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운동가 윤봉길
책의 지혜로 벼린 영원한 청년 정신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생가 곁의 윤봉길 의사 동상은
여느 곳에서 볼 수있는 동상과 조금은 다른 모습이다.
왼쪽 손에 책이 들려 있다.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그는 고향에서 야학당과 독서회를 조직하고
《농민독본》을 저술하는 등 일찍부터
인문학적 농촌 계몽 활동가로 유명했다.
1928년 스무 살 때의 일이었다.
“일본의 잇따른 망언이 심히 우려됩니다. 1932년 상하이 의거를 통해 독립운동의 불씨를 새롭게 지핀 윤 의사께서 대노하실 망언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역사 왜곡 문제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특히 청소년기 세대들에게 있어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판단에서 도서관을 만들고, 도서관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문 강좌와 역사 기행을 추진하고자 개관하였습니다.”(양시헌 사무처장)
“윤 의사님은 사실 대단히 인문학적인 분이셨습니다. 스무 살 때 이미 고향 마을에서 각곡독서회라는 이름으로 독서회를 조직해 책의 지혜만이 잘사는 농촌을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우민들을 깨우쳐 나라의 독립까지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분입니다. 요즘 20대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농촌 계몽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펼치셨는데, 각곡 독서회 선양 사업을 겸해, 도서관 건립을 계기로 그분의 인문학적, 문화 운동가적인 면면도 상당 부분 재조명 되고 있습니다.”(채정석 운영위원장)
매헌 윤봉길 의사는 1908년생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 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 다. 같은 해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 의거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5월 25일) 를 받은 후 7개월 만이었다.
윤 의사의 상하이 의거는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한인애 국단’에 가입한 청년 윤봉길이 천장절(天長節) 상하이 사변 전승 기념식 자리에 수통형 폭탄을 투척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독립운동사적 쾌거였다. 이 의거로 수많은 일본군 수뇌부가 현장에서 즉사했거나 심각한 중상을 입은 것은 물론 대한민국의 독립 정신이 또렷이 살아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절대적 계기가 됐다.
고향에서 ‘문사(文士)’로도 이름 알렸던 청년 윤봉길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마라 /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 너희들은 그사람이 되어라.>(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 두 아들 모순 (模淳) 과 담(淡)에게)
‘상하이 의거’를 며칠 앞두고 중국에서 윤 의사가 고향의 어린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다. 이는 윤봉길 의사가 남긴 여러 서간문의 하나로 윤 의사가 남긴 글에는 이렇듯 청년 정신의 기개뿐 아니라 대단한 문사 기질까지 엿볼 수 있는 편지글과 한시가 많다. 이는 일찍부터 책을 가까이하면서 책을 통해 폭넓은 혜안과 국제적 감각을 익혔던 독서 습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찌는 듯 무더운 날의 불꽃 튀기며 / 땅의 열기는 뜨겁게 솟구치는데 / 기러기 일찍 날아 우는 소리에 / 높은 하늘도 서늘한 듯하여라. / 사랑스러울 손 살아가는 이 땅에는 / 소 떼 울음 들려오는데 / 가는 길 많아서 양 잃는 것 / 탄식할 것 없는가 한다.>
두 연으로 되어 있는 <임술(壬戌) 6월 그믐날 벼루 씻으 며>라는 한시의 첫째 연이다. 이 시는 윤 의사가 혼인하던 열다섯 시절의 작품이다. 중국 춘추전국 시절의 대학자 양주(楊朱)는 ‘배우는 사람의 방법이 잡다하면 진정 알아야될 진리를 잃는다’는 교훈을 ‘갈림길이 너무 많은 탓에 양을 잃어버린 이웃 사람의 탄식’에 빗댄 바 있다. 마지막 구절 ‘가는 길 많아서 양 잃는 것’은 바로 이 옛말을 되새겨본 것.
이 시는 이즈음 윤봉길의 한문 실력과 문장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볼 만한 대목이라 의미 깊다.
<들의 벼 반쯤 익어서 / 푸르고 누른 것 연해 있는데 / 먹이를 찾는 여러 새들 / 모두 앞을 다투어 날아간다. / 가장 한스러움은 메마른 땅까지도 / 검은 착취의 손길이여 / 어찌 무슨 수로 곡식 끊고서 / 저 하늘로 올라갈 것이랴.>
<길 가다 느낌 있어 짓는다>고 무덤덤하게 제목 붙인 이 저항시 역시 열다섯 엇비슷한 시기의 작품이다. 윤봉길은 이 시의 둘째 연 마지막 구절에서 ‘이 나라의 태평스런 국권은 / 기필코 돌아오고야 말리라’고 강조하고 있다. 통탄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라 열다섯 장부의 입지(立志)를 ‘기필 코’로 재삼 다짐하는 청년 윤봉길의 날선 삶이 생생하게 드러난 작품인 것.
