 이어진 등산로는 어디를 가도 돌과 함께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다.
숯가마 터가 나온다. 숨을 고르고 이마에 솟은 땀도 좀 닦고 물도 한 모금 마신다. 감악산에는 곳곳에 숯가마 터가 있는데, 1960년대 말까지 숯을 구워 생계를 꾸린 사람이 많았던 까닭이다. 갈참나무, 신나무, 고로쇠나무, 단풍나무 아래 쌓인 낙엽 위로 녹지 않은 눈이 겨울의 정취를 돋워준다. 편한 걸음으로 조금 오르면 하늘이 확 트인 평지다. 묵은밭(오래 경작하지 않고 버려둔 밭. 묵정밭)이다.
여기서 산행 코스를 정해야 한다. 감악산을 전세 내듯 즐기려면 임꺽정봉을 먼저 찍어야 한다. 한참을 오르는데 전망 좋은 지점에서 기타 반주에 노랫가락이 흐른다. 가까이 가봤더니 한 사람을 위한 한 사람의 라이브였다. 남녀 한 쌍이 산을 오르다가 남자는 라이브를, 여자는 관객으로 둘만의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능선에 올라 양주 쪽을 바라봐도 시야는 아직 안개에 가려 있다. 급경사 나무 데크를 걸어올라 장군봉에서 발아래 펼쳐진 풍경을 봐도 시원하지 않다. 선바위를 바람막이 삼아 양지쪽에서 라면에 소주 한잔, 맛있는 점심을 먹고 임꺽정봉 으로 돌격! 임꺽정봉 근처에 다다르니 발아래 뽀드득 밟히는 하얀 눈의 경쾌한 소리와 눈이 부시는 햇살과 눈에 반사된 화사한 빛의 감촉!
임꺽정봉 오르기 직전 임꺽정굴이 있다. 깎아지른 바위 아래 있는 굴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다. 고구려를 치러 온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이곳에 진을 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설인귀굴이라 부르기도 한다. 설인귀굴로 알려진 것은 일제 초기의 문헌에서 처음 확인됐다. 조선지리(1918년)에서 봉암사를 소개하면서 절이 바위로 이루어진 굴에 있는데 설인귀가 지낸 곳으로 전해진다고 했다. 이와 다르게 마을 노인들은 임꺽정굴이라고도 부른다.
임꺽정봉에 오르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북한의 산도 한눈에 들어온다. 봉우리의 생김새가 매와 비슷하다고 하여 매봉재라 부르기도 한다. 매봉재 바위에 앉아 안개에 갇힌 산을 바라보니 이성부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산에 갇히는 것 좋은 일이야 / 사랑하는 사람에게 빠져서 / 갇히는 것은 더더욱 좋은 일이야 / 평등의 넉넉한 들판이거나 / 고즈넉한 산비탈 저위에서 / 나를 꼼꼼히 돌아보는 일 / 좋은 일이야 / 갇혀서 외로운 건 좋은 일이야
_〈좋은 일이야〉 부분
〈백비〉를 보다
감악산 정상으로 가기 위해 임꺽정봉을 내려가는 길은 북면(北面)이라 눈 쌓인 비탈이 미끄럽다. 아이 젠을 하고 조심스럽게 내려가 다시 오른다. 정상은 다른 산 정상과는 사뭇 다르다. 학교 운동장만큼은 아니지만 널찍하다.
저 멀리 비석 하나 서 있다. 가까이에서 보니 비석에는 글자 하나 없다. 밋밋하게 덤덤하게 서 있다.
세월의 흔적을 담은 이끼 같은 얼룩이 있을 뿐이다.
<감악산 비석>이다. 정상 표지석이 아니다. 비문이 닳아 없어진 것인지 처음부터 글자를 새기지 않았는지 알 까닭은 없고 전설이 전해질 뿐이다. ‘빗돌 대왕비’ 혹은 ‘진흥왕순수비’로 알려진 감악산 비석이 정상에 서게 된 이야기는 이렇게 전해지고 있다.
감악산비는 원래 양주시 남면 황방리(초록지기마 을) 입구 간파고개 도로변에 있었는데, 그 앞을 지날 때는 말을 타고 가던 행인들도 내려서 절을 하고 지나가야 무사히 고개를 넘었다. 이를 무시하고 지나 가면 말에서 떨어지는 화를 당했다. 외지에서 이 내용을 모르고 지나던 행인들도 피해를 보는 등 불편이 있어 감악산 산신령의 도움을 요청하는 제를 올리게 되었다. 어느 날 이 근방의 주민들이 같은 꿈을 꾸었는데 감악산 산신령이 나타나 소를 빌려달라고 했다. 다음 날일어나보니 꿈속에서 소를 빌려주겠다고 한 주민들의 소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고, 거절한 주민의 소는 죽어 있었다. 그런데 산모퉁이에 있던 비석이 어느새 감악산 정상으로 옮겨져 있었다.
이런 소문이 퍼지면서 감악산 산신령의 행동이라고 여기고 치성을 들이는 사람이 줄을 잇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감악산은 영험이 있다고 하여 제당을 지어놓고 주민들이 해마다 제를 지내고 있다.
글자 없는 〈백비〉에 예를 갖추고 까치봉으로 이어진 하산 길을 향한다. 정자와 전망대가 있다. 임진강과 개성공단을볼 수 있는 전망대다.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법륜사로 이어 지는 길과 곧바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직진해서 가면 조용한 흙길이 걷기에 편하고 숲 향기도 그윽하다. 한참을 가면 371번 도로를 만난다.
차량을 가져온 등산객은 법륜사로 원점 회귀해 6.7km의 넉넉한 산행을 마무리한다. 감악산 등산은 사계절 무리 없이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정표가 있어 길 잃을 염려는 없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겨울 한복판에서 이성부 시인의 절창 〈봄〉을 떠올리며 팍팍한 삶에서 희망의 끈을 당겨본다.
이성부(李盛夫)
시인 이성부(1942. 1. 22~2012. 2. 28)는 지금의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한 후 한국일보와 일간스포츠를 거쳐 <뿌리 깊은 나무> 편집주간을 지냈다. 1959년 광주고 재학 시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시 <바람>이 당선되었고, 1962년 <현대문학>을 통해 정식 등단했으며, 다시 1967년 시 <우리들의 양식>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1968년 당대의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에 저항하는 연작시 <전라도>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고,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에 참여해 유신 체제를 거부하는 문학인으로 활동하며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과 서민의 정한을 담아내는 사실주의적인 시 세계를 구축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은 후 한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못한 시인은 산행을 하면서 산을 향한 관심으로 당시의 절망과 슬픔을 삭이며 작품 세계에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민중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공동체적 삶의 정결성과 도덕성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시적 상상력과 서정성을 잃지 않는 유연함을 견지했다. 저서로는 시집 《이성부 시집》 《우리들의 양식》 《백제행》 《전야》 《빈산 뒤에 두고》 《야간산행》 《지리산》 등이 있으며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