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위한 혁명, 혁명을 위한 인간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옌롄커 지음 | 김태성 옮김|웅진지식하우스 펴냄)
1944년 7월 중국 산베이 안차이현의 목탄 탄광에서 갱도가 무너지면서 중국 공산당 전사 장쓰더가 사망했다. 그는 33년 홍군의 장정 에도 참가했던 인물로서 마오쩌둥의 내위반에서 경비임무를 맡았던 경력의 소유자였다.
마오는 장쓰더의 사망 후 한 연설을 통해 그의 죽음을 “태산보다도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아울러 “지금 중국의 인민이 수난을 당하고 있는 만큼 그들을 구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며 “우리는 이를 위해 분투하고 있고 이러한 분투에는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말했 다. 이 연설의 제목이 바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이다.
그의 연설 이후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이 한마디는 그야말로 마오쩌둥 사상, 혁명정신의 상징이 되었고, 무소불위의 금언이 되었 다. 중국 혁명의 아버지 마오쩌둥 사상의 대명사로 각인된 것이다. 동명의 이 소설이 중국 내에서 금서조치 당하고 이미 출간된 3만 여권이 모조리 회수된 것은 그만큼 소설이 담고 있는 내용이 급진적이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의 시선으로는 책이 금서조치 당한 이유가 따로 있어 보였다. 중국 당국의 입장에서는 마오쩌둥을 적나라하게 모독하는 장면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울러 위대한 혁명군대 내에서 상사의 부인과의 불륜, 노골적인 성애의 표현들이 불편했을 것이다. 분명 이는 중국 공산당이 아직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외적인 이유일 뿐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비단 나뿐 만은 아닐 듯하다.
어찌 보면 지극히 뻔한 불륜을 담고 있는 이 책이 그토록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중국이 그동안 강요해왔던 ‘혁명을 위한 인간’에서 ‘인 간을 위한 혁명’으로의 변화가 책에서 감지되기 때문 아닐까.
중국뿐 아니라 어느 시기 어떤 국가, 집단도 마찬가지였지만, 인간의 정신을 통제하고 집단화하려는 시도는 커다란 고통과 트라우마를 남겼다. 한때 중국은 부부 간의 성행위까지 집단적으로 통제하려 했고, 현재도 일부분 그렇다. 셋째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은 인민 모두의 권리가 아니다. 인민들은 혁명이라는 위대한 과업의 완성을 위해 소모되는 부품인 셈이다. 이는 자본주의 노동자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인간성을 말살시켜가며 이룩해야 할 거대한 과업은 무엇이며, 혁명의 완성은 무엇일까. 저자는 바로 그 점을 인민들에게, 그리고 당에게 물었던 것이다. 물론 당의 대답은 금서조치로 나타났지만.
마오쩌둥은 신과 같은 존재였다. 과거 북에서의 김일성 주석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신에 대해 철저한 모독과 조롱, 희화화를 통해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을 날 것 그대로, 아울러 너무나 현란한 수사와 시적인 이미지를 통해 보여준 책은 범상치 않다. 과연 누구를 위한 혁명이었으며, 혁명인가?
미국의 금융 위기 이후 세계를 구원할 유일한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는 국가,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궁극적 목표를 밝히지 않고 있는 국가. 자본주의의 모든 면을 갖추고 있으나 사회주의의 허물을 벗지 않으려는 국가. 아직 우리는 이 국가의 본색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그들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마오의 금언을 가슴에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의 금언은 이들에게 필요 없을 듯하다. 자본이라는, 전혀 다른 욕망을 이미 맛보았기 때문에….
염규현
필명 간서치(看書癡). 책만 보는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천지간의 좀 벌레’ 한 마리? http://blog.daum.net/meki77
먼로는 죽음을 부르는 손을 잡은 걸까?
마릴린, 그녀의 마지막 정신상담
(미셸 슈나이더 지음 | 아고라 펴냄)
우연히 정독 도서관에서 발견하여 읽었다. 정신상담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어 뽑아본 것인데, 저자가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를 썼던 작가이고, 랠프 그린슨과 먼로 사이에 있었던 정신분석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는 안 읽을 수 없었다. 지금도 정신분석의 가장 중요한 실천적 입문서로 읽히고 있는 《The technique and practice of psychoanalysis》-우리나라에서는 《정통 정신분석의 기법과 실제》 로 번역되었다-를 쓴 저명한 분석가와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섹시 아이콘과의 아직도 많은 것들이 비밀로 묻혀 있는 만남이라. 이보다 좋은 소설의 소재가 어디에 있으랴.
