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의 남자, 하룻밤의 실수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텐데.”
“되고 싶지 않으면 어쩌실 건데요.”
“순서가 뒤바뀌었지만 사귀죠. 우리.”
“지금 뭐라고 말씀 하신 거예요? 사귀다니요.”
“말 그대로입니다.”
“당신과 제가 말인가요?”
“네. 그것도 아이들이 하는 풋내기 연애가 아니라 잠자리도 전제한.”
“이것 보세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뭐가 말이 안 됩니까. 잠자리라는 말이 듣기 거슬립니까? 남녀가 만나면 연애하다가 손도 잡고 그 다음엔 키스, 결국은 침대로 들어가지 않나요. 그런데 우린 어차피 마지막까지 간 마당에 잠자리는 안 되는 거 내숭 아닙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당신하고 사귈 마음 자체가 없다는 거예요. 요즘 누가 한 번 잤다고 책임질 생각까지 하죠?”
“싫고 말고의 문제가 아닐 텐데. 분명히 난 하룻밤 실수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고. 내가 여자가 아닌 걸 다행으로 알아요. 그날 아기라도 가졌으면 그 순간 당신 인생은 온전히 사라졌을 테니까.”
무수한 작은 일들이 인연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남자의 심장이 언제나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던 한 여자의 일탈에 꽂혔다. 서로의 인연이 가연(佳緣)인지 악연인 줄도 모른 채 그들의 심장이 멋대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당신 벼랑 끝으로 밀릴 때라야 정신 놓고 나를 찾아오잖아.”
“……아닌데. 나는 벼랑 끝에 밀리면 그제야 정신을 차리는데. 나 살자고 걸어 나온 그곳에 당신이 있어 다행이었고…….”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릴 듯 말 듯했다. 그러나 그 말이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그대로 그의 귀로 날아들었다.
청연(淸緣), 맑고 깨끗한 인연
[본문에서]
1.
뉴욕 맨해튼 38가 8 애비뉴 A 아파트 1809호.
딩동.
있는 힘껏 누른 초인종 소리가 빈 복도 끝으로 긴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자 정원은 문 안쪽의 기척에 귀 기울이는 모양새도 없이 다시 초인종을 길게 눌렀다.
딩동. 딩동.
여기까지 올라온 용기가 밀리지 않겠다는 야무진 의지를 담은 벨 소리가 다시금 복도 안쪽으로 사라져 갔다.
아무도 없는가 보다. 얇게 벌어진 입술 사이를 뚫고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오며 그녀의 얼굴에 언뜻 안도의 빛이 스쳐 지나려는 순간 찰칵하고 열린 문 뒤로 그가 서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풍겨져 나오는 상쾌하고도 은은한 향기. 그의 젖은 머리 모양새가 방금 샤워를 마친 것 같았다.
그의 한쪽 눈썹이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가며 가늘어진 눈매가 예상치 못한 방문객을 맞이하는 듯했다.
“불청객인가요?”
“그럴 리가요. 김치찌개 말고 와인도 괜찮다면. 아니면 설마 아직 식사 전?”
정원이 쑥스러움을 숨기려고 한 말이 너무 도전적으로 들렸나 하고 스스로 뱉은 짧은 말을 채 돌아보기도 전에 그가 좀 전의 표정과 달리 시원스레 대답했다.
정원이 살그머니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혼자……세요?”
“그렇지 않다면요?”
그의 표정만으로는 진위를 알아차릴 수 없는 대답이었다.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고요.”
정원은 겸연쩍음을 숨기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쪽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낮게 읊조렸다.
“흐음.”
남자의 입꼬리 한쪽이 슬쩍 올라가고 빈정거림이 없는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묻어났다.
“들어와요. 그렇게 불안한 눈빛으로 찾아올 만큼 늦은 시간은 아니니까.”
