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_김수영
메시아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앞에 나타난 예수는 엄청난 군대를 거느리지도 칼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그저 세상의 정치·종교·본능적 유혹을 거절한 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바보’였다. 그 바보는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로마제국을 뒤집었고 인류는 이제 그를 ‘전복자’로 기록한다.
1960·70년대 창비와 더불어 지성계의 두 산맥으로 대표되는 문학과지성사(문지)는 바로 그 ‘바보의 길’을 지나왔다.
엄혹한 시기. 이 땅의 문인들은 지식인의 사명을 부여 받고 풀처럼 강한 생명력으로 시대를 읽고 저항해야 했다.
그들은 아무런 무력도, 권력도 행사하지 않았다. 오직 펜 끝에서 나오는 정신만이 그들의 연약한 육체를 강인하게 세워주는 날선 칼이었다.
이제 그들이 아파했던 4.19와 독재의 시대는 갔다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에겐 여전히 목을 타게 하는 아픔이 존재한다.
“문학은 꿈이다.”는 문지 모토가 지나간 시기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 그들의 사명인 까닭이다.
이제 다시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에서 바보 같은 펜 끝으로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문지동인 2세대 홍정선 대표이사를 만나 문지의 발자취와 새로운 꿈을 들어봤다.
4.19와 군부독재의 시대를 지나 발 딛고 선 ‘지금’
Q.문지 대표이사로 4년을 재직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소감을 듣고 싶다.
문지는 동인으로 구성돼 있다.
1세대 문지를 지나 현재 우리 2세대가 경영을 책임지고 있다. 대표이사는 상징적인 자리이자 경영에 대한 실무를 담당하고 있다.
일이 가벼울 수도 있지만 많은 구성원 간 의견을 조율하는 조정자 역할을 하고 있다.
Q.문지 창립 이념과 주목할 만한 연혁을 떠올린다면.
자유민주주의적 태도를 지니되 정치이데올로기로 글을 재단하지 않으려 한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 이념이 아니라 글 자체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면 책을 내는 열린 태도를 지향한다.
최근에는 복거일 선생의 ‘보수를 보수한다’는 글이 있었지만 문지에서 고민 끝에 출판을 하지 않기로 했었다. 현실정치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복 선생은 문지를 세운 고 김현 선생의 눈에 띄어 등단했고 문지 출신의 동년배 술 친구들이 “복거일이 없으면 2차 안 간다.”고 할 정도로 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Q.계간지 ‘문학과 사회’ 발간 배경을 듣고 싶다.
1980년7월31일 문지가 폐간됐다. 이후 1987년 6월 항쟁 이후 그동안 정지됐던 출판물들이 대거 복간되는 시점이었다. 그때 문지의 의미는 끝났다고 여겼고 이때 ‘문학과사회’를 제호로 정했다.
당시는 문학의 사회적 의미가 강조되던 시기로 그 이후 수많은 급진적 잡지들이 출간됐다. ‘노동해방문학’을 비롯해 NL과 PD계열이 급진적 성향 잡지들을 창간하던 시기였다.
‘자본주의 톱니바퀴’ 아래서 바라보는 ‘순수’
Q.기획방향은 어떻게 정하고 있는가.
주로 한국문학을 기획한다. 시와 소설 등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그 외 평론과 문학이론, 인문, 사회, 자연과학 등을 출간하고 있다. 이는 최근 창작과비평사나 민음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부분이다.
창비가 아동문학 등 출간에 집중하고 있는 것에 대해 자본주의를 강력히 비판하던 이들이 자본주의 논리에 민감하게 적응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문지 역시 그 부분에서 좀 더 자유롭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Q.1999년 ‘문지아이들’이 첫 선을 보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배경이 궁금하다.
김주연과 시인 마종기 선생이 아동문학 출간 절차를 밟았다. 회사운영 원칙에서는 금기였지만 이를 스스로 깨뜨린 격이었다.
1970년대 출범한 1세대는 김현, 김병익, 김치수, 김주연을 시작으로 나(홍정선)를 비롯해 권오룡, 성민엽, 정과리 등 2세대를 거치며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문지는 2011년 3세대 편집동인 김동식, 김태환, 박혜경, 우찬제, 이광호, 최성실에 이어 강계숙, 김형중, 이수형 등의 4세대 편집동인 등장을 알린 바 있다.
이 과정에서 아동문학 출간은 간단한 결정이 아니었다. 김주연과 마종기 선생은 자신들이 이 짐을 짊어지겠다며 아동문학 출간을 결정했다.
