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너를 여기에 아로새겨 놓았어. 그러니까 난 네 남자야. 윤희태는 문신혜의 남자라고.”
미국에서 생활하던 문신혜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에 엄마를 따라 한국으로 돌아왔다. 신혜는 전학 간 학교에서 ‘윤희태’라는 남자 아이를 알게 된다.
희태는 신혜를 ‘타투’라고 부르며 짓궂게 놀린다. 그 후, 두 사람은 사사건건 부딪히며 앙숙이 된다.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희태와의 악연을 끊지 못했던 신혜는 예전에 그가 자신을 위해 거짓말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안한 마음에 군대에 간 윤희태에게 면회를 간다. 희태는 신혜가 고마웠다는 말을 하자 몸으로 갚으라고 하면서 그녀를 덮친다. 마음이 동한 신혜 역시 거부하지 않고 희태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다음날, 신혜는 없던 일로 하자고 하면서 홀연히 떠나 버리는데…. 과연 두 사람의 인연은 악연으로만 끝나게 될 것인가?
악연에서부터 시작된 첫사랑《널 아로새겨》
[본문에서]
1.
또다시 그 애였다. 바램이가 좋아한다던 그 애가 신혜를 그렇게 불렀다고 했다. 그 애가 ‘타투’라고 부르자 같은 학년 아이들도 신혜라는 이름을 놔두고 동감한다는 듯 ‘타투’라고 불렀다. 전교생이 몇 안 되는 조그마한 시골 학교에서 ‘타투’라는 이름은 무슨 전염병처럼 퍼져나가면서 이름의 주인공과 안면이 있든 말든 모두가 신혜를 타투라고 불렀다. 더 참을 수 없었던 건 신혜 뒤에서 들리는 수군거림이었다.
“야, 쟤가 타투래.”
“타투?”
“응, 원래 이름이 문신혜인데, 영어로 하면 타투라나 뭐라나. 아무튼 그렇대.”
만약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면 속 시원하게 뭐라고 해 줄 텐데 꼭 등 뒤에서, 그것도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신혜가 들을 수 있도록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것도 신혜보다 학년이 낮은 저학년 학생이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볼장 다 봤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초등학교 저학년에게는 ‘타투’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새로운 단어라 그런지 유행어처럼 입에 오르내렸고 그것이 별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 아이들은 그 주인공이 누군지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을 확인하는 순간 아이들은 신혜를 얕잡아 보기 시작했다. 신혜의 외모는 겁먹은 초식 동물 같았다. 신혜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지만 키는 2학년처럼 작았다. 그리고 말을 시키면 대답도 잘 못 하고 특유의 큰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그것은 아이들의 짓궂은 심리를 자극하는 하나의 기폭제였다. 그래서 아이들은 놀리듯 신혜를 ‘타투’라고 불렀다.
처음에 신혜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뭐?’라고 하거나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하는 시선을 보냈었다. 그럼 그 아이들은 슬금슬금 피하거나 오히려 ‘뭐? 틀려?’ 하듯 덤벼 보라는 식으로 바라보았다. 또는 ‘약 오르지.’ 하는 얼굴로 바라보다 도망가곤 했다. 이런 일로 싸우려 들자면 전교생을 상대로 싸워야 했다. 때문에 자신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아는 신혜로서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타투’라는 별명이 진저리 치도록 싫은 이유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직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은 신혜는 사범 선생님의 당부처럼 자신을 숨기면서 그렇게 지내고 싶었다. 그런 신혜의 마음도 모르고 멀쩡한 ‘문신혜’라는 이름이 ‘타투’로 개조되어 전교생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 참았다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신혜는 이 사건의 주범을 쓰레기 소각장으로 불러냈다.
“너! 사과해.”
“사과? 사과하면 네 이름이 바뀌냐?”
“네가 그렇게 만드니까, 그러니까…. 에, 에브리 바디, 콜 미 타투.”
“누가 이름 그렇게 지으래? 그건 네 엄마 아빠한테 가서 따져. 열라 쪼그만 게 한국말도 제대로 못해. 아 참, 너 아빠가 없다고 했지? 아니, 누군지 모른다고 했던가?”
신혜는 이를 빠드득 갈며 그놈을 힘껏 밀어 버렸다. 놈이 떠밀려 뒤로 벌러덩 자빠지기라도 했으면 신혜의 속이 시원하련만 애석하게도 놈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다리가 뒤로 한 발짝 떼어지며 주춤하더니 곧 중심을 잡고는 신혜를 향해 썩은 미소를 날렸다. 그리고 썩소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험악하기 그지없는 인상이 대신했다. 놈은 신혜를 아래위로 쳐다보고는 ‘이게 어디서.’ 하는 경고를 얼굴에 담고 신혜의 가슴을 밀쳤다.
쿵!
