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안에서 저를 지켜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누구도….”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도련님….”
“무슨 일이 있어도 형수님은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아무도 형수님을 해치지 못하게.”
몰락한 귀족 가문의 여식인 경예는 병든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원인 모를 병으로 죽어 가는 사강에게 시집을 왔다. 시어머니인 승상 부인은 대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경예에게 시동생인 유강과 동침을 할 것을 명령한다.
형을 위해 씨내리를 강요당한 유강과 살기 위해 체념하듯 모든 것을 받아들인 경예는 함께하는 밤이 이어질수록 서로를 마음에 담는다. 행복한 나날도 잠시, 사강이 병을 털고 일어나면서 세 사람의 운명은 색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금단의 사랑을 위한 세레나데 《소야곡》
[본문에서]
“폐하께서 네게 장군직을 내리신다 하더구나.”
달그락.
찻잔을 내리며 수염이 허연 사내가 마주 앉은 젊은 사내를 바라봤다. 이 수염 허연 사내의 이름은 ‘진가헌’으로 월국의 최고 권력자인 승상의 자리에 있는 자였다.
이 사내가 승상이 된 지 벌써 십여 년, 처음 승상에 제수될 때만 하더라도 이 사내의 수염은 검은색이었지만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흰색으로 바뀌고 말았다. 단순히 나이가 들어 흰 수염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이 사내의 수염과 머리카락도 모두 검은색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하루아침에 백발로 변해 버렸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늘 정정하던 얼굴에는 움푹 파인 주름이 생겼고 눈가에는 시름이 떠나지 않았다.
진가헌을 이렇게 하루아침에 늙게 만들어 버린 것은 석 달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진가헌이 침이 마르도록 자랑해 마지않던 장남이 돌연 병을 얻어 자리에 눕더니 일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병이 그냥 병이 아닌지라 나라 안의 명의라는 명의들은 전부 불러들여 진맥을 하게 했지만 그 병명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게다가 진가헌을 아낀 황제가 친히 어의를 보내 주었지만 병명을 알아내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저 시름시름 앓는 병이 아니라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병인지라 별당 안에 따로 거처를 마련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 것이 두 달 전이다.
발병하고 석 달, 그리고 몸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두 달 전부터 장남이 누워 있는 별채에는 그 병수발을 드는 하녀 외에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별채 안으로 들어가면 썩은 내가 진동하는 것이 산 사람의 몸에서 나는 냄새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더 기이한 것은 그 상태가 되었는데도 숨이 끊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몸은 썩어 들어가고 있지만 그 정신은 온전하다는 것을 진가헌도 그의 아내도 알고 있었다.
아들의 용태를 보기 위해 아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면 누워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아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살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아들은 부친과 모친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려 댔다. 그 눈물이 꼭 자기 목숨을 그만 거두어 달라는 눈물처럼 보여서 모진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차마 자식의 목숨을 끊을 수 없어서 외면하고 말았다.
“형님은 어떠하십니까?”
진가헌과 마주 앉아 있는 젊은 사내는 그의 차남인 진유강이었다. 병으로 누워 있는 장남 진사강의 한 살 어린 아우이기도 했다. 장남 사강이 학자였던 반면 아우 유강은 무인으로 성품이나 기질이 판이하게 달랐지만 우애는 다른 어떤 이들보다 깊었다. 석 달 전에 사강이 병으로 쓰러진 이후 진가헌만 시름이 깊었던 것이 아니라 유강의 시름도 깊어져 왔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어서 네 형이 저렇게 몹쓸 병에 걸렸는지 알 수가 없구나. 벌을 주시려면 나를 벌하실 것이지….”
“아버님. 분명 무슨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좋다는 약은 전부 써 보았고 내로라하는 의원들도 전부 다녀갔는데 방법은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 사람의 생피가 좋다 하여 내 생피도 먹여 보았거늘 아무런 효험도 보지 못했지 않느냐.”
“아버님….”
“이제 내 희망은 너 하나뿐이다. 네 형이 저리 된 마당에 너마저 잘못되면 나는 정말 살 소망이 없다.”
“제가 형님을 만나 보면 아니 되겠습니까?”
“옮는 병일 수도 있다고 의원이 말하지 않았더냐?”
유강이 말을 꺼내자마자 진가헌이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내가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더냐? 이제 내 남은 아들은 너 하나밖에 없다고.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도 모자랄 판에.”
“하오나 아버님, 옮는 병이라고 판별이 난 것도 아니잖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니 조심하자는 것이 아니냐? 늙은 우리야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너는 안 된다. 이제 네가 가문을 이끌어 가야 하지 않더냐.”
진가헌이 헛기침을 했다.
“이번에 네게 장군직을 제수하시며 폐하께서 너를 변방으로 잠시 보내시겠다고 하셨다.”
“변방이라니요?”
생소한 말에 유강이 부친을 쳐다봤다.
“멀리 가 있거라. 지금은 그렇게 하거라. 만약 그 사이에 네 형에게 변고가 생기면 내가 기별하마. 그때까지는 돌아오지 말거라.”
진가헌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유강도 알고 있다. 하나 남은 아들을 이런 식으로라도 지키려는 것이다. 병명도 알지 못하는 그런 몹쓸 병이 자신에게 옮아오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부친의 심정은 알지만 유강의 마음은 무거웠다. 생사의 기로에 놓인 형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달아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만 가 보거라. 가는 길에 네 어머니께 얼굴도 좀 비치 거라.”
“네, 아버님.”
절을 하고 일어선 유강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제 겨울로 접어드는지라 하루걸러 하루씩 눈이 내리고 있었다. 유강은 눈 때문에 형의 병이 더 심해지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의원을 수소문하고 있기는 유강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군부의 일을 마치면 매일같이 저잣거리를 다니며 숨겨진 용한 의원을 찾느라 바쁜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모친이 기거하는 안채로 향하던 유강의 시선이 별채의 입구에 잠시 멎었다. 형 사강이 병이 든 후로 별채로 이어지는 문은 늘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문이 열린 채였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하녀들과 하인들이 분주하게 드나들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이 날씨에 꽤나 분주하게 별채를 드나드는 하인들의 모습에 유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어머니의 허락 없이 별채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 * *
“어머님, 소자 유강이옵니다.”
유강은 모친의 처소 앞에서 조용히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문은 시간이 지나도 열리지 않았다.
“어머님, 소자 유강이옵니다. 잠시 들어가 뵈어도 되겠습니까?”
‘잠이 드신 건가?’
대낮이긴 하지만 요즘 모친의 상태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었다. 병들어 누운 장남의 생각에 얼굴 가득 근심만 남아 있는 모친이기에 지친 몸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었을 수도 있다.
‘그냥 돌아가야겠군.’
모친을 만나는 건 다음으로 미루자 생각하며 유강이 돌아서려 할 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누구지?’
유강은 처음 보는 이였다. 새하얀 피부에 소박하게 단장한 여인이 유강을 발견하고는 얼른 고개를 숙인 채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집안의 하녀는 아니었다. 여인이 옆을 스쳐 지나갈 때 은은한 백단향이 그 몸에서 풍겨 왔다.
“들어오거라.”
스쳐 지나간 여인을 한 번 더 돌아보기도 전에 안에서 모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유강은 여인에 대한 생각을 접고 안으로 들어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