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남들보다 조금 일찍 첫사랑을 시작했다.
학교로 처음 부임한 기술선생님은 내 이상형에 자상함까지 갖춘 사람이었고,
그렇게 순수한 중학생은 첫사랑에 빠져버렸다.
누군가를 처음 좋아하고 설레는 감정이 너무 신기해,
훗날 어른이 되면 이 이야기를 한 편의 소설로 만들어야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그때를 회상한다 할지 언정, 이야기로 풀어쓰는 건 쉽지 않았다.
로맨스 소설의 해피엔딩은 현실 속엔 없었고,
설렘의 감정을 글로 표현하기엔 오랜 시간이 지나 버렸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논픽션'의 장벽을 깨고
소설로 풀어낸 작가가 있었으니, <플레이 보이>의 작가 한비주.
여행 중 묵었던 숙소에서 남자주인공의 이름을 생각하고,
현실에서 봐왔던 화류계라는 쉽지 않은 소재를 소설 속에서 자유롭게 풀어쓰는
알면 알 수록 매력적인 그녀를 만나보자.
- 글의 소재는 어디서 생각하고 앞으로 쓰고 싶은 글이 어떻게 되는 지 궁금하네요.
소재는 늘 여러 곳에서 영감을 받고 떠올리는 편이에요. 감명 깊은 영화를 보면 하나씩은 꼭 떠오르더라구요. 일상생활 중
떠오를 때도 있구요. 전에 인소닷에서 ‘아고라’라는 필명으로 <천리지구>, <에스퍼>라는 소설을 썼는데(하나는 추천완결방
하나는 장르완결방에 있습니다), 둘 다 인상 깊은 주제란 말을 많이 들었던 작품이었어요. 지금 보면 전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늘 제가 좋아하고 흥미를 이끌어갈 수 있는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픽션과 논픽션이 섞여 있다고 들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다보면 부끄러워지는 순간들이 있다는데 작가님도
그러신지요?
제가 아닌 ‘지인’의 이야기라 당당하게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만약 제 이야기였다면 쓸 수 없었을지도 몰라요. 감정이 한 쪽으로
치우치니까요. 플레이보이는 보고 느낀 걸 글로 기록한다는 느낌으로 쓰고 있어요. 물론 100% 실화는 아니고 실화를 각색한
논픽션이라고 보시면 돼요.
- 플레이보이는 예전에 완결난 소설이고 직접 책으로 만들어 소장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연재를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당시와 내용이 바뀐 부분이 있나요?
플레이보이는 아직 완결지은 적이 없는 연재작입니다. 이전 작품인 ‘마이동풍’과 혼동하신 것 같아요 ㅎㅎㅎ
- 작가님의 소설을 보면서 웹툰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요즘 웹툰은 안 올라오는 것 같은데 다시 그리실 생각은
없는 건지 궁굼합니다.
사실 플레이보이는 웹툰화가 처음 목표였어요. 웹툰 제작에 앞서 완성된 시나리오를 써야 했는데, 시나리오보단 소설을 쓰는 게
더 생산적일 것 같아서 인소닷을 찾게 됐습니다. 추후 웹툰으로 리메이크할 예정입니다만 사실 100% 확신은 못 하겠어요.
- 작가님께서 웹툰에 대해서 생각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소설 연재 중간중간에 그림도 올라오던데, 혹시 직업이
웹툰에 관련된 웹디자이너나 그런거인가요?
딱 ‘무슨무슨 디자이너다‘라고는 못 하겠어요. 그래픽이든 패션이든 웹툰이든 가리지 않고 다 해요. 하고 싶은 걸 하려고
몇 년째 프리랜서 생활 중이구요.
- 남주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의 이름이 특이하던데, 어디서 모티브를 따신 건가요?
주인공 이름도 소재랑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아요. 전에 속초에서 마레몬스 호텔에 간 적이 있는데, 뜬금없이 마레란 이름이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검색해보니 프랑스어로 ‘늪’이란 뜻이더라구요. 메모장에 기록해두면 언젠가는 꼭 써먹을 이름이다 싶었죠.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옴므파탈 캐릭터. You 마레. 단순하죠? 이브란 이름은 사실 붙여놓고 끼워 맞추기 했어요.
‘최초의 여성’이란 의미에 어울리는 인물이 될 것 같아요.
- 실제 친구를 어떻게 소설의 남자주인공으로 쓸 생각을 하셨는지 그리고 그 친구분도 본인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고 있는지 알고 있나요?