그러나 정원은 성큼 문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실내로 향하던 그가 기척이 없는 그녀를 향해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벽 한쪽에 오른쪽 어깨를 비스듬히 기댄 채 엄지로 자신의 턱 아래를 쓸어내리며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원이 윤민혁이라는 남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롯이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스타일은 쭉쭉 빠진 뉴요커들에게도 밀리지 않을 만큼 근사했다.
“서이현 씨.”
“……네.”
“편하게 나선 걸음이면 편하게 들어와요.”
그랬다. 정원은 편하게 호텔 방을 나섰다. 그의 아파트로 올 생각으로 나섰던 것은 아니었다. 낮이면 열심히 걷고 저녁이면 곯아떨어지기 바빴던, 열흘 가까이 되는 뉴욕에서의 다른 날들과 달리 오늘은 여유롭게 야경이나 구경하자고 나선 길이었다. 정원이 호텔을 나서며 호주머니 안에 그의 주소를 찔러 넣은 것도 의식 속에 있던 행동이 아니었다. 굳이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던 주소를 향해 걸어온 것은 브루클린 브리지에서 바라본 맨해튼의 야경을 혼자 속으로 삼키기 싫었던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정원이 뉴욕 케네디 공항을 밟은 이래 뱉어 본 말이라곤 오로지 그와 함께했던 짧은 시간 속의 것이 전부였다. 민혁이 그녀의 편안한 옷차림과 손에 들린 작은 쇼핑 봉지에 힐긋 눈길을 주며 무감한 표정으로 가볍게 말을 건네 오자 그제야 정원의 안면 근육에 들어갔던 힘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티 나게 마음 내려놓는 표정이면 곤란합니다. 모두 서이현 씨 하기 나름이니까.”
그녀가 피식하고 낮은 웃음소리를 뱉었다. 단정하고 깔끔한 실내. 주방을 겸한 거실 한편에는 그가 드러눕기에 작아 보이는 3인용 소파가 야경이 잘 내려다보이는 창을 등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벽에 걸린 삼단 선반의 두 칸에는 책들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꽂혀 있고, 나머지 칸에는 자잘한 장식물이 놓여 있었다. 실내조명이 어두워 그 책의 제목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주방에는 2인용 식탁이 놓여 있고, 문이 활짝 열린 왼쪽의 침실은 거실 크기에 비해 꽤 넓어 보였다.
“앉아요.”
정원은 잠시 소파, 식탁 어디에 앉아야 할지 망설였다.
“지난번에 보니까 맥주 좋아하는 것 같던데, 맥주, 와인 둘 다 가능합니다.”
그녀가 식탁에 앉아 싱크대 선반을 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
“차는 권하지 않나요?”
그가 몸을 돌렸다.
“차 마시고 싶어요? 커피밖에 없는데. 커피 잘 안 마시지 않습니까?”
정원은 자신도 모르게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것을 느꼈다. 기억을 더듬어도 그것을 알아챌 만한 일이 두 사람 사이엔 없었다.
“아, 지난번 성당 앞 카페에서 민트 초코 마셨죠. 그리고 기내에서도 커피 대신 주스를 시켰던 것 같고.”
그랬던가. 이 남자, 보기와 달리 섬세한 스타일인가. 아니면 주변을 느끼면서 사는 게 습관일까. 지나치는 인연에게까지 그러긴 싶지 않을 텐데. 정원의 마음이 이유 없이 약간 무거워졌다.
“와인 좋아요. 술 마시면…… 긴장이 풀릴까 봐.”
정원은 스스로 대답하고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요? 긴장하고 싶습니까? 뉴욕 택시도 잘 타고 뉴욕 밤거리도 혼자서 용감히 걷는 여성분이.”
“제 사주엔 나쁜 사람은 안 꼬인대요.”
“성당 다니는 사람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닌데.”
정원은 뜻 없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마음 한편으로 뉴욕이라는 먼 타국의 도시에서 우연히 만난 고국의 남자와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은 허드레 대화 속에서 쓸데없이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드러내 놓았던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가 와인 한 병과 치즈를 내왔다.
“괜히 손님 치르게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