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 ‘포틀래치’ ‘불가능한 교환’ 개념을 묶어서…?
암호
(장 보드리야르 지음|배영달 옮김|동문선 펴냄)
모스-바타이유-보드리야르의 사유를 정리해보자. 모스는 포틀래치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모든 집단 속에서 그 문명의 경제와 문화에 인정과 열정을 나아가 심지어 어떤 합리적 균형을 부여하는 낭비와 희생의 시스템에 대해서 최초로 언급한다. 바타이유는 이를 일종의 의사(擬似) 우주론에 접목하면서, 근원적으로 남아도는 태양 에너지-이를 그는 ‘저주받은 몫’이라 부르는데-를 비합리적이고 낭비 적인 방식으로 소비하는 것이 시스템의 유지에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요소임을 강조한다. 바타이유의 시각으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는데, 자본주의가 축적해 놓은 에너지의 해소를 위한 적절한 시스템이 부재하였기에 서구 문명은 전쟁이라는 파괴적인 방법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리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바타이유가 이런 맥락에서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적어 놓자).
바타이유가 은근한 방식으로 비판했던 서구문명의 ‘합리성’을 그 극단까지 사유해나가는 인물이 바로 보드리야르. 경제적 측면에서는 화폐가, 문화적 측면에서는 디지털이 모든 사물을 교환가능한 동질성으로 추상해나가는 현대사회를 평생에 걸쳐 사유해온 보드리야 르는 말년에 이르러 ‘불가능한 교환’이라는 개념에 다다르는데, 이는 이 책의 표현으로 옮기면 “대상을 상품의 지위에서 벗어나게 하고, 대상에게 값을 매길 수 없는 직접성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돌려주려고 애쓰는 것이 문제이다. ... 가치의 체계와 그것이 확립하는 지배권을 뛰어넘을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이 존재한다”라는 것. 보드리야르는 직접 포틀래치라는 단어를 쓰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언제나 엄청난 포틀래치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 근본적 형태, 즉 철저한 형태는 언제나 도전, 한술 더 뜨기, 포틀래치의 형태, 따라서 가치 부정의 형태이다. 요컨대 가치 희생의 형태이다.” 그러나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보드리야르의 한계는 그가 이러한 결론의 지점에서 정확하게 멈추어버릴 뿐, 이를 현실화시킬 어떤 구체적인 가능성들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할 것.
1. 보드리야르가 불성실하거나 관념 놀음을 하고 있다는 것.
2. 보드리야르에게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사유 자체라는 것.
3.보드리야르의 추상성은 그의 불성실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철저한 성실함을 보여준다는 것, 즉 ‘실제로’ 이 시뮬라시옹을 돌파할 어떤 구체 적인 방법도 없다는 것.
어떤 구체성이 형성되자마자 이는 다시 추상화의 틀 속에 갇힐 것이기에. 실제로 현대 사회의 포틀래치의 가장 상징적인 현상이라고 할 ‘명품’ 열풍이, 저 비합리적 -합리적 소비자라는 주류경제학의 가장 근본적인 가정을 무너뜨리는- 소비의 방식이, 자본주의에 윤기와 활기를 더해주는 것 이상 그 어떤 의미도 생산하지 못하듯.
다시 한 번, 그렇다면 어쩔 것인가? 보드리야르처럼 사유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지젝처럼 다시 혁명을 외칠 것인가(지젝은 그가 전세계에서 팔아치운 책의 인세로 무얼 하시나)?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하여튼 확실한 것은, 그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이제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 위니캇과 호이징가의 놀이 개념과 모스의 포틀래치 개념, 그리고 보드리야르의 ‘불가능한 교환’ 개념을 같이 묶어, 이러한 시스템을 즐겁게 뒤흔들 수 있는 주체의 가능한 존재 양식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게내 막연한 지금의 물음.
