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정의, 불의를 못 참는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
한승헌 지음 | 한겨레출판 펴냄
우리 지식사회에 자서전에 대한 관심은 그리 높지 않다. 공식기록으로는 알 수 없는, 그만의 내밀한 세계를 알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라기보다는 화려한 수사로 치장되고 왜곡과 과장으로 범벅된 구차한 자료라 여겨서이리라. 이런 상황임에도 문학평론가 김병 익은 자서전을 주제로 매우 의미 있는 발언을 계속 해왔다. 그 자신이 책으로 쓴 자서전이라 할 만한 《글 뒤에 숨은 글》을 펴낸 바있는지라 더욱 가치 있다 하겠다. 그의 평론집 《기억의 타작》에 자서전에 관한 내용이 짤막하게 언급되었다. 이청준과 맺은 인연을 소개하는 자리였는데, 우리 자서전 문화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만한 말을 남겼으니, 아래와 같다.
이청준은 1970년대 중엽 〈소설문예〉란 잡지의 편집일을 얼마동안 보았고, 그의 청탁에 의해서였겠지만 나는 거기에 몇 회 칼럼을 썼었다. 그중의 하나가 ‘자서전은 가능한가’란 글이었는데, 거기서 나는 이른바 명망가들이 기구한 역사 속에서 일제 강점기의 친일, 적치하에서의 부역, 자유당 아래서의 어용 등등의 피할 수 없었던 부끄러운 생애를 과연 진솔한 자서전의 형식으로 고백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었다. 목표는 유신 시절의 어용 지식인들을 향한 것으로, 나는 “자서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역사와 진실의 손실일 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 정신상황이 그처럼 피폐 하고 허황하게 주눅 들려 있음을 반증한다. 우리는 언제 환하게 밝은 날, 자기의 부끄럼을 부끄럼 없이 드러낼 용기와 사랑을 가질 수 있을 것인 가!”라고 탄식했었다. 그 글이 나온 얼마 후 이청준은 《자서전들 쓰십시다》(1976)를 발표했다. 혹시 내 글을 보고 얻은 아이디어 아니냐고 나는 농을 걸었고 그는 싱긋이 웃기만 했다. - 《기억의 타작》, 문학과지성사, 131~132쪽
우리의 자서전 문화가 왜 천박한지를 이처럼 일찌감치 간파한 글을 나는 보지 못했다. 자서전이 지극히 서구의 근대정신과 일치 하는지라 우리의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유의 발언은 설득력이 높지 않다. 전근대 사회에 자서전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잖 은가. 근대 이후에도 우리에게는 내세울 만한 자서전이 많지 않다. 1인칭적 고백이 어울리지 않는다면, 3인칭적 객관성은 확보했 는가? 우리에게 평전문화가 발전했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그러니, 김병익의 분석이 호소력 높을 수밖에 없다. 가혹한 역사와 정치 현실에 타협하고 좌절했던 이들이 부끄러운 삶을 기록으로 남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몇몇 철면피들이 자신의 삶을 미화해 자서전을 남겼으나, 대중의 지속적인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질문을 던져보자.
이제는, 자서전을 쓸 수 있는 시대인가?
비로소 제대로 된 ‘자서전 문화’를 기대해도 될까
감히 말하거니와, 나는 이제 비로소 자서전을 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노라고 확신한다. 우리 역사를 비판적 시각에서 살펴보는 것을 자학이라 말하는 이들에게서 진정한 역사정신을 찾을 수 없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경제적 풍요가 모든 상처를 치유해줄 만병통치약이라 떠벌이는 셈이다. 오래전 일본인들이 들었던 치욕적인 말, 그러니까 경제적 동물이나 할 수 있는 말을 자랑스럽게 떠벌 이고 있을 뿐이다. 나는 우리 역사를 가야할 길에서 탈선하고 일탈했던 것으로볼 적에 더 빛나는 것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하곤 한다. 우리 근현대사야말로 일탈과 탈선에서 바른 길로 돌아오기 위한 교정의 대장정이지 않았던가. 식민지성을 극복하고 근대성을 이루기 위해, 독재에서 벗어나 자유민주주의에 이르기 위해, 분단의 아픔을 이겨내고 통일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 벌인 고투의 역사였다. 그래서 나는 가슴 벅차고 자랑스럽다, 우리 역사가! 버젓이 저질러진 잘못을 없는 것인 양 거짓을 부리는 것이야말로 자학 콤플렉스다. 그것과 당당히 맞섰던 역사였기에 후손에 물려줄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감격스럽게도 우리도 이제 제대로 된 자서전 문화를 기대할 수있게 된 바, 그 실례로 나는 한승헌의 자서전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을 내놓는다.