Q.문지는 지식인 내지는 특정 전문가 집단을 위한 책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대중과의 간격을 좁힐 필요가 있지 않은가.
문지는 언어를 통한 예술품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문학작품을 고를 때에도 어떻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언어를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고 간직해 놓았으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다 보니 반 대중적이라는 시선도 있어 왔다.
하지만 박완서, 윤흥길 작가 등 베스트셀러도 많이 존재한다. 이것이 문지의 작품태도이다.
실제로 1976년 재출간한 최인훈의 ‘광장/구운몽’은 2001년 125쇄를 넘겼고 1978년 출간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134쇄를 거듭하는 스테디셀러를 기록했다.
이외에도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도로 남은 사내’, 이문구의 ‘관촌수필’,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 황순원전집, 최인훈전집 등 수많은 스테디셀러를 보유하고 있다.
“우리는 또 다른 ‘거인’을 기대한다”
Q.소설가 이청준, 문학평론가 김현 등 추모행사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두 분과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면.
문지 정신을 대표하는 사람을 꼽는다면 바로 이청준과 황동규, 정현종, 김현 등일 것이다.
특히 김현은 문지 초기부터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김현은 다독가이자 속독가였고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나고 작가들을 문지로 끌어오는 역할을 했다.
열심히 술 마시는 역할도 했다. 지금도 우리는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이면 만나서 술을 마신다.
이 자리에서는 ‘이념의 문제를 떠나 당신의 작품이 너무 좋았다.’는 태도로 만난다. 바로 이것이 문지의 전통이다.
Q.정영문 작가의 ‘어떤 작위의 세계’가 한무숙문학상과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을 휩쓸었다. 정 작가의 책 출간 이유와 신인작가 발굴 방법 등이 궁금하다.
처음 정영문 작가 글을 읽을 때 든 생각은 ‘이 사람의 글을 읽어줄 수 있는 독자가 한국에 1000명 정도 될까’였다. 사실 정 작가가 그동안 상에 인연도 없을 뿐더러 고통스러운 소설쓰기의 생활을 보내왔다. 그런 작가의 작품이 1만권을 돌파하며 책도 잘 팔리고 있다.
문지의 ‘편집동인’은 문지만의 독특한 체제로 위촉과 해촉이 가능한 편집위원 체제와 달리 문예지 편집권은 물론 단행본 출판과 사업계획까지 함께 협의하고 구상하는 경영 주체다.
이런 체제에서 문지의 신인작가 발굴은 동인 1~4세대 동인들이 평소 관심있게 본 작품들이나 잡지나 웹진 등을 통해 발굴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디지털이나 인터넷 문학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 삶이 그랬던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우리 인간자체에 어떤 변화가 있던 것인지 ‘거인’이 사라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황석영이나 이청준, 이문열, 황동규, 정현종, 고은, 신경림 등 상당한 긴 생명력 있는 작가들이 줄어들고 있다.
물론 그런 이유에는 출판사의 운영이나 경영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Q.문지의 베스트3을 꼽는다면.
어렵다. 우선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꼽고 싶다. 지금도 끊임없이 판매가 되고 있다.
사실 이 책은 읽는데 상당히 힘든 책이다. 주인공이 만들어낸 ‘천국’이 과연 천국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냐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만일 이 책이 독재냐 민주주의냐에 국한됐다면 이미 생명력은 사그라졌을 것이다. 이 작품의 생명력은 바로 인간자유와 행복 등 보편적 가치를 녹여내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정문길의 ‘소외론연구’다. 이 책은 마르크스적인 이론과 발상을 갖고 있다. 그 당시 판금되기 딱 알맞은 책이었다. 이 책이 좋은 책이라 생각했기에 출간한 것이었다.
무엇을 다뤘으며 어떻게 썼느냐가 중요하다. 전혀 팔릴 것 같지 않던 책도 많았지만 필요하다면 출간한다는 것이 문지의 정신이다.
세번째는 황동규 선생의 시집 1권이다. 모든 문학은 자기 시대 문학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펴낸 책이었다.
당시 문지는 미당이나 박목월 선생 등 생존 작가들의 책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대를 담고 있는 문학인들은 아니었다.
우리 동시대 사람들의 작품들로부터 시작하자는 생각에서 출간된 책이 황동규 선생의 시집이었다. 벌써 황동규 시인은 문학계 원로로 자리를 잡았다.
