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볼테르는 책의 중요성을 짧지만 강렬하게 묘사한다.
그의 말처럼 글을 쓰고 구성해 편집하는 출판과정은 사람의 역할이지만 그런 ‘사람’이 ‘내재’를 갖추도록 하는 것은 책, 즉 꾸준한 독서를 통해 가능하다는 뜻이다.
사람은 보통 자신이 직·간접으로 겪은 사례를 바탕으로 문제해결과 판단을 하기 마련이다. 이때 독서는 간접경험의 한 형태로 직접경험의 한계를 뛰어 넘도록 도와주는 ‘확장형 지식습득’의 수단이 된다.
사람의 편찬(編纂)이 이처럼 신중하고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처럼 독자는 자신의 경험 못지않게 타인의 사고와 경험의 산물인 책에 대한 큰 기대를 갖고 보기 때문이다.
사람의 ‘진정한 내면을 채울 양분’을 만든다는 책임감으로 좋은 벗처럼 와인처럼 오랜 세월을 담담하게 지나온 민음사를 찾았다.
첫 번째 펴낸 책은 요가 서적…김수영 김종삼 등 시 발간
Q. 민음사의 창립 배경과 현재까지 걸어온 역사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다면
민음사 박맹호 회장이 1966년에 출판사를 설립했다.
충청도 보은 출생인 박 회장은 서울대 문리대에서 수학한 뒤 자신이 바라던 꿈을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에 터를 잡았다. 문학청년이었기에 책에 지대한 관심이 곧 그를 이 분야로 자연스럽게 이끈 듯하다.
첫 출간 도서는 ‘요가’ 였다.
요즘이야 웰빙 시장에 대한 관심과 시장이 탄탄한 베이스를 갖고 있지만 그때 당시는 이 분야에 대한 전례가 없었던 터라 그 책은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건강과 미용이라는 두 가지 목적 달성을 꾀하는 사람들의 입맛을 제대로 잡은 것이다. 큰 호응은 당연지사.
요가책 판매 수익으로 어느 정도 자금이 확충되자 문학도서 발간을 계획했다. 소설가 이제하, 박상륭, 최인훈 등의 작품을 펴냈지만 반응은 크지 않았다. 결국엔 큰 적자를 냈다.
이후 일본 건축 책을 들여와 출간하는 데 공을 들였다. 잘 팔렸고 회사 재정도 나아졌다. 이런 반등을 토대로 박 회장은 또다시 평생의 꿈인 문학 출판을 시도해 대담하게 ‘세계 시인선’ 시리즈를 내기 시작했다.
신진 학자들의 좋은 번역에 대담하게 원문을 함께 수록하면서 폭발적 반응이 있었다. 시대가 달라진 것이었다. 1970년대 초 경제 상황이 점차 나아지면서 문화적 교양에 대한 갈증이 퍼져 있을 때 적절한 기획을 내놓은 까닭이다.
그다음에는 ‘오늘의 시인 총서’를 발간해 시인 김수영, 김종삼 등과 같은 그 시절로 볼 때에는 젊고 유망한 시인들에게 작품을 내보일 통로를 제공하게 됐다. 자비가 아니면 시집을 내기 힘들었던 시절,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한 시리즈를 도입함으로써 능력은 있으되 돈이 없었던 이들에게 큰 기회와 희망을 준 것이다. 한때 모든 시인이 이 시리즈에 들어가기를 꿈꿀 만큼 반응이 참 좋았다.
시집 반응을 토대로 오늘의 작가상 탄생
역량 있는 시인 발굴과 그에 대한 반응이 순조롭게 나타나자 이번에는 소설 분야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늘의 작가상’이 탄생했다. 상업 소설가가 아니면 젊은 작가는 책을 낼 기회가 없던 시절이었다.
상의 콘셉트는 공모를 통해 당선되면 책으로 바로 출판해 주는 것이었다. 첫 회부터 작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수산의 ‘부초’,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 강’ 등이 차례로 수상작이 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오늘의 작가상’은 신인 작가의 등용문이자 작품성과 대중적인 호응이 함께 따르는 기회였다. 이후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 3회 수상작이 되면서 단기간에 30만 부가 팔렸다. 당시 어마어마한 성공 지표를 만든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의 시인 총서에 이어 오늘의 산문선과 오늘의 작가 총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연속 기획하면서 단행본 시대를 선도했다. 이렇게 한국문학에서 성공을 거둔 후, 박맹호 회장은 세계 최정상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세계문학전집을 만들어야겠다는 목표를 수립했고, 20년에 걸친 준비 끝에 1998년 드디어 출간하기 시작해 얼마 전 300권을 돌파했다. 독자들 반응도 좋아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한 질을 사준다면 그 사람한테 시집가겠다는 말이 떠돌 정도다. 지금까지 1000만 부 이상 팔렸다.