김건종
필명 트리스테로. 존 버거의 “우리네 삶 속으로 스며드는 生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는 문장을 좋아합니다. 책 한 권 한 권이 또, 이 生들일 테지요.
http://blog.naver.com/sunjae17
진중권 울린 그림 12점 제멋대로 읽기
교수대 위의 까치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현장을 수색하고 시간을 되짚어보는 추리소설 같다고나 할까요. 진중권의 《교수대 위의 까치》는 흥미진진했습니다. 《미학 오디세이》 를 비롯해 전방위적 미학 저서들로 ‘그들의 미학’을 ‘우리의 미학’으로 끌어당긴 그가 난독의 작품들을 명쾌하게 풀이합니다. 미드 CSI 의 길 그리섬이나 영화 더티 해리의 해리처럼 오히려 꼬여버린 사건에서 발군의 빛을 발휘하려는 듯 작품들은 응큼하게 본성을 숨기고 있습니다. 솜씨를 뽐낼 작품들을 고른 데도 그 이유가 있겠지만요.
특히나 그림들은 저자의 말을 빌자면 ‘에니그마 같은’ 작품들의 집합이에요. 요즘은 별 생각 없이 ‘수수께끼’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원래 이 말은 ‘어둡게 말하기’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저자를 자극한다는 ‘어둡게 말하는’ 작품들은 정말 하나같이 채도부터 어둡습니다. 문제는 그 그림들이 품고 있는 검은 실체와 겹겹이 둘러싸인 해독하기 힘든 메시지들이에요.
이 책은 한마디로 ‘에니그마’적인 작품을 ‘푼크툼’ 하게 말하는 진중권표 미술 비평서입니다. 몹시나 지적이고 어려운 단어들로 기를 죽이나요. 아닙니다. 그는 절대 ‘우리의 미학’을 저버릴 리 없습니다. 좀 고급스런 어휘로 매우 적당한 표현을 골랐다고 보시면 됩니다.
비평서가 추리물처럼 궁금해지려면, 작품을 하나의 풀어야 할 사건으로, 즉 살아 있는 무엇으로 남겼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사실 고고한 작품에 따라붙는 몇 가지의 해석들로는 이미 작품의 ‘재창조’ 어려운 실정입니다. 언제부턴가 찾으려는 노력보다 누군가 읽어주는 데 길들여진 미술사. 티셔츠라도 뒤집듯 솔기까지 해부하는 작업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조금 있더랬어요. 그런데 오히려 ‘해석’ 을 전방위로 내세우고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들을 선호한다는, 저자가 드러낸 취향에 자신감이 불쑥 올라왔습니다.
마음속으로 그림을 느껴보자는 식의 의뭉스러움이 외려 지치게 하는지도 몰라요. 어차피 마음껏 찢어발겨도 작품은 결국 환영처럼 온전히 떠오르지 않던가요. 그처럼, 제멋대로 보기로 결심합니다. 물론 그의 ‘그멋대로’는 상당한 지식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림이란게 많이 알수록 많이 보이니까요. 그런데 어쩐지 적당히 아는 것보다 선입견 없이 그림을 보고 직관을 동원하는 편이 그림에 더 가까 워지는 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멋대로’ 고른 12개의 그림들에서는 이야기가 끝도 없이 삐져나옵니다. 평면의 그림이 팝업 같기도 하고 모자마술 같기도 합니다. 그는 정말 돋보기라도 들고 관찰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미술계의 관습이 되풀이하는 상징들을 속속 골라내 고, 혁신적인 시도들을 발견하여 추켜세웁니다. 그리고 하나의 그림을 읽기 위해 열 개의 그림을 동원합니다. 풍성하지만 메인에 집중 한다면 12개로도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그만의 ‘에니그마적’인 컬렉션은 음울하면서도 신선하고, 현대와의 대화를 통해 되살아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다만 소극적인 그림감 상에서 벗어나 작품에게 묻고 스스로 대답하라는 요구가 쉬울지는 두고볼 일입니다.
