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맘 먹고 고전을 읽을라치면, 지레 한 수 접고 들어가는 면이 있다. 이름난 학자들의 해석을 넘어서 작품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 다. 이래서는 작품을 흥미롭게 읽을 수 없다. 남이 이미 다 말해 놓은 것을 확인 하기 위해 책 읽는 것이 얼마나 큰 고역인지 짐작할 만하다. 그렇다고, 독창적으로 읽자니, 자신이 서지 않을 수도 있다. 정답만 고르는 능력을 신물 나게 키워 온지라 오독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서이리라.
그렇지만, 교양으로 읽는 작품인데 설혹 오독하면 어떠냐, 하는 배포가 필요 하다. 중요한 것은 충분한 근거를 들어 자신만의 해석을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남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가느니, 나만의 발자국을 남기는 게 훨씬 낫다.
그런 걸음이 쌓이다보면, 전문가 못지않은 해석 능력을 갖추게 될 터. 물리겠지 만, ‘천리 길도 한 걸음씩 걸어서 가 닿는다’는 속담은 이럴 때 제격이다.
남한테만 강조할 일이 아니라, 나도 한번 해보기로 했다. 잘나서 시범을 보이 겠다는 욕심은 조금도 없다. 다른 무엇보다 아류가 되기 싫어하는 성미인데다, 이런 식이 아니고서는 고전을 읽을 이유를 찾기 어려워서다. 이번에 택한 작품은 그 유명한 《햄릿》. 이름난 학자들이 온갖 화려한 이론으로 작품을 치밀하게 분석해 끼어들 틈이 조금도 없어 보인다. 반복하는 말이지만, 그러니 도전해볼 만하다 여긴 것이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가장 길다. 거기다 상당 부분이 햄릿의 대사로 채워져 있다. 이러다보니, 다른 인물들에 관심을 기울일 틈이 없다. 햄릿이야 말로 얼마나 문제적인 인물이던가. 여기에만 초점을 맞춰도 이 작품의 주제나 상징성 따위를 읽어내기 벅찰 수밖에 없다. 널리 알려진 것이 그가 내뱉은 말, 그러니까 “죽느냐 사느냐”로 상징되는 유약하고 고뇌 하는 인물형으로 햄릿을 돋을새김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유의 해석에 저항감이 든다. 정말, 다르게 읽고 싶은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을 보더라도 유령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이는 셰익스피어가 주술의 세계에서 합리성의 세계로 넘어오는 시대에 놓여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여전히 주술성이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대에 유령이 한 말은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유령의 말을 무조건 믿을 수는 없다. 합리성의 세계에도 한발 들여놓은 햄릿의 처지에서 보자면, 그것은 악마의 계략일 수도 있다. 확인 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래서 극중극을 꾸몄던 것이리라.
더욱이 주술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햄릿이 기도하는 클로디어스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령으로 나타난 아버지가 한스러워 한 것 가운데 하나가 죄를 회개할 시간 없이 갑자기 죽은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반대의 경우다. 원수가 구원받을 기회를 줄 수는 없다. 문제는 과연 클로 디어스가 기도하고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지문을 보면 분명히 무릎을 꿇고 있었으 나, 죄에 대한 중압감 때문에 제대로 기도 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사가 나온다. 죽이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 문제일 수 있다. 햄릿은 ‘헛똑똑이’였다.
작품을 읽으면서 이런 상상을 해보았다.
내가 만약 작가라면, 말많은 햄릿을 통해서만 작품의 주제 의식을 담으려 하지는 않겠다 싶었다. 그러면 너무 쉬워지지 않겠는가. 극히 비중이 적은 인물을 통해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을 전달할 수도 있을 터. 그래서 찾아보 니, 노르웨이의 왕자 포틴브라스가 눈에 띄었다. 이 인물은 《햄릿》의 앞부분에서 언급된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덴마크 왕에게 도전장을 냈던 것이다.
특사가 파견되고, 덴마크 왕에 대한 무력 시위를 접고 대신 폴란드를 공격하기로 했다.
《햄릿》은 따지고 보면, 궁중 암투극이다. 권력을 둘러 싸고 빚어진 전형적인 비극을 다루는 셈이다. 그래서 작품 말미에 보면 주요 인물들이 다 죽어가는 것으로 나온 다. 형을 죽이고 왕좌에 오른 클로디어스가 계략을 짰다. 그 결과 가장 먼저 왕비가 독이 든 포도주를 마시고 죽어간다. 햄릿과 레어토스는 독이 든 칼로 상대방에게 상해를 입혔다. 이 사실이 폭로되면서 햄릿이 클로디어 스를 죽인다(드디어, 복수를 한 것이다!). 보석과 비단으로 치장되었을 궁정의 한 장소가 유혈이 낭자하고 시신이 뒹구는 장면으로 뒤덮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과연 누구에게 권력이 넘어갈 것인가. 그 답을 햄릿이 알고 있었다. 햄릿이 차기 왕으로 지목하는 이가 바로 포틴브라스다.
햄릿은 궁극에 왕위를 되찾아야 했다. 복수는 한 과정일 뿐이다. 그런데 복수는 하지만 죽음으로써 왕의 자리 에는 못 올랐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면, 햄릿의 포틴브라스 인물평을 꼼꼼하게 분석해야 한다. 자기 에게 부족한 부분을 외려 충만하게 확보한 사람을 칭찬 하게 마련이다. 햄릿은 말한다.
“섬세하고 젊은 왕자가 이끌고 있는데,/ 그의 영혼은 신성한 야망에 고취되어/예견할 수 없는 결과 따위야 경멸해버리고,/드 러내 버린다. 필멸 인간적이고 불확실한 것을,/운명, 죽음, 그리고 위험이 감행하는 일체에 맞서서,/심지어 계란 껍질 한 개 때문 에라도. 맞아, 위대하다는 것은/위대한 명분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지푸 라기 하나를 놓고도 위대하게 싸우는 거다, 명예가 걸려 있다면.”
이 구절을 읽으면 햄릿에게 결여되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는 위대하게 싸울 줄 몰랐던 것이다.
결국, 권력은 그럴 줄 아는 사람이 장악하는 법. 그렇다 면, 햄릿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 크게 어긋나지 않으면 서도, 새롭게 이 작품을 보는 작은 길이 열렸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오독인지 몰라 불안하다고? 시쳇말로, 왜 그러시나 아마추어처럼. 그럴 때는 이렇게 ‘방백’하면 된다. “아니면, 말고!”
이권우
196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주로 책과 관련한 일을 하다, <출판저널> 편집장을 끝으로 직장 생활을 마감했다. 책만 읽고 싶어 스스로 ‘도서평론가’라 칭하며 책 읽고, 글 쓰는 재미로 살고 있다.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책과 더불어 배우며 살아가다》,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등을 펴냈다. 안양대학교 교양학부 강의교수로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