민음사의 또다른 축은 인문서이다. 인문서는 출간 당시 즉각적인 반응은 없더라도 일단 사회의 바탕지식이 되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오래 팔리는 게 특징이다. ‘대우학술총서’ ‘이데아 총서’ ‘현대 사상의 모험’ 등 일련의 시리즈를 통해 민음사는 천여 권 이상의 고급 인문서를 출판하면서 책으로 지식의 중심을 잡아 왔다.
전자책 좋은 플랫폼과 참신한 콘텐츠 조화가 관건
Q. 민음사 역시 e-book의 트렌드를 발맞춰 따라가는 듯하다. 또 앞으로 도서 출판 시장의 흐름을 볼 때 아날로그와 디지털 형식이 어떻게 큰 변화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시대가 시대인 만큼 전자책에 대한 기대와 반응은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디지털화를 잘해 보려고 애쓰지만 쉽게 답을 갖긴 어렵다고 본다. 내 생각에는 ‘어떻게’ 만드느냐가 문제일 듯하다.
‘가독성’이야말로 아날로그 형태의 종이책과 디지털 책의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이게 바로 전자책을 만드는 데 가장 고민할 부분이자 쟁점이기도 하다. 흔히 독자들은 전자책으로 읽으면 내용에 대한 몰입이 어렵다고 말한다. 몰입을 제공하는 것은 근대 이후 콘텐츠 산업의 핵심 과제였다. 전자책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디지털 환경에서 콘텐츠와 플랫폼을 두고 어떤 게 더 중요한 ‘주’가 되고 그렇지 않은 ‘부’가 되는지에 대한 말이 많다. 내 소견으로는 참신한 콘텐츠가 먼저 있고 그에 맞는 플랫폼이 있는 게 맞다.
플랫폼이 먼저 있고 그에 콘텐츠를 끼워 맞추는 식이 아니라, 좋은 콘텐츠가 우선하고 그에 잘 맞는 플랫폼을 만들 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고민은 ‘콘텐츠란 무엇인가’ 또는 ‘어떻게 좋은 콘텐츠를 만들 것인가’로 옮겨간다.
어떤 콘텐츠라도 소비자를 사로잡으려면 일종의 ‘충격’을 줘야 한다. 혁신적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일정한 틀에 맞추지 않아야 한다. 그게 천재들이 하는 일이다. 편집자의 일은 천재들의 일을 지지하고 받아들여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다. 그러려면 ‘늘 깨인 상태’로 열려 있어야 한다.
김수영 여동생 ‘김수영 문학상’에 산파 역할
Q. ‘김수영 문학상’을 통해 국내 우수 시인을 많이 격려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가나 에피소드를 소개해 달라.
기억에 남는 시인? 몇 명의 시인만을 이 자리에서 꼽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김수영 문학상의 시초는 시인 김수영 시인의 막내 동생이자 현대문학 편집장이었던 김수명 씨로 인해 가능한 일이 됐다.
김수영이 시집을 내지 못한 채 교통사고로 비명에 간 상황이 되자 김수명은 오빠의 원고를 모아서 출판하기로 하고 여러 출판사를 들렀다. 마침 ‘오늘의 시인 총서’를 기획하던 때여서 민음사에서 그 일을 맡기로 했다. 김수영이 정치의 시인이 아니라 자유의 시인이어야 한다는 김수명의 뜻과 민음사의 출판철학이 들어맞은 결과이기도 했다.
결국 김수영의 유고는 일단 ‘거대한 뿌리’라는 제목으로 민음사에서 출간됐다. 김수명은 도서 판매로 벌어들인 인세를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서 내놓으면서, 앞으로 김수영 시집에서 나오는 인세를 신진 시인을 격려하는 데 쓰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자유의 정신에 부합하는 작품에 상을 주라는 뜻에서 시집 판매에 따른 인세를 전적으로 ‘김수영 문학상’ 상금으로 허락한 것이다.
황금가지, 사이언스북스, 세미콜론, 비룡소 등 전문화
Q. 민음사는 황금가지, 사이언스북스, 세미콜론, 민음인, 비룡소로 분화된 출판 작업을 하는데 이에 따른 특징을 설명한다면.
황금가지는 ‘이갈리아의 딸들’을 시작으로 ‘드래곤 라자’, ‘셜록 홈즈 전집’, ‘반지의 제왕’ 같은 SF, 추리, 판타지, 호러 등 주로 장르 문학을 펴내는 자회사다.
사이언스북스는 ‘개미제국의 발견’, ‘통섭’, ‘한국 과학사’ 등과 같은 도서를 발간했다. 전문적이고 딱딱한 과학을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세미콜론은 비주얼한 도서를 주로 맡고 있다. 미술과 디자인, 건축, 사진은 물론 영화, 만화 등을 주 업무로 삼는다.
민음인은 대중 논픽션 파트를 맡았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시리즈, ‘민음 바칼로레아 시리즈’ 등 다양한 형태의 논픽션을 기획해 출판하고 있다.
비룡소는 아이들이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을 도서 전반에 대한 출판을 담당하고 있다.