박지선
필명 연필 한 다스. 반찬 솜씨보다 글 솜씨가 나은 아줌마, 시장보다 도서관에 자주 가는 여자. 읽지 않으면 쓰고 있는, 못 말리는 독서가.
http://motherstory.tistory.com
참된 삶이란 과연 뭘까…
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 양병석 옮김 | 범우사 펴냄)
이 책이 쓰여진 것은 1800년대, 그렇지만 먼지가 뽀얗게 앉은 구닥다리일 거라는 생각은 던져버려도 좋다. 어쩌면 이토록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을까? 하긴 사람 사는 게 그때나 지금이나 거기서 거기인 건지도 모르겠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자연의 파괴가 더해만 가는 요즘에야말로 더욱 주목받아 마땅한 책이라 여겨진다. 소로우가 1845년 2개월간 월든 호숫가에 손수 오두막을 짓고 자연과 호흡하며 구도자적인 삶을 지향한 시기의 자전적인 기록. 단편적인 생활양식의 묘사가 아니라 철학, 자연 그리고 신과의 관계를 깊이 탐색한 철학적 사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호숫가에 들어가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고 해서 그가 도시적인 삶을 무조건 등지고 은자의 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참된 삶’을 찾아가는 구도적 순례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게다. 당시 사람들이 자연을 정복의 대상 으로만 보았을 때, 그는 자연 속에서 상징을 찾고 거기에 정신의 원천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라 하겠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절망적인 삶을 묵묵히 이어간다. ... 절망이란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연판처럼 박혀 있는 것이어서, 심지어 인간이 하는 경기나 오락의 밑바닥에까지 숨어 있다.” 그의 말처럼 사람의 일생이란 어떠한가. 돈을 벌기 위해, 그래서 좀 더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나중에 큰 병이라도 생기게 되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열심히 한편으론 고생스럽게 일을 한다. 그러나 갖은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현명한 왕으로 일컫는 솔로몬조차 ‘인생의 연수 70이고 강하면 80이지만 그 자랑이란 슬픔이요 괴로움뿐이다’라고 했으니, 돈도 명예도 사람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이다.
소로우는 원시적 삶이 아닌 ‘간소한 생활’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연 가운데는 불필요한 것이 없고 언제나 평온과 통일이 흐르고 있다. 이것과 비교할 때 인간의 생활 가운데는 불필요한 것이 많다. 자본주의라는 세상에 살면서 간소하게 혹은 단순하게 살기란 점점 더 어려워지기만 한다. 영원하고도 유일한 것을 추구하는 생활이 권력과 부와 향락을 추구하는 생활보다 올바른 것이라면 인간의 생활 가운데서 불필요한 것과 유해한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소로우는 하루의 시작인 아침을 자기 각성의 시간으로 중시하였고 순수의 시간으로 찬미한다. “아침은 자연 그 자체만큼 소박하고 순결하게 하라는 초대장과 같았다. 아침은 하루 중 가장 현저한 시간이요, 깨어 있는 시간이다.” 독서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독서를 잘하는 것, 즉 참다운 정신으로 참다운 책을 읽는 것은 고귀한 수련이다. ... 거의 전 생애에 걸쳐 꾸준한 자세로 독서하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주로 새벽 시간에 책 읽는 것을 즐기는 내게는 절묘하면서도 멋진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서 산 사람이 마냥 부럽다 해도 누구나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 꼭 그렇게 살아야 참된 삶을 산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있는 자리,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삶은 얼마든지 가능하리라 믿는다.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알고, 순수함을 잃지 말고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 각성,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진리에 대한 갈구는 분명 그런 삶을 선물해 줄 것이라 믿는다. 그의 충고는 결코 어렵지 않다. 어쩌면 참으로 평범하기까지 하다. “당신의 인생이 아무리 비천하더라도 마주 대하여 살라. 그것을 피하려 하거나 욕하지 말라. 당신이 처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나쁘지 않다. 가난하더라도 당신의 삶을 사랑하라. ”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본질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 내 삶에서 버려야 할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 고전의 향기가 듬뿍 담긴 이 아름다운 책이 훌훌 먼지를 털어내고 나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성, 큼, 성, 큼.
유은숙
필명 파파야. 삶이 한 편의 동화라면…. 인생이라는 여행길에 진정한 멘토가 되어주는 책이 있어 행복한 사람입니다. http://blog.naver.com/papaya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