공식직함 변호사. 고시 8회 출신으로 검사를 하다 스스로 택한 길이다. 늦게나마 관운도 틔어 감사원장과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면, 호강한 삶이었다 말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상식으로 보건대, 절대 잘못된 판단이 아니다. 그런데 웬걸, 지은이 약력에 나온 글귀를 그대로 인용하자면 “박해받는 양심수 또는 시국사범을 변호하 면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던 중 반공법 위반 필화사건(1975)과 소위 ‘김대중 내란 음모사 건’(1980)으로 두 차례에 걸쳐 21개월간 투옥 됐다”하니, 호의호식하는 삶과는 멀었다. 그래서 “내 이력서에는 고시합격, 검사, 감사원장 같은 양지가 보이지만, 연보에는 그와는 전혀 다른 가난과 고생, 재수까지 한 감옥살 이, 여러 해에 걸친 실업자 생활 같은 음지가 짙게 번져 있다”라고 스스로 말했을 터다.
이쯤 되면 예단하기 쉽다. 보장된 안락한 삶을 버리고 가시밭길을 걸었으니, 내 삶이 얼마나 당당하느냐는 내용으로 가득 찼을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런 유의 자서전이 있다. 민주화운동을 종자돈 삼아 정치해보려고 하는 얼치기들이 급하게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 쓴 책들이 그것이다. 그런 책은 한마디로 쓰레기다. 사볼 필요도 없지만, 어디서 공짜로 얻었다면 휴지통에 버릴 일이다. 한승 헌의 자서전은 자기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 이야기로 가득하다. 고백보다는 증언에 방점이 찍혀 있는 셈이다. 그가 얼마나 겸손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다보니, 이 책은 오래전 송건호가 쓴 《한 국현대인물사》와 유사한데, 차이가 있다면 재판을 중심으로 했다는 점이요 단점이 있다면 소략하다는 사실이다. 더 자세한 사항을 알고 싶다면 아무래도 《한 승헌 변호사 변론사건 실록》을 살펴보아야 할 듯싶다.
한승헌, 한국의 유신헌법을 이기겠다는 이름 아니냐
글쓴이 처지에서 보자면 증언을 널리 읽히고 싶을 터다. 그러나 읽는이는 고백에 더 관심이 많다. 과일에 있는 씨앗이야 심으면 새로운 과일을 낳는 법이겠 지만, 누가 그것 때문에 먹으려 하겠는가. 달콤한 과즙과 부드러운 속살을 품은 과육을 탐하게 마련이다. 고난의 행군을 낙오 없이 마친 노장의 개인적 삶에 더깊은 관심이 기울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의 이름에는 가슴 아픈 가족사가 스며 있다. 한승헌이 세상에 고고성을 울리기 한 달 전 초등학교 다니던 누이가 죽었다. 슬픔에 잠긴 아버지를 위로하느라 글 친구가 곧 나올 아이는 틀림없이 아들일 것이라며 이름을 미리 지어주었 다. 항렬자가 헌(憲)이었던지라 승헌(勝憲)이라 하였던 것. 본디 그는 9남매 가운데 막내였는데, 형제들이 어린 시절 유명을 달리해 무녀독남으로 자랐다. 그의 삶은 시작부터 음과 양이 섞여 있는 꼴이었다.
이름으로 운명 맞추기를 좋아하는 이라면, 승헌이라는 이름 덕에 그가 법조인이 되었다 하리다. 법대로 해서 이긴다는 뜻이라 새기면 변호사가 딱 맞는 직업 이다. 힘 있고 상징성도 좋아 자신도 이름을 좋아했다는데, 바로 그 이름 때문에 포복절도할 일이 벌어진다. 남산에 끌려가 조사받을 때, 요원이 이름을 두고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한승헌이라, 한국의 유신헌법을 이기 겠다는 뜻이지 않느냐고 호통을 쳤단다. 우리 현대사는 이같은 희극으로 점철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산민(山民)이라는 아호도 그의 삶과 운명을 예고 한다. 서예가 유희강이 지어준 아호라는데, 그의 고향이, 지금은 용암댐 때문에 수몰된 전라북도 진안군 안천면인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인지 모른다.
진안고원의 산악지대에 들어앉은 “낙후와 빈곤의 시범지역”이었다니 말이다. 그러나 어찌 태 묻은 것만 보고 아호를 내렸 겠는가. 유희강이 아호 주며 건네준 휘호에 근재산민(近在山民)이라 쓰여 있었으니 “나는 그 말뜻을 산골 사람 같은 민초들과 함께 있을지어다, 라고 이해했다. 사회적 약자, 소외당하는 계층, 어려운 사람들을 멀리하지 말라는 당부였다고 생각된다. 결코 풍류나 덕담 차원의 아호가 아니었다”. 인권변호사로 살아갈 삶이 그의 아호에 예고되었던 것이다.