마릴린 먼로는 1962년 8월 4일 서른 여섯의 나이로 죽었다. 죽은 그녀를 처음 발견했던 것은 그린슨이 마릴린을 돕도록 고용한 가정부 였고, 그 현장에 그린슨이 가장 먼저 도착하였다. 자살로 알려져 있으나 아직 수많은 의혹들이 남아 있는 그 죽음에 대해서 그린슨은 죽을 때까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린슨은 마릴린이 죽기 2년 반 전에 만나 지속적으로 분석을 하였고, 분석의 초반부터 마릴 린을 자신의 가족에게 소개시키고, 집에서 자고 가게 했던 적도 많았다. 마릴린이 죽기 전 마지막 35일 중에 27일을 만났고, 죽기 전날 에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 분석 시간을 가졌다. 그린슨은 심지어 그녀의 촬영 스케줄을 관리했고, 촬영 현장에 같이 나타나 대사를 상의하고 출연료를 협상했다. 마릴린이 죽은 후 “박사님께 그녀는 어떤 존재였지요?”라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린슨은 “그녀는 나의 아이, 나의 고통, 나의 누이, 나의 정신착란이었지.”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수염을 기르기 시작하고, 강연과 환자와의 상담 시간을 줄이 고, 책을 쓰기 시작한다.
지금의 기준으로 볼 때 마릴린은 전형적인 ‘경계선’ 인격장애로 보인다. 충동적이었고, 스스로 평온하게 존재할 수 있는 안정적인 자기 (self)가 부재하였기에 타인의 관심이 없으면 견디지 못했고, 20대 전부터 다양한 약물에 중독되어 있었고, 수차례의 자살 시도 과거력이 있고, 다양한 정도의 ‘이인감(depersonalization)’을 지속적으로 경험했고, 기분의 변화가 심했고, 컨디션이 나빠질 때는 정신병 적인 수준의 편집증과 피해망상이 간헐적으로 출몰했던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내면에서 기댈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기에 하루 종일 거울을 들여다보았고 사진을 찍힐 때에만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느꼈다.
이러한 인격장애의 분석적 치료에 대한 방법론적 성찰이 거의 전무했고, 공통된 기준도 없었고, 이론적 이해도 거의 발달하지 못했던 60년대 초반에 살았던 그린슨을, 지금의 경험과 지식과 기준을 가지고 비판할 수 있을까. 분명, 그린슨을 과도한 ‘역전이’를 조절하지 못하고 행동화하면서 치료경계를 흐트렸다고, 결과적으로 마릴린의 허약한 경계를 침범하면서 치료적으로 악영향을 미쳤다고, 그러니 마릴린의 죽음에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 일일 터. 그러나, 그 시대 그 상황에서 그린슨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마릴린의 이전 세 명의 분석가가 그랬듯이 모르쇠하면서 발을 빼고 환자를 다른 분석가에게 넘기거나, 아니면 악몽 같은 전이와 역전이의, 실제적인 사랑과 증오, 내사와 투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어이 버텨가든가 둘 중 하나였을 것이고, 그린슨은 두 번째를 선택 했다. 결과적으로 치료는 실패하였으나, 나는 다른 어떤 방법의 치료가 성공적일 수 있었을지 상상할 수 없다.
김건종
필명 트리스테로. 존 버거의 “우리네 삶 속으로 스며드는 生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는 문장을 좋아합니다. 책 한 권 한 권이 또, 이 生들일 테지요.
http://blog.naver.com/sunjae17
지구형 인간이 무어냐고요?
지구형 인간
(브렌지엔 데이비스, 캐서린 로스 지음 | 갤리온 펴냄)
‘지루한 환경책은 가라~ 당신을 추켜 세우는 겸손한 구애작전, 에코 라이프의 청혼!’ 뭐 이런 촌스런 홍보성 띠지를 매주고 싶은 《지구형 인간》. 물론 진정한 환경책이라 띠지 같은 건 진작에 달지 않았지만(서평전문 잡지 <라이브러리&리브로>에서는 ‘띠지 추방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잡다한 친환경 소스가 범벅된, 애초 거의 진지하지 않기로 작정한 이 책은 에코 라이프를 ‘즐길 수’ 있게 해준다. 공자 가라사대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고 했거늘 우리의 환경주의자들은 좋아하는 것보다 하수인 아는 것으로 환경을 수호하려해 왔다. 이제 방향을 선회할 때다. 대마포 옷을 입고 직원 휴게실 같은 데서 생태교육을 해봤자 반발심만 키운다. 친환경적인 의류산업을 꿈꾸는 미국의 한 모델은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최신 유행의 옷과 구두를 고집하기도 한다는데, 심각하고 경직된 환경주의 이론은 잠시 뭍어 두자. 그보다는 짧은 시간 소화하기 좋은 친환경 주장법을 익혀보자.
나 혼자 세제 좀 아껴 쓴다고 무릉도원에 살게 될 일이 아니라면, 야금야금 주변의 반환경적인 처사에 스며들어 물고기 한 마리라도더 살려보겠다는 의지로 전도(?)할 필요가 있다. 미션이 부담스럽다면 필자의 말일랑 집어치우고 중량도 가벼운 《지구형 인간》 한 쪽만 들여다보자. 불끈불끈 친환경 아이디어가 샘솟아 즐거워진다. 이 정도쯤이야부터, 고난이도 에코라이프까지 실천 범위를 제시해주니 더 이상 반환경적인 삶을 자책할 것 없다.