너무 방심했던지 신혜가 흙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솔직히 놈의 힘은 별로 세지 않았다. 단지 2차 성징이 막 시작되는 가슴을 밀어 버렸기 때문에 당혹감과 불쾌함이 신혜를 강타했다.
‘하필이면 가슴을….’
놈의 예의 없는 공격으로 신혜는 여자가 남자보다 열세하다는 좌절감이 들었다. 놈의 역습에 벌러덩 자빠진 신혜는 상체를 일으키고 놈을 쏘아봤다. 놈은 황당하다는 듯 자기 두 손을 내려 보다가 다시 신혜를 쳐다봤다.
“뭐냐, 이건? 물컹한 게…. 어쭈! 꼴에? 여러 가지 한다.”
화가 끝까지 난 신혜는 그 자리에서 뒤뚱거리며 일어났다. 바램이를 생각해 참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 이상 바램이의 우정을 지켜 줄 수가 없을 것 같다. 신혜는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일어섰다. 그러고는 천천히 다가가 손에 쥐고 있던 흙을 정확히 놈의 눈을 향해 던졌다. 신혜는 눈에 이물감을 느꼈는지 두 손으로 눈을 비비는 놈을 향해 내달렸다. 그대로 신혜의 ‘돌’ 머리를 가슴에 맞은 놈은 뒤로 자빠져 버렸다. 정확히 놈의 위에 올라타 제대로 제압한 신혜는 그 뽀얀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타투.’
‘아빠 없다고 했지.’
‘꼴에? 여러 가지 한다.’
놈이 했던 말들이 신혜의 머릿속에서 뿔을 만들면서 머리 위로 치솟기 시작했다. 신혜는 그 뿔 때문에 자신이 악마가 되어 버린 착각마저 들었다.
2.
신혜의 엄마는 싱글 맘이었다. 미국에서 홀로 조기 유학하던 엄마는 고등학교 졸업파티 ‘프롬’때 신혜 생부와 사고를 쳐서 임신했다. 신혜 생부가 군에 입대해 버린 바람에 연락할 길이 막막했던 엄마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가 없던 입장이었다. 낙태라는 나쁜 짓을 하는 대신 아이를 낳기로 비장하게 결심한 엄마는 대학교 휴학계를 내고 한인이 상대적으로 적은 타운으로 이주를 했다. 도시로 출퇴근이 가능한 타운으로 이사를 한 엄마는 닥치는 대로 파트타임 일을 하며 아기를 낳아 키웠다.
평소에 배우 ‘황신혜’를 좋아했던 엄마는 딸을 낳으면 ‘신혜’라고 짓고 아들을 낳으면 ‘신해’라고 짓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리하여 신혜의 출생증명서에 ‘Moon, Shinhye’라고 이름을 올렸다. 엄마의 성을 쓰게 된 신혜는 라스트 네임(성씨)이 ‘문’이라는 게 좋았다. 너무나도 예뻤으니까.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남미 쪽 친구들은 신혜를 ‘루나’라고 불렀다. ‘Luna’는 스페인어로 달이라는 뜻이란다. 한글로는 ‘달’, 영어로는 ‘Moon’. 즉, 신혜의 성씨가 되는 것이다. 엄마는 같은 반 친구들이 딸을 ‘루나’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킥킥킥 웃으셨다. 한국말로 ‘루나’는 올드 시스터(old sister)를 뜻하는 ‘누나’와 발음이 많이 비슷하다면서 우리 딸이 다른 아이들한테 존칭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은 좋다고 하셨다.
‘그게 왜 좋아? 그게 무슨 좋은 일이라고!’
문화적 차이를 이해 못 했던 신혜로서는 엄마의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엄마가 좋아하니 좋은 거라 생각했다. 신혜와 같은 반에서 공부했던 남미 친구들은 실로 다양한 가족 구성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냥 엄마랑 아빠와 함께 사는 아이, 신혜처럼 처음부터 생부의 얼굴조차 모르는 아이, 엄마와 엄마의 남자 친구와 살면서 정기적으로 생부를 만나는 아이, 엄마가 생부와 이혼해서 지금의 스텝 파더(Stepfather : 의붓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
아빠가 없다는 결핍은 어린 신혜가 특별하다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할 사항이 아니었었다. 그저 조금 다른 가정환경을 가졌을 뿐 그로 인해 불행하다는 생각을 전혀 못 했었다. 그저 뭐든지 많으면 좋은 줄 알았던 나이였던 탓에 언젠가는 나도 아빠가 둘일 날이 올 거라 생각했었다. 주위에서 엄마를 미인이라 추켜세우는 말을 들을 때면 신혜는 은근히 엄마에게 기대를 걸곤 했었다. 엄마가 빨리 남자 친구를 사귀어서 아빠가 둘, 아니 셋이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