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법정 스님 《무소유》 중에서
법정 스님 《무소유》의 송광사 불일암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순천행 버스를 타다
새해를 맞아 한 달이 지나고 있다. 얼마 후면 설이다. 이번 겨울도 춥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 눈은 푹푹 날리고 /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백석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찬바람이 휘몰아친다. 밤이 아닌 아침인데 저녁 어스름인 듯 사위가 고요하고 어둑하다.
나의 ‘책 따라 걷는 길’은 책을 고르고, 책 속의 여행지를 정하고, 날씨를 점검하고, 교통편을 알아보고, 이동 시간을 계산해야 한다. 현지에 도착 해서 어두운 밤 시간과 마주치면 사진 찍기가 어렵다. 해 떨어지기 전 몇 시간의 여유를 잡아야 한다.
여행과 산행을 목적으로 떠났던 지난 여행의 야간 행군이나 야간 산행은 나의 취재 여행과는 전혀 별개다. 이러한 사정으로 나는 이른 아침에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호남선)에서 순천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은 휑하니 빈자리가 많다. 추위는 약간 누그러진 듯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의 창 밖 들과 산에는 어제 내린 눈이 겨울 풍취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불안이 왔다.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다. 4~5시간 후면 순천 송광사에 도착할 예정인데 그때까지 안개가 걷히지 않으면 어쩌나……. 아침 안개는 산행 경험상 정오를 기점으로 걷히게 마련이다. 스스로 안심을 걸어본다. 설친 잠을 보충하기 위해 느슨하게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를 몇 번 했지만 안개가 마음에 걸려 쉽게 잠을 청할 수 없다. 장수 -순천 간 고속도로에 진입했는데 안개는 여전하다. 안개는 부처님이나 하느님께 맡기고 잠들어버린다.
눈을 뜨니 순천이다. 안개는 여전하다. 안개, 하면 김승옥 소설 <무진 기행>이 떠오른다. 안개의 도시 순천에 온 것이다. 순천종합터미널에서 10여 분 걸어 송광사행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50분 후에 버스는 도착했고 1시간 20분가량 산마을과 산속 고개를 지나 송광사 주차 장에 도착했다. 산채비빔밥을 점심으로 먹고 산길을 나선다.
하늘을 올려다봐도 해는 보이지 않는다. 안개는 희뿌옇고 날씨는 흐려 있다. 산과 산 사이의 계곡은 어둑어둑한 목탄화 풍경이다.
‘무소유길’ 따라 불일암으로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많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법정 스님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행복은 결코 많고 큰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은 단순함과 간소함에 있다.
-법정 스님 《홀로 사는 즐거움》 중에서
불일암 오르는 길에는 법정 스님(1932~2010)의 맑은 대나무 바람 소리 같은 말씀으로 명상의 걷기를 안내한다. 송광사에서 고개 하나 넘어 걸어서 30분가량이면 도착하는 위치에 있는 불일암. 이곳에서 스님은 1975~1992년까지 머물며 《무소유》 등 많은 저서를 발간했다. 그 후 강원도 평창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겼다.
법정 스님이 2010년 3월 11일 열반하셨으니 햇수로 7년. 스님은 가셨 지만 산문집과 잠언집, 불교 서적 등 많은 저서를 집필해 진정한 참사람의 모습이 어떠하며 수행자의 삶이 무엇인가를 많은 사람에게 남겼다.
《무소유》는 2017년 현재를 시점으로 봤을 때 1976년에 초판이 발간되 었으니 41년 전의 책이다. 35편의 짤막한 수상록 묶음이다. 이 책의 독자 반응은 폭발적이어서 스님이 열반하신 2010년 집계로 무려 300만 부가 팔렸다. 그러나 지금 《무소유》는 소유할 수가 없다. 스님이 가시면서 “나의 모든 책을 절판해주시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려면 도서관으로 가야 한다. 이 책과 관련한 유명한 헌사가 있다.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라는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이다.
스물두 살 청년이 스님 되어 오래 머물며 삶의 바른길을 정진했던 불일암 가는 길은 나무들이 겨울을 견뎌내느라 수척하다. 한참 앓고 있는 얼굴이다. 나의 마음도 스산한 날씨 탓인지 스님이 떠난 빈 공간 탓인지 앓는 듯 힘에 겹다.
낙엽 수북한 돌계단을 지나 삼나무 숲으로 든다. 곧게 뻗은 삼나무 군락은 송광사의 자랑거리다. 정신이 맑아진다. 숲을 벗어나면 굵은 대나무 터널이 흐트러진 마음을 직립시킨다.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의례를 통과하면 다음으로 참죽나무가 맞이한다. 가느다란 대나무로 올바르지 못한 마음 무늬를 부드럽게 쓸어준다.
세속의 잡다함을 잠시라도 내려놓으라는 말씀이다. 대나무들은 불일 암이 가까워질수록 굵기가 가느다란 세죽(細竹)이다. 마음속 여린 구석 구석을 닦으라는 의미로 받고 겸손해진다.
후박나무 아래서
불일암 앞 밭고랑 사이로 녹지 않은 눈이 스님의 자취처럼 희끗희끗하다. 스님이 가신 지삼칠일 이틀 전에 나도 불일암 마당에 서 있었다. 오늘은 그날에 비해 인적이 드물다. 조용하고 적요하다. 묵언이다. 스님이 아끼고 사랑했던 후박나무 곁에 있는 표지판이 가슴을 찡하게 한다.
-법정 스님 계신 곳
스님의 유언에 따라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후박나무 아래 유골을 모셨다.
스님이 떠난 흔적은 이것이 전부였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송광사를 거쳐 인적 드문 불일암을 휘적휘적 찾아 오르던 기억을 떠올리니 내 젊은 날도 이렇게 지나갔다.
