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정승희>
내 안에 있는 아이의 그림자
동화작가 정승희(42), 아직 그 이름은 낯설다. 나이 마흔에 늦깎이 등단한 그녀는 작가로서의 늦은 출발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금 늦게 걸어갈 뿐이다. 지금도 동화작가라 불리는 게 조심스럽고 어색하다. 하지만 그녀는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작가다. 그녀의 내면 속엔 누구보다 강한 문학적 열정이 가득하다.
〈기다려, 엄마!〉로 새벗 문학상을 받은 그녀가 발표한 작품은 아직 많지 않다. 여러 작가들과 함께쓴 동화 모음집 《공주의 배냇저고리》(공저. 바람의 아이들), 인물 이야기 《손을 들면 흥이요, 발을 들면 멋이라》(우리교육), 올봄에 나온 단편 동화집 《알다가도 모를 일》(바람의아이들)이 있다.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낡은 창고
그녀는 순 서울 토박이. 그래선지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그녀에게 고향은 무엇일까. 고향 대신 ‘창고’가 있단다. 자신의 이야기 보따리는 그 낡은 창고 속에서 튀어나온다 고. 해가 질 때까지 놀다온 어린 그녀는 어두운 집안 분위기에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 형광 등을 쳐다보며 ‘저 형광등은 참 행복하겠다. 생각이 없는 무생물이니까’ 하고 생각했다.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만큼 생각이 깊고 조숙한 아이였다. 늘 호기심이 많아 질문 또한 많았다.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에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속마음으로 묻고 대답하곤 했다.
“어린 시절에 저는 착하고 모범적인 콤플렉스에 빠져서 생활한 것 같아요. 한 번도 부모님이나 선생님 말씀을 어겨본 적이 없었어요. 그렇게 제 마음을 나타내지 못하는 부분이 저를 내성적인 아이로 만든 것 같아요. 상처받은 제 마음을 제대로 표현해 본 적이 없었어요.”
초등학교 3, 4학년부터 명탐정 셜록 홈즈에 빠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친한 친구 집에 전집들이 천장까지 가득 차 있었 다. 친구네 집에 놀러갈 때마다 책들을 빌려서 읽었다.
아이들도 해방 공간이 필요해
“저희들이 어릴 적엔 물질적인 어려움이 많았잖아요. 하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도 표정은 어둡지 않았고, 자잘한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며 생활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물질적으로 풍족해도 얼굴 표정이 밝지 않아요. 오랫동안 아이들 글쓰기 지도를 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아이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가 있더라고요."
아이들은 작가와 친해지자 비밀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녀는 아이들과 소통하면서 깜짝 놀랐다. 어른들이 모르는 아이들만의 삶이, 희로애락이 많았다. 아이들에게도 숨통 트일 해방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요즘 애들은 잘 웃지 않아요. 자신을 감추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요. 저학년은 그래도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데, 고학년이 되면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지도 않아요. 아이들이 왜 웃지 않을 까? 왜 표정이 밝지 않을까? 애들과 자꾸 얘기하다 보니 마음 안에 어른이 모르는 상처와 외로움을 갖고 있었어요. 제 안에 숨어 있는 작은 아이의 그림자가 보였어요. 그런 상처받은 아이들을 위해 동화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화를 쓰면서 어릴 적 상처받은 제 모습을 만날 수있었죠.”
아이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그녀는 요즘 《사람을 위로하는 사진 이야기》(이요셉 작)란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 그 책의 글과 사진을 보노라면 사람에 대한 사랑법이 가슴에 와 닿는다고 한다. 그녀에겐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도 많다.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도 참 많다. 아이들 세계에도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까. 아이들에게 ‘죽음’을 어떻게 얘기해줄까. 아이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아이들 마음을 손바닥 보듯 훤하게 읽는 그녀, 아이들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흐르는 그녀. 그녀의 글은 아이들 마음이 잡힐 듯 생생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동심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녀의 마음 한구석엔 어린 그녀가 늘상 살고 있는 모양이다. 아이들의 아픔이나 상처를 그대로 고스란히 느끼는 만큼, 자신이 쓴 글이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올해 펴낸 《알다가도 모를 일》엔 저학년용 동화가 다섯 편 실렸다. 밝고 신나는 모습만 아니라 아이들이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과 갈등도 담겼다. 어둡고 끝없는 길을 아이들이 걸어간다. 작가 자신의 모습이 작품 속 한 귀퉁이에 슬며시 숨어 있다. 어린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밝고 명랑한 아이가 아닌 어둡고 힘겨운 어린 그녀. 이 작품집은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아이들 이야기를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 원회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녀는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단숨에 단편을 써내는 편. 그래서일까, 스스로 호흡이 짧다고 느껴왔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장편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 두 편을 마치고 또 다른 작품을 구상 중이다.
강벼리(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