일단 절대 모릅니다. 알면 안 돼요. 전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와서 그런지 사회생활 중 만난 인복은 거의 남자였어요. 근데 그 중
대다수가 마레 같은 부류라 하면 믿으시겠어요? 한 명을 적극 반영하긴 했지만 사실 마레는 화류계의 흔한 남성상이에요.
소재로 삼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친구랑 통화하다가 무심코 제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한참을
듣고만 있던 친구가 그걸 토대로 웹툰을 그려보라고 하더라구요. 꼭 영화 시나리오 듣는 것 같았다면서요. 그 때 처음으로 아,
나의 일상이 누군가에겐 재밌고 신선한 이야기일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 작가님의 차기작도 혹시 논픽션인가요?
아니에요. 이런 논픽션을 몇 작품이나 쓰려면 인생을 몇 번이나 살아야 될 것 같아요. 조금씩 가미가 되긴 하겠죠?
- 소설을 쓰시다가 막히실 땐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음 슬럼프가 왔을 때 극복 방법이라고나 할까요?
저에게 슬럼프란 감정이입이 안 되는 때를 말합니다. 그럴 땐 실컷 다른 일을 한 다음 누워서 음악감상을 해요. 전 음악에서
영감도 받고 감정도 느끼거든요. 감정이입에 도움이 돼요.
- 소설 전체적으로 몰입도가 굉장히 강한데, 그 비결이 궁금합니다
매번 새로운 작품을 구상할 때마다 OST로 쓸 곡부터 찾아요. 활기찬 글을 쓸 땐 활기찬 음악, 우울한 글을 쓸 땐 우울한 음악이
필요해요. 하루 종일 무한 반복하며 감정이입을 하고, 이야기의 사소한 장면이나 극적인 장면, 도입부와 결말 등을 생각해요.
잔가지들을 뻗으면서 나무를 만들어가는 거죠. 뿌리부터 뻗어 올라가다 보면 중간에 맥이 뚝 끊기는 순간이 오더라구요.
시작만 거창하고 점점 흐지부지해지는 게 싫어서 이렇게 방향을 잡은 것 같아요. 전 작품에 몰입을 시작하면 다른 생활은
거의 접어두는 편이에요. 그래서 바쁠 땐 글을 쓸 엄두도 못 내고, 한가할 때 폭풍 연재를 합니다. 여담으로 글을 쓸 때
전 연애에 권태기까지 와요. 남자친구보다 작품 속 주인공을 더 사랑하게 되거든요. 약간 오타쿠 같은 기질이 있어요.
- ‘플레이 보이'를 쓰시면서 가장 희망하셨던 부분은 뭘까요? 예를 들어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줬으면 좋겠다'
이런 부분이요. (운영진)
처음 사회생활을 한 게 21살 때였어요. 대학교 자퇴 후 강남에 있는 토킹바에서 3개월간 일했거든요. 그 후 플레이보이 속
마레의 모티브가 된 사람과 인연이 닿았어요. 첫인상은 ‘재밌는 사람’ 같아서 호감이 갔고, 알고 난 후엔 ‘양아치’ 같아서
거리를 뒀는데, 지금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싶어요.
평범한 인생을 사는 친구들은 이런 제 지인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어요. 보여지는 것만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불량하고 문란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현실에서나 소설에서나 마레의 인생을 응원합니다. 진심으로요.
제 메시지가 잘 전달됐으면 좋겠어요.
- '플레이보이'에는 각자 성격이 확실한 등장인물들이 많이 나오는데, '작가님은 누구의 입장에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으셨을까?' 이런 궁금증이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대다수가 지인을 모티브로 한 인물이라, 각 장면마다 주가 되는 캐릭터의 입장에서 쓰려고 노력해요. 가끔 너무 몰입
하다보면 엑스트라 수준의 인물이 가진 심리까지 몇 문장씩 나열하고 있더라구요. 괜히 비중있는 인물로 비춰지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해요. 여주인공인 이브는 제가 별로 안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이에요. 고교시절 친구 중 한 명이 이브와 같은
직종 종사잔데, 직업 특성상 SNS에선 돈 많고 시간 많은 부르주아 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요. 그 바닥의 실체를 아는
저로썬 그 이중성이 너무 얄밉더라구요. 저한테 피해주는 것도 없는 사람을 얄미워 한다는 게, 제 정신력만 소모하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이왕 화류계 이야기를 쓰기로 한 거, 그들의 입장이 되어 이해해보고 싶었어요. 효과가 있는지 이젠 그들이 얄밉지 않아요.
제 작품 속 주인공을 얄미워 할 순 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