한승헌은 세 가지 복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 첫째는 일복이다. 자신이 일을 따라가는지, 일이 자신을 따라오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의 성품으로 보건대 마음이 약해서 거절하지 못해서라는 자평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그렇지만 그 다음에 온말, “겁나고 무서운 일도 나중에 가책을 받을까봐서 외면하지 못하고 달려들었다.”는 구절에 감동을 받았다. 중앙정보부에서 김지하 시인의 변론을 맡지 말라는 협박성 전화를 받았을 적에 그라고 어찌 덤덤했겠는가. 더욱이 한번 문제가 된 글을 빌미로 강하게 압박했을 때 일신의 안락을 위해서 변호를 피할 수도 있다. 내가 아니어도 김지하를 변호할 사람은 많다고 마음먹으면 되는 일이 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협박을 거부했고 그 덕에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반공법 사건전문(?) 변호사가 반공법에 걸려 수감”되는 해프닝을 겪으면서도 그의 결기는 꺾이지 않았다. 그 용기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그 답이 이 구절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다. 나의 감수성은 여전히 역사적 가책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가? 부끄럽고 부끄러운지고!
진짜 자서전은 불의에 분노한 이들만이 쓸 수 있다
일복 많은 사람이 인복 많은 것은 당연지사. 이 부분은 건너뛴다. 그는 세 번째로 책복이 많았다고 한다. 그 자신이 저술가이기도 한데, 다양한 저자들이 기증본을 보내와 두루 교양과 지식을 익힐 수 있었다는 것. 유머를 즐기는 그인지라, 자신의 삶에 일어났던 재미있는 일을 자주 기록에 남겼다. 책복에 관련된 일로는, 가무라 다케오 씨가 보낸 연하장이 있다. 한승헌의 석방을 위해 서명운동도 벌인 그는 우리말과 글에 능통한데, 어느 해 보낸 연하장에 ‘새해 북 많이 받으십시오’라 써 보냈단다. 그런데 공교롭게도그 해에 엄청나게 많은 ‘북’을 기증받았다니, 가무라 다케 오는 실수를 빙자해 예언한 꼴이 되어 버렸다. 책 읽어 “공 부도 늘고 깨달음도 깊어졌는가 하면, 그들을 흉내 내는 가운데 졸문이나마 꾸준히 글을 쓰게 되었다”니, 한시라도책 읽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치는 세대들이 새겨들을 말이다.
자서전을 읽으며, 그가 절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오늘 우리 사회의 주류로 성장한 두 부류에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를 발견했다. 그는 본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민주화운동을 함께하고 인권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정의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기독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그가 마침내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그는 말한다. “흔히들 피고인은 변호사를 잘 만나야 한다고 하는데, 변호사는 피고 인을 잘 만나야 한다”고. 그 시절, 기독교는 가난하고 억울 하고 핍박받는 무리와 함께했다. 그렇다면 오늘은? 권력과 자본의 편에 서 있지 않은가. 기독교인 숫자가 줄어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해보아야 할 터다. 그는 끊임없이 정치인이 되라는 회유를 받아왔다고 한다. 그때마다 “애국의 길은 정치권 아닌 여러 분야에 더 많았고, 권세 없는 봉사와 헌신은 더 소중 했다”는 일념으로 거절했다. 과거에 억울해 우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았던 이력으로 변절해버린 숱한 정치인들이 새겨들을 말이다.
이 글에서 증언 부분은 생략했다. 그가 참여한 시국사건 재판만 보더라도 우리 현대사를 일별하게 된다. 읽어나가다 그가 참여한 재판보다 참여하지 못한 재판이 무엇인지 조사해보는 것이 더 흥미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져보니, 실제로 그랬다. 민청학련의 여정남 변호를 맡았지만 반공법 위반으로 그 자신 영어의 몸이 되면서 그의 사형을 막아내지 못했다. 문익환 목사가 1976년 민주구 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는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해 변호 하지 못했다. 19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연루자는 단골 의뢰인 들이었다. 그런데 변호해야 할 그가 의뢰인들과 함께 피의자가 되어 있었다. 이 불행했던 역사가 제발 잊히지 말기를,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시민의 참여가 있어야 한다는 교훈이 오랫동안 기억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책을 덮으며 내내 읽는이를 괴롭힌 글귀가 다시 떠올랐다. 1960 년대 후반 워렌 미국 연방대심원장이 내한해서 연설한 내용 가운 데, 그에게 감동을 준 말이 있었다. “피해를 입지 않은 자가 피해를 입은 자와 똑같이 분노할 때 정의가 실현된다.” 솔론이라는 그리스 아테네의 시인이 한 말이란다. 불이익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불의는 참아내는 현실을 보며, 진정한 정의가 무엇이지 곱씹게 하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 더 얻은 깨달음. 진짜 자서전은 역시 불의에 분노한 이들만이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이권우 도서평론가·안양대 강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