꿈꾸는 문지 “문학은 여전히 비체제적이어야 한다”
Q.생각하는 문학의 역할은.
한국사회는 문학과 사회의 긴장감이 존재한다. 이런 속에서 문학은 극단적으로 정치와 밀착돼 있거나 이를 거부하고 순수문학에만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문지는 편협에 빠지지 않는다.
정치에 밀착된다면 현실정치가 사라질 때 그 문학 역시 사라져 버린다. 그걸 반대로 부정해도 마찬가지다. 문학은 언어 그 자체도 아니지만 또 이 문학이 존재하는 현실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김현은 이를 “문학은 영원히 비체제적이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수많은 문제를,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을 문지는 “문학은 꿈이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Q.문지 대표로 가장 힘들었던 점이라면.
문지는 제1세대를 지났고 이제 2세대에서 3세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다. 2~3세대는 과도기 상태이다. 이 세대교체를 원활하게 마무리 짓고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위의 선생들이 가졌던 철학과 애정, 이런 것들과 동일한 신념을 따라 후배들이 그 길을 걷고 있다. 때론 논란과 토론, 갈등 등도 수반되지만 첨예하게 서로 부딪치는 문제가 있다. 다른 사람이 불만이 있더라도 좀 떠나가 주는 분위기였다.
Q.요즘 청춘멘토나 희망메시지 등 ‘힐링’과 관련한 책들의 열기가 뜨겁다. 이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픈 말이 있다면.
문지가 그런 책들의 유행에 끼어서 그런 책을 낼 생각은 없다. 그러나 구조를 건드리는 깊이 있는 성찰의 책이 있다면 기꺼이 출간할 것이다.
예를 들어 3만7000부가 팔린 ‘필요사회’가 그런 책이다. 한국인이 독일어로 출간한 것을 다시 번역한 책이다. 이 책의 요지는 현대 사회가 자기 스스로를 착취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현대인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일을 강요하기에 안식이 필요한 시대다. 휴식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 젊은이들은 ‘직장’과 ‘안정된 생활’, ‘흔들리지 않는 연애’를 바라는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즉각적인 도취와 유행에 빨리 반응하는 세대다. 새로운 세대들에게 이런 부탁을 드리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넘어서서 내 자신이 정말 해 보고 싶은 것을 할 것을 권한다. 즉각적인 대가나 성과가 따르지 않을지라도 10년을 몰두해 보라. 거기에 따라 당연한 결과들이 따라오지 않을까 한다.
나는 73학번이다. 당시에도 전혀 전망이 없던 시기였다. 그때 나는 집안에서 학비를 대줄 형편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교사하면서 돈 떨어질 때마다 공부를 했다. 삼시세끼를 자연스럽게 라면으로 먹다시피 했다. 자연스럽게 주변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의미있는 노력이 있다면 사람들은 돕게 돼 있다.
Q.문지의 앞으로 나아갈 길과 비전을 듣고 싶다.
‘전통과 개인’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새로운 시대, 사회변화 속에서 문지는 전통을 재해석하는 동시에 사회변화를 반영할 것이다. 시인 이상을 대단히 의미있게 평가했던 문지였기에 정영문 작가의 출현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걸 넘어서서 좀 더 대중들과 호흡할 수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류의 책도 좋지만 그 대신에 영화와 음악 등 공연 예술과 관계된 서적출간을 고심하고 있다.
Q.문학이 사라진 시대라고 한다.
문지신서가 2000부 팔렸다. 옛날에는 5000부 팔리던 책들이다. 소설은 3000부 정도 팔릴까. 문학 독자를 옛날에 비해 다른 많은 곳으로 뺏겼다고 흔히들 말한다. 정말 그럴까?
물론 팔리는 전체 부수는 줄었을지 모르지만 문학시장이 축소됐다는 이런 견해는 재검토돼야 한다.
종이책이라는 읽기방식은 변화할 수 있지만 문학이라는 콘텐츠는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들은 죽간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기록했다. 이후 발전된 인쇄술은 그동안 제한됐던 지식을 급격하게 확산시켰다. 이제 다시 전자책이라는 새로운 ‘글’을 담는 그릇이 만들어졌다.
‘종이’로 만든 책이라는 방식은 변할 수 있지만 ‘책’은 사라지지 않는다. 읽는 방식이 변화할 뿐 책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제휴/CBC뉴스 김경종 기자 press@cbc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