“한글은 어머니한테 배웠고, 학문이 높았던 큰아버지 윤경(尹坰) 선생 밑에서 천자문을 떼셨지요. 그리고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1918년, 그러니까 열한 살에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 학교엘 들어갔는데, 이듬해 3·1 만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요즘 아이들로 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만 당시 생각이 남달리 깊었던 윤 의사 께서는 만세 운동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결국 그 충격의 여파로 보통학 교를 2학년에 그만두시는데, 그 뒤 만난 스승이 매곡 성주록 선생이었답니다. 이분 문하에서 오치서숙(烏峙書塾)이란 이름의 서당을 다니면서 대학과 사서삼 경을 익혔는데, 오치서숙 시절에는 ‘중추절 시회’ 즉, 요즘 으로 치자면 백일장에 나가 1등상을 받기도 하셨다고 제 선친께 들은 일이 있습니다.”
윤 의사의 친조카인 윤주 윤봉길기념사업회 부회장의 설명이다.
길에서 우연히 깨달은 책과 문맹 퇴치의 필요성
“아, 저기 말유, 잠깐만 뭣 좀 물어볼 게 있는디유.”
공부를 마치고 서당에서 귀가하던 길, 윤봉길은 헐레벌떡 뛰어오며 다급하게 말을 붙이는 한 사내와 만났다.
“저기, 혹시 글 좀 읽을 줄 아셔유?”
다짜고짜 들이대듯 묻는 사내의 표정엔 당혹감이 역력 했다. 게다가 사내가 한 아름 가슴에 쓸어 담듯 안고 있는 것은 비석이나 다름없는 공동묘지의 묘표 토막 아니던가.
“네, 글을 읽을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왜 그러시는지요?”
열여덟 윤봉길이 우연히 만난 이날의 ‘공동묘지 묘표 사건’은 한마디로 대단한 충격이었다. 윤주 부회장은 이날의 사건 전말을 이렇게 전한다.
“어떤 사내 한 사람이 고향을 떠났다가 아주 오랜만에 부모 성묘를 하려고 공동묘지를 찾았는데, 산소를 못 찾는 거였지요. 그래서 망자(亡者)들의 이름이 적힌 묘표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다가 자신이 글을 읽을 줄 모르니까, 주변에 사람은 없지 마음은 바쁘지, 그러니까 이걸 몽땅 빼내서 가슴에 안고 누군가 만나려고 산을 뛰어 내려 왔대요. 그러다 길에서 만나게 된사람이 바로 윤 의사인데……. 윤의사께서도 처음엔 사내의 선친 함자를 물어 아무 생각 없이 묘표를 찾아주고 나서 가만 생각해보 니, 이거 더 큰 일이 났더라는 거예 요. 필경 이 사내가 묘표를 뽑아오 면서 그 자리에 표식이라도 제대로 해놓고 왔겠는가. 그러니 뽑은 묘표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 꼽을 수 있겠는가, 그런 걱정 말이지요.”
결과는 윤봉길의 걱정 그대로였다. 아, 답답한 현실. 하나만 알고 둘은 절대로 알지 못하는, 혹은 알려고도 들지 않는 우매한 농촌 백성이여. 이제 다시는 선친의 묘소를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됐을 뿐더러 수많은 망자에게도 씻을 수없는 죄를 짓게 됐다며 엉엉 우는 사내를 뒤로한 채 가던 길을 재촉하면서도 윤봉길의 머릿속엔 온통 뭔가 모르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일렁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윤 의사께서는 나 혼자만 배우고 익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열 명 중 아홉은 글을 모르고 사는 게 작금의 현실이지 않던가, 주변 사람에게 글을 가르쳐야 되겠다, 책을 읽도록 해야 되겠다, 많은 것을 깨우쳐 줘야만 되겠다, 바로 이 공동묘지 묘표 사건을 계기로 그런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우매함으로써 국권을 잃어버린 우리 민족이나 글을 깨우치지 못해 부모 산소까지 잃어버린 이 사내나 불쌍하기는 마찬가지란 생각을 하면서 우선 간단하게나마 야학이라도 시작해야겠다는 뜻을 세우는데, 이것이 바로 윤 의사께서 시작한 최초의 농민 개혁 운동이었고, 그게 열아홉 살 즈음이었습니다.”
