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스크로 가는 기차
프리츠 오르트만 지음 | 최규석 그림 | 안병률 옮김 | 북인더갭 펴냄
80년대에서 90년대까지 대학가에서 알음알음으로 조용히 알려진 소설이다. 처음에는 독일어 교재에 실린 소설의 번역본이 사본 형태로 학생들 사이를 나돌면서 마니아층이 형성되었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이 마니아층에서 배출된 작가들이 여러 매체에 이 작품을 소개하여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MBC 베스트극장 <곰스크로 가는 기차>였다. <샴푸의 요정>의 황인뢰 PD가 연출한 이 단막극에서 시작된 대중적 관심은 이후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연극(2009) 등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 작품은 한번 읽으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스토리, 아름답고 이국적인 풍경 묘사, 극적인 캐릭터 등으로 빛나는 소설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빛나는 이 소설만의 장점은 우리 인생에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과 성찰일 것이다.
이 소설에서 곰스크로 가는 여행은 누구에게나 있는 인생의 진정한 목적지, 곧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여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 유토피아의 의미는 세상에는 ‘없는 땅’(U-Topia)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바로 이 소설의 강렬한 역설이 있다. 유토피아를 추구하면 할수록 실제 인생은 그곳에서 더욱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로 주인공의 삶이 그러하다. 작은 마을에서 정원이 딸린 집을 얻고 자신의 능력에 어울리는 선생직을 물려받았음에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곰스크로 가야 한다는 열망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인생을 살아온 마을의 늙은 선생님은 말한다. “당신은 이미 당신이 원한 삶을 살았다”고. 어쩌면 이 장면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유토피아의 진정한 의미가 밝혀지는지도 모른다. 곰스크는 현실에서 갈 수 없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바로 지금까지 일궈온 당신의 영역(You-Topia)이라는 진실이.
내가 이 소설집에서 ‘곰스크로 가는 기차’ 다음으로 좋아하는 작품은 ‘배는 북서쪽으로’다. 어두운 바다를 항해하는 배 한 척.
처음에 배는 평범한 여객선이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유령선처럼 변한다. 그러니까 배는 목적지를 상실한 이 세계의 함축일 것이 다. 그 밖에도 <철학자와 일곱 곡의 모차르트 변주곡> <양귀비> <럼주차> 등과 같은 아름다운 작품들에서 저자는 인간은 늘 진정한 목표를 찾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하고 싶어 한다.
이 작품집의 가장 큰 매력은 여러가지 해석과 상상을 가능케 하는 열린 구조에 있다. 처음 대학가에서 자발적으로 소개된 이후 2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입소문을 타고 있는 이유도 아마 이 작품집이 우리 인생에 던지는 지속적인 질문 덕분일 것이다.
특히 이 작품집은 《습지생태보고서》의 작가 최규석이 삽화와 표지 그림을 더해 작품의 품격과 아름다움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저자 프리츠 오르트만(Fritz Ohrtmann)
프랑스에서 전쟁 포로가 되었으며, 전후에는 나치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피신한 에리히 프리트(Erich Fried) 등의 작가들과 교류했다. 이들이 편집한 잡지 <메르쿠어(Merkur)>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고향 킬로 돌아와 박사학위를 받은 후,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작품을 쓰다가 1995년 사망했다. 작품으로는 소설집 《럼주차(Tee mit Rum)》, 장편 《여러 색깔 유리잔(Bunte Glaser)》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