송광사는 전남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에 있는 절이다. 나의 출생지와 성장지인 고향은 송광사가 있는 송광면 월산리(月山里)다. 송광면 안에 리(里)만 다른 내 고향 동네 절이 송광사다. 초등학교 때 송광 사로 소풍을 왔고 보물찾기도 했다. 지금은 주암댐 건설로 수몰된 고향 월산리에 있는 송광서초등학교 6년은 1955~1960년이었다. 당시 송광 사는 참으로 어수선했고 폐허였다. 1948년 1월 여순반란사건과 6·25 전쟁으로 조계산 일대에 무장공비들이 숨어들자 국군은 공비 토벌 작전으로 절 주변의 나무를 무차별 베어냈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에 처한 공비들은 송광사에 압력을 가했고 끝내는 1951년 5월 대웅전 등 절의 대부분을 불태워버렸다. 불에 탄 건물은 1955~1963년 사이에 다시 창건·중창했다. 그 후 현호 스님이 주지로 있을 때인 1983~1990년에 이르기까지 대웅보전, 지장전, 승보전 등 20여 동을 짓거나 옮겨 오늘에 이르렀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는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보 사찰 중 하나로 승보사찰(僧寶寺刹:훌륭한 스님을 가장 많이 배출해 얻어진 이름)이다. 불일암은 송광사의 16국사중 제7대 자정국사가 창건했다. 본래 이름은 자정암. 그 폐사 터에 1975 년 법정 스님이 중건하면서 불일암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후박나무 밑동에 눈길이 머무는 동안 스님의 유언 한 대목이 가물 거린다.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 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우라. 그리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 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후박나무 아래 뿌려 달라.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이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 사리도 찾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말라.”
차마 눈길을 오래 두고 있을 수가 없다. 스님이 손수 만든 나무 의자로 가본다.
나무 의자와 목탁
나무 의자는 스님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스님이 손수 만들고 함께 지낸 사이였으니 닮아도 많이 닮은 것 아닐까. 나도 시 한 편을 올린다.
법정 스님이 손수 짰다는 / 나무 의자 놓여 있다 / 한때는 함께 놀며 / 책을 읽고 밥을 먹던 / 행걸(行乞) 간 동무가 없어 / 의자는 심심하다
-김영재 시 <나무 의자>
나무 의자에 얽힌 일화가 또 있다. 작가 정찬주의 《소설 무소유》의 한 장면이다.
“스님, 무엇을 만드시려 합니까?”
“의자, 여기까지 올라온 손님들이 의자에 앉아서 조계산 자락이나 쳐다보고 가라고.”
“사람들이 없을 때는요.”
“그때는 내가 앉지.”
“스님도 안 계실 때는요.”
“이 산중에 떠도는 고독!”
(……)
“의자 이름은 지어둔 게 있어. 빠삐용 의자야, 빠삐용이 절해고도에 갇힌 건 인생을 낭비한 죄였거든. 이 의자에 앉아 나도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는 거야.”
-정찬주 《소설 무소유》 중에서
불일암의 대나무 사립문을 통과하면 묵언. 내 숨소리에 내가 놀랄 정도로 조심스럽다. 내 안으로 두근거리는 속가슴이 겁에 질려 뛰는 탓이리라. 나무 의자를 지켜보고 스님이 사용했던 목탁을 바라본다. 다실 입구 문 위의 나무판에 각인된 ‘살어리 / 살어리랏다 / 청산에 살어리랏다 / 멀위랑 다래랑 먹고 / 청산에 살어리랏다’ <청산별곡>을 음미하고 나면 내가 걸어온 삶이 몹시 초라하고 부끄러워진다.
오래전에 준비해둔 장작더미도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스님이 어느 글에서 밝혔듯이 장작을 준비하는 것은 나 자신이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뒷날 이 집에서 살 누군가를 위해서라니……. 개울물이 꽁꽁 얼어붙은 산속의 이 추운 겨울밤은 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고 저리다. 겨울 산행을 해보면 절감한다. 낮 시간에 아무리 칼바람이 분다 해도 두 뺨이 얼얼하고 몸속은 뜨거운 김이 난다. 험한 눈산을 걷고 걸어도 상쾌한 기운이 절로 솟는다. 그렇지만 밤이 되어 민박집에 묵으면서 검고 맑은 하늘의 주먹만 한 별을 보기 위해 문밖을 나오면 그 적막 속의 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추위에 온 세상이 얼어붙은 겨울밤에 읽으면 귀가 번쩍 열리는 스님의 산중 수행 한 토막을 선사한다.
내가 사는 곳에는 눈이 많이 쌓이면 짐승들이 먹이를 찾아서 내려 온다. 그래서 콩이나 빵 부스러기 같은 먹을 걸 놓아준다. 박새가 더러 오는데, 박새한테는 좁쌀이 필요하니까 장에서 사다 주고 있다.
고구마도 짐승들과 같이 먹는다. 나도 먹고 그놈들도 먹는다. 밤에잘 때는 이 아이들이 물 찾아 개울로 내려온다. 그래서 그 아이들을 위해서 해 질 녘에 도끼로 얼음을 깨고 물구멍을 만들어둔다. 물구 멍을 하나만 두면 얼어버리지만 숨구멍을 서너 군데 만들어놓으면 공기가 잘 통해 얼지 않는다. 그것도 굳이 말하자면 내게는 나눠 갖는 큰 기쁨이다. 나눔이란 누군가에게 끝없는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
-법정 스님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불일암을 뒤로하고 내려오는데 마음 한켠이 허허롭다. 바람이 나뭇가 지를 스치고 지나간다. 아무 거리낌이 없다. 송광사를 한 바퀴 돌고 다음 행선지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