윤주 부회장의 이어진 설명이다.
잘 사는 농촌 위해 20세 때는 《농민독본》 저술
그가 20세 때 지은 《농민독본》의 편찬도 바로 이 같은 고민 속에서 출발했다. 《농민독본》은 지식의 나눔 정신과 일제에 대한 저항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된 역작이다. 아쉽게도 1권은 유실돼 그 내용이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제2권 ‘계몽 편’과 제3권 ‘농민의 앞길 편’만을 들여다보더라도 독서회를 만들고 야학을 여는 등 농촌 계몽 운동가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 스무 살 시절의 윤봉길은 어떤 생각을 머금고 있었는가, 후세가 알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
<낡고 물들고 더럽고 못생긴 것을 무찔러버리고, 새롭고 순수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놓지 않으면 안될 조선에 있어서, 또 더욱 남달리 가진 힘이 빈약한 조선의 농민으로서는 무엇보다도 경우와 이해를 같이 하는 사람끼리 일치 공동의 필요를 절실히 느낍니다.>(3권 제6과 ‘농민과 공동 정신’ 중에서) 일제가 세운 보통학교와 달리 한글 수업을 정규 과목으로 택한 윤봉길의 사랑채 야학당에서 이 《농민독본》은 가장 훌륭한 교재로 쓰였다. 한글만 웬만큼 알면 누구나 읽을수 있도록 쉽게 쓰인, ‘덕산 사람에 의해, 덕산 사람들을 위해 집필된’ 최초의 농촌 계몽서였기에 반가웠고, 친근했고, 바로 우리 집 얘기였고, 잘 살기 위한 ‘그들만의 길 찾기’가책 속에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이었다.
1919년 3·1 만세 운동의 파장은 컸다. 그 역동적 공간 속에서 창간된 월간지 <개벽>은 천도교를 배경으로 일제에 대한 극렬한 항쟁을 기본 노선으로 삼았다. 오치서숙을 다니는 동안 누구의 권유랄 것도 없이 청년 윤봉길은 예산 읍내 장터에 나가는 것을 즐겼다. 매달 새로 나오는 <개벽>의 유혹 때문이었다.
1920년 6월 25일 창간호를 시작으로 1926년 8월 1일 강제 폐간되기까지 <개벽>은 34회나 발매 금지를 당했을 만큼 언제나 항일 논조가 분명했다. 오치서숙의 스승을 통해 대학과 사서삼경을 꿰는 한편, 신라에서 조선조 중기까지 유학자들의 스승과 친구 관계를 정리하고 있는 ‘명현록(名 賢錄)’이나 조선조 인조 때까지의 충신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을 통해서는 일찍이 인생관을 정리했다. 더불어 <개벽>과 동아일보를 통해 격변하는 국제 정세와 일제의 수탈로 메말라가는 조선의 농촌 현실까지 꿰뚫고 있었던 것. 바로 이 같은 지적 자산을 바탕으로 20세 때 고향 마을에 각곡독서회를 만들고 자신 들이 소장하던 책부터 서로 돌려 읽는 독서 운동을 시작했 다.
“책에서 모든 정보를 얻었던 분이지요. 고향 마을을 잘살게 하기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윤 의사님께서 주도해 만든 ‘월진회’라는 청년 조직이 있습니다. 23세 때까지, 그러 니까 중국으로 떠나기 직전까지 온갖 애정을 쏟으셨던 이조직에서 농가마다 새끼돼지 한 마리씩을 분양한 일이 있었는데요, 이들을 어떻게 하면 과학적으로 잘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하던 윤 의사님이 경성에 가 있던 친지들에게 부탁 해서 축산 전문 서적을 구입해 함께 읽도록 독려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채정석 운영위원장의 설명이다.
보다 친근한 이미지의 윤봉길로 거듭나
안중근 의사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친다’는 유명한 독서 명언을 남겼다. 그리고 김구 선생은그 유명한 《백범일지》를 통해 인문학적 정치 지도자다운 면모를 후세에 전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의거라는 독립운동사적 결과론에 집중된 탓인지 지나치게 ‘무사적 이미지’만 강조됐던 게 사실이라고 윤봉길기념사업회 측은 아쉬워한다.
25세 젊은 나이에 구국의 결단을 내릴수 있었던 것 역시 ‘책의 지혜’였다는 사실을 청소년 세대들이 깊이 이해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