이처럼 민음사의 모든 자회사는 각기 전문화되고 분화돼 있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서로 긴밀한 협업이 이뤄진다. 이는 민음사가 다양한 분야의 책을 내면서도 좀 더 효율적이고 일관성 있는 출판을 할 수 있도록 한 기획 경영의 일환이다.
Q. 민음사에서 2012 노벨문학상 수상자 모옌의 최신작 ‘개구리’를 출간했는데 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가.
모옌의 작품에 대한 작업은 ‘노벨문학상’ 수상 이전에 기획이 진행되었다.
내부에서 역량 있는 중국 작가에 대한 관심이 계속 있어 왔는데, 모옌에 대해서도 역시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 수상 이후 알려졌듯이, 모옌은 중국 정부를 비판하지 않는 등 관제 작가라는 이미지가 있어 논란의 소지가 많았다.
하지만 작품 ‘개구리’는 다른 면모가 돋보이는 내용이다. 한 가정 한 아이만 허락하는 중국정부의 정책과 이의 강제 집행에 따른 비인간적 상황을 비판한 작품이다. 작품을 통해 휴머니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드러냄으로써 권력과의 거리 두기를 꾀한 수작이다. 노벨상 전에도 모옌의 인지도만큼이나 많은 독자가 찾았지만 노벨상 발표 후 더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Q. 출판사와 작가, 독자 이 셋의 관계가 좀 더 가깝고 친밀해진 도서 환경이 됐다. 민음사가 이를 위해 추진하는 전략과 전술이 있다면 무엇인가. 또 실제 도서기획과 편집에 활용하는가.
지금까지 서평이나 베스트셀러는 전문가나 특별한 그룹(예를 들면, 서점과 온라인 서점의 매출 집계)에 의해 만들어졌다.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의 평가나 입소문에 의해 책이 알려지는 경우는 예외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민음사는 후자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온・오프라인에서 독자들과 접촉면을 늘려서 소통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중이다. 대표적 활동이 ‘민음 북클럽’이다. 과거에는 회원 수를 늘리는 데에만 많은 신경을 썼는데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민음사 책을 더 사랑해 주는 독자들과 만나서, 그분들과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혜택을 드리는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연간 유료 회비를 받고 북클럽 회원을 모집해서 1년 내내 독자들의 독서를 돕는 각종 강연이나 이벤트를 제공해 참여를 유도하고 자연스럽게 민음사와 함께하는 방법을 생각해 본 것이다. 2년째인데 해마다 폭발적으로 가입률이 높아지고 있다.
이는 일시적 트렌드가 아닌 새로운 문화 소통의 방법으로 정착될 것이라고 본다. 아마도 장기적으로는 민음 북클럽 회원 중에서 민음사에서 책을 내는 작가도, 민음사에서 책을 편집하고 디자인하고 마케팅하는 직원도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판은 지속적인 관심과 열정 없이는 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Q. 최근 SNS나 유튜브의 도움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이 많이 넓어진 듯하다. 갈수록 출판업의 경계 또한 없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를 위한 민음사만의 글로벌한 기획 혹은 마케팅 플랜이 있는가.
글로벌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다만 국내 저자의 책을 해외에 수출하는 작업은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민음사는 이미 국제적 출판 네트워크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를 활용해 국내 저자의 해외 진출을 지속적으로 도와 나갈 것이다.
베스트 없어…책 블록버스터처럼 보급되어선 안 돼
Q. 민음사에서 추천하는 베스트3은 무엇인가. 그렇게 선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책에는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베스트’만을 뽑아서 이를 중심으로 매출을 만드는 출판문화를 지양하고 싶다. 최근 펭귄과 랜덤하우스가 합병한 것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의 칼럼을 썼다.
책은 영화처럼 블록버스터 형으로 보급되어선 안 된다. 그럴 경우 도서 시장의 다양성이 훼손되고 특정한 책 중심으로 획일화할 소지가 있다. 독서는 텔레비전, 영화가 대체할 수 없는 그 무엇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스템이 대형화되면 양서가 골고루 노출되기가 어렵다. 증명된 브랜드 작가, 일명 ‘미는 작품’들만 가판대에 즐비할 것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지식 사회는 폭넓은 선택이 가능하도록 돕는 데 있다고 본다. 신진이나 중견 작가가 더욱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게 더더욱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반 발짝 앞서며 시대와 함께 걷고 싶어
Q. 앞으로 민음사의 목표와 이에 따른 계획을 듣고 싶다.
민음사 창립자인 박맹호 회장은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라.”라고 말해 왔다. 다만, 한 발짝이 아닌 ‘반 발짝’만 말이다.
이는 편집자가 현실적 흐름을 간과한 지나친 혁신이나 터무니없는 상상이 아니라 지금보다 조금 앞선 다른 시각을 확보해야 함을 뜻한다. 이로 인해 곧 대중과 같이 호흡하는 동시에 미래를 불러올 수도 있게 된다. 앞으로 오래도록 민음사는 출판에서 이러한 역할을 해 나갈 것이다.
제휴/CBC뉴스 송현희 기자 press@cbc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