자동차 시동, 형광등, 컴퓨터 전원은 웬만하면 꺼두고 가끔 헌옷 쇼핑이나 플라스틱 생수통 한 번 더 쓰기로 에코라이프의 기반을 다져보자. 재미있는 환경정보들은 가볍게 주변의 관심을 끌기에도 충분하다. 전자파로 악명 높은 전자레인지의 우월적 실체와 드럼 세탁기와 식기 세척기의 친환경적 면모를 발견한다. 천기저귀와 종이기저귀, 종이봉투와 비닐봉지, 샤워와 목욕 등, 어느 쪽이 더 환경에 해로우냐 하는 해묵은 논란에 대한 답도 속 시원하다. 사실 훨씬 중요한 문제는 교통, 가정용 에너지 효율, 식량 소비와 관련 있으므로 비닐봉지를 보고 한탄할 건 없다.
자동차 업계, 식음료 업계, 의류 산업, 친환경 기업 펀드 등, 모두 의심할 것 없이 에코라이프의 전성시대를 꿈꾸고 있는데, 어째서 산은 계속 깎이고 물은 메꿔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무력한 개인일지라도 소비자로서, 무언가를 살 때마다 투표를 한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양심적인 사람들이 제대로 만들어 낸 음식을 사기만 해도 친환경적 시스템을 지지하는 것이다(《패스트푸드 제국》 저자 에릭 슐로서의 말이다).
실천도 하기 전에 지구를 지킬 수 있다는 우쭐함이 들게 만드는 부작용이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이다. 한없이 약해지는 인류의 엄마, 자연을 구할 길은 자식들 하나하나가 강해져서 엄마를 돌보는 것이다. 자연을 버리고 과연 어떤 인간이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괜한 억지까지 부리다니).
분명한 것은 우리가 쓰는 세상은 우리 아이들이 다시 써야 할 세상이라는 것. 깨끗한 지구와 친환경적 습관을 물려주는 ‘지구형 인간’에 도전해 봐야겠다. 부디 에코라이프를 은근히 뽐내고 ‘즐길 수’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기를.
박지선
필명 연필 한 다스. 반찬 솜씨보다 글 솜씨가 나은 아줌마, 시장보다 도서관에 자주 가는 여자. 읽지 않으면 쓰고 있는, 못 말리는 독서가.
http://motherstory.tistory.com
근본적인 삶의 문제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 문예출판사 펴냄)
이 소설은 나이 어린 소녀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성숙해 나가는 일종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백인의 흑인에 대한 편견, 차별, 그로 인한 흑백 갈등을 둘러싼 인종 문제가 주축을 이루며 더 나아가서는 무시당 하고 차별당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모든 어른들의 선입견, 편견을 향한 아이들의 조용한 외침이다.
여섯 살 소녀 스카웃과 오빠가 성장하면서 겪는 고통과 좌절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관용들을 하나씩 배워가며 정신적으로 성숙해가는 이야기들이 가슴 훈훈하게 다가오며, 그들의 아빠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교육은 품위 있고 설득력이 넘친다. 중반부로 넘어가며 억울하게 누명을 쓴 흑인을 변호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재판.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흥미진진하고, 제발 흑인이여서 무조건 희생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읽어내려가게 되지만, 결국 흑인이기 때문에 받는 그 분노할 수밖에 없는 재판의 결과에는 기운이 다 쭈~~욱 빠져버린다.
사람이 사람을 이다지도 차별할 수 있는 것일까. 그때와는 다르게 이즈음에 와서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나라들에서 인종 차별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마도, 백인들이 사는 나라에 살고 있거나, 그런 나라를 여행했을 때 슬며시 감지되는 그 차별의 눈초리를 경험했다면 씁쓸했던 기억을 잊지 못할 것이다. 혹은 그 큰 키에 하얀 피부, 인형 같은 눈, 하늘을 찌를 듯 높은 코에 누가 뭐라 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위축되기도 한다. 그런 거 경험 못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무지막지하게 무딘 사람일 테구….
그런 씁쓸한 경험 한두 번 하면서는 절대 인종 차별만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 와 있는 베트남 여인들이나, 여타 동양 여인네들을 보면 ‘이건 아닌데, 이렇게 단일 민족이 다문화 사회가 되면 안 될 텐데, 정말 안 되는데’, 하는 심정이 되면서 그들을 보는 시선이 곱질 않음은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소녀의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엽총을 사주면서 어치새 같은 다른 새를 죽이는 것은 몰라도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고 말한다. 다른 새들과 달리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기만 할 뿐, 곡식을 먹거나 창고에 둥지를 트는 등인간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들의 편견이나 아집 때문에 고통을 받고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강한 메시지다.
그러므로 이 책을 통해 나는 과연 남에 대한 배려와 관용이 있는지, 편견이나 선입견은 진정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한 번쯤 스스로를 돌아볼 일이다. 또한 이 땅의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소중하고 그 모든 생명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 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야 하는 거야. 말하자면 그 사람 몸속으로 들어가 그사람이 되어서 같이 다니는 거야. 우리가 궁극적으로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멋지단다.”
유은숙
필명 파파야. 삶이 한 편의 동화라면…. 인생이라는 여행길에 진정한 멘토가 되어주는 책이 있어 행복한 사람입니다.
http://blog.naver.com/papaya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