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피시》 《바닷마을 다이어리》 등으로 국내 독자에게도 친숙한 만화가 요시다 아키미의 만화로, 작가의 초기작에 속한다. 1983년 제29회 ‘쇼가쿠칸만화상’을 수상하면서 일본에서는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될 만큼 인기를 끌기도 했다. 요시다 아키미의 작품은 아름답고 소박하거나, 극단적으로 치닫는 비극이라는 두 가지로 대비되는데, 책은 후자에 속한다. ‘젊은날의 백일몽과도 같은 환상기담’이라는 부제처럼 환상적 요소 또한 포함되어 있다.
천녀의 전설을 지닌 ‘카노’가(家)의 사요코와 이 가문의 재산을 노리는 ‘토노’가(家)의 ‘아키라’, 그리고 ‘료’가 중심인물이다. 인도 신화에서 유래된 ‘길상천녀’는 불교에 수용되면서 공양을 하면 중생에게 복덕을 가져다주는 전설의 여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설 속에서는 천녀가 지상으로 내려와 신관의 아들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 이와 달리 작품 속에서 사요코는 빼어난 미모를 지닌 절세미인으로, 지상에 얽매인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남자들을 살해하는 잔혹한 인물로 그려진다.
사요코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불가사의한 능력이 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자신을 범하는 상상을 하는 남자들에게 크나큰 반감과 적대심을 품게 된다. 그녀의 재산뿐만 아니라 육체마저 탐하려는 아키라, 재산에 대한 욕망은 없지만 그녀의 매력에 이끌린 료…. 두 인물은 결국 사요코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릇된 남성성에 의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있는 사요코의 내면이 잔혹한 살인 사건과 대비되면서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묘한 여운을 남긴다. 기본적인 스토리는 선과 악, 인과율이라는 통속적인 구도를 따라 가고 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대립에 머무르지 않고 작가의 주 장르인 순정만화의 감성을 아우르고 있다. ‘천녀 전설’이라는 고전적인 배경을 현대 학원물로 재해석했다는 점, ‘사랑과 욕망’이라는 묵직한 주제 외에도 상처 입은 청춘들의 성장통을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작품은 첫 출간 당시 ‘천녀 전설을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 접목해 인간의 탐욕과 욕망, 선과 악을 날카롭게 해부한 작품’으로, ‘여성에 대한 남성의 그릇된 시각을 잘 묘사한 작품’으로 평가 받았다. 2017년의 독자들에게는 어떤 정서적 울림을 줄 수 있을까.
‘무섭고, 통쾌하고, 슬픈 작품’, ‘우연히 발견해서, 정신없이 읽은 만화’, ‘새해 지른 첫 책’이라는 네티즌들의 평이 있었다. 그러나 ‘남녀의 2분법적 대립구도’가 진부하다거나, ‘요시다 아키미 작품 중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이라는 평도 있다. 발표 후 20년이라는 세월의 더께가 현재의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잃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평 또한 작가가 써온 작품들처럼 극적으로 엇갈리고 있는 것은 아닐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스케일을 보여준 작가의 《바나나 피시》나, 휴먼 드라마적 감성을 보여주었던 전작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작품의 고전적인 설정과 30년 전의 그림체가 매우 생소하게 느껴졌을 터. 하지만 작가 특유의 빠른 스토리 전개와 호소력 있는 메시지는 지금의 독자들까지도 수용하는 간과할 수 없는 매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