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전략) 어느 날 어디로 가는 길인지 일본인 관광객이 한 떼, 여자 안내원의 뒤를 따라 이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 안내원 여자는 관광객들 사이를 바느질하듯 누비며 소곤소곤 속삭였다.
“아노-미나사마, 고치라 아타리카라 스리니 고주이 나사이 마세(저 여러분, 이 근처부터 소매치기에 주의하십시오).”
처음엔 나는 왜 내가 그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하고 무척 무안 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차츰 몸이 더워 오면서 어떤 느낌이 왔다. 아아,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 느낌은 고통스럽게 왔다. (단편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중에서)
첫 창작집, 베스트셀러 목록에 곧 이름 올려
1976년 2월 5일에 펴낸 첫 창작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일지사)는 곧 베스트셀러 목록에 책 제목을 올렸다. 흥미삼아 당시 중앙도서전시관과 종로서적이 공동으로 집계해 발표한 1976년 4월 마지막 주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펴보면….
*소설-국내 ①탈(황순원) ②강(서정인) ③부끄러움을 가르 칩니다(박완서) ④찬란한 대낮(최정희) ⑤겨울여자(조해일) / 해외 ①자기 앞의 생(에밀 아자르) ②뻐꾸기 둥지 위를 날다(켄 케지) ③쥐덫(아가타 크리스티) ④위기의 여자(보바르) ⑤천국의 열쇠(A. J. 크로닌) 황순원, 최정희, 조해일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신예 작가 박완서의 첫 창작집은 그가 1970년 문단에 처음 나온 이래 틈틈이 발표했던 작품들을 묶은 것으로, 표제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를 비롯, <어떤 나들이> <맏사위> <어느 시시한 사내 이야기> <도둑맞은 가난> 등 19편의 작품들을 싣고 있다.
“제가 좋아하는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이 1월22일 작고하셨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1976년 발간된 첫 창작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를 통해서입니다. 한창 문학에 심취했던 스무 살 청년 때였으니 벌써 3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군요.”
곽숙철 CnE혁신연구소 소장은 선생의 별세 소식이 있자마자 5,000명가량의 커뮤니티를 가진 자신의 블로그(http://ksc12545.blog.me)를 통해 이같이 밝히면서 그와의 영원한 이별을 애도했다.
이렇듯 그의 첫 창작집《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당시 문청(文靑)들뿐 아니라 많은 일반 독자들에게도 작가 박완서의 이름 석 자를 기억 속에 강렬히 각인시킨 ‘최초’였고, 이후 35년 동안 펼쳐진 박완서 작품 활동의 소중한 마중물이었다.
1970년도 여성동아 장편 공모로 문단에 첫 발
“6.25전쟁 통에 오빠와 삼촌을 잃고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을 때, 그걸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언젠가는 저자들을 악인(惡人)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이 지나도록 증오와 복수심만으로는 소설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나목》으로 나이 마흔에 등단해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지요.”
박완서 선생의 생전 회고담 중 한 토막으로, 그는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우리 나이 마흔 살에 늦깎이로 등단했다. 여성동아 여류장편소설 공모작에 《나목(裸木)》이 당선되면서였다.
장편 《나목》은 화가 박수근을 모델로 쓴 작품이다. 그와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한때 미군부대 PX 초상화부에서 함께 일했던 적이 있었다. 작품 속의 주인공 이경은 박완서 자신이었고, 화가 옥희도는 ‘전란 중에도 여전히 자기 세계만을 집착하는 화가’ 박수근이었다.
“훗날 박수근 선생의 그림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난, 이 사실을 그가 작고한 지 몇 년 만에 열린 유작전을 보고야 알았다. 그가, 대단한 화가로 평가받는 게 너무 기뻤다. 그러나 그의 생전의 가난이 억울했다. 또한 절박했던 한 예술가의 생애가 너무 슬펐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살았는 가를 말하고 싶었다.”
1953년 스물 셋에 결혼해 20대와 30대를 보내는 동안 오롯이 1남 4녀의 자녀 양육과 남편 내조에만 충실 하던 그녀가 마침내 세상 밖으로 외출하는 순간은 그렇게 열렸다. 유고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현대 문학, 2010)에서 밝혔듯 ‘(6.25 한국 전쟁으로 대학 1년생이던)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자신의 영혼이 어느 정도 위무되는 시기였다.
▲1931년 개성에서 태어남. ▲네살 되던 해 아버지 돌아가심. 어머니가 오빠만 데리고 서울로 떠남. 조부 모와 숙부모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냄 ▲여덟 살 때 서울로 이사해 매동 국민학교에 입학 ▲숙명여고에 다니며 교사였던 소설가 박노갑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음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6.25가 일어나 학교를 다닌 기간은 얼마 되지 않음.
6.25전쟁은 그의 화려한 이력서를 한동안 멈춰 세웠다. 그리고 그 짧은 공백기 동안 전쟁은 오빠와 숙부를 앗아갔다. 하지만 그의 문학적 열망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러한 전쟁의 비극으로부터 더욱 깊어졌고, 그 입문적 결실은 마침내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들어갔던 미군부대 PX 점원의 경험에서 잉태 된다.
200여 권의 작품 발표한 문단 활동 40년
“일찍이 이 시대의 ‘나목’이 되어 / 문학의 언어로 위안과 행복의 열매를 나누어 주셨는데 / 이제 또 어디 가서 한 그루 ‘나 목’으로 서 계시려고 하십니까 (…) 선생님께서는 영원히 불혹의 작가이십니다 / 아직도 쓰셔야 할 소설이 흰 눈 속에 피어날 동백처럼 숨죽이고 있습니다 / 못 가본 길이 그토록 아름다우십니까 / 좀 늦게 가보시면 아니 되옵니까”
정호승 시인은 1월25일 10시 경기도 구리시 토평동 성당 에서 있었던 선생의 장례미사에서 조시(弔詩) <선생님 ‘나목’ 으로 서 계시지 말고 돌아오소서>를 통해 이같이 애도했다.
그가 조시에서 언급한 《나목》과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사이에는 40년 문단 활동을 통해 발표했던 200여 권의 작품 목록이 빼곡하다.
우선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소설로 형상화한 작품들로는 《엄마의 말뚝》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이 독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고,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청년》 등을 통해서는 197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 등장한 세속적 탐욕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는가 하면, 《그 가을의 사흘 동안》 《서 있는 여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등의 작품들을 통해서는 남성중심주의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려냈다.
또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같은 동화집을 펴냈는가 하면 《한 말씀만 하소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나는 왜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등의 산문집은 현대 사회의 지친 영혼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기도 했다.
‘작품집을 하나 갖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일찍 갖고 싶진 않았다. 먼 훗날, 그러니까 한 20년 후쯤, 그동안 써온 것을 모아놓고 보면 간혹 꿰어보고 싶은 주옥도 있으리라. 내 딴엔 주옥처럼 아끼고 싶은 것만 골라내어 하나의 아름다운 책을 꾸미리라. 그렇게 생각했었다 (1976년 1월 저자)’ ‘그해 2월’에 펴냈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의 후기를 통해 선생은 첫 창작집을 펴내는 것에 대한 설렘과 쑥스러움을 이렇듯 적당히 버무렸다. 그로부터 35년. 1970년 가을 《나목》으로부터 시작한 그의 창작 활동은 2011년 겨울 문단의 거목이 되어 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