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말을 하는 세월의 애사
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 펴냄)
김인숙의 소설 《소현》은 김훈의 《남한산성》이 끝난 자리에서 시작된다. 인조가 삼전도 에서 청 태종 앞에 무릎 꿇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적인 항복 의례를 치르는 것이 《남한산성》의 마지막이었다. 그 뒤 조선은 소현세자와 빈궁, 세자의 동생인 봉림 대군과 그 부인, 그리고 척화론자였던 대신 등을 청의 수도 심양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세자 일행이 볼모로 잡혀 가는 장면이 《소현》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들판에서 임금은 눈물을 뿌렸다. 임금이 울자 늙은 대신이 달려나와 세자의 앞에 쓰러져 누우며, 가지 못하신다고 울부짖었다. 포로들도 서로 엉겨 붙어 가지 않겠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 통곡이 겨울 들판의 메마른 풀들을 적셨다. 세자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곧 돌아오게 되리라고 믿었고, 그때까지 자신으로 인해그 귀하신 용안을 적신 임금을 잊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소현》은 그렇게 심양으로 끌려 간 소현세자가 1645년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 8년의 세월에 초점을 맞춘다. 청이 명의 수도 북경을 함락하고 명을 무너뜨린 1년 뒤인 1645년 2월 볼모의 신분에서 풀려난 세자는 영구히 환국하는데, 그로부터 불과 두 달만에 세상을 뜨고 만다. 아비인 인조에 의한 독살설이 제법 설득력 있게 제기되었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세자가 세상을 뜬 1년 뒤에는 세자빈 강빈이 임금을 저주했다는 혐의를 입어 사약을 받았고, 원손이었던 석철과 그 동생 석견은 유배지 제주에서 굶어 죽었다. 박정애의 소설 《강빈》(2006)은 세자빈을 주인공 삼아 왕가의 이 참혹한 사태를 다룬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적 운명을 상기시키는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는 뒷사람들의 역사적·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호사가들이라면 저마다 한 마디씩 견해를 제출할 법하다. 그러나 김인숙은 《소현》에서 왕과 세자의 운명을 가른두 사람 사이의 알력과 그 정치적 배경으로 곧장 직진하지 않는다. 소설은 적의 땅에 머물면서 적과 친구로 지내야 했던 소현의 분열증적 심리, 자신의 영구 귀국을 위해서는 적이 승리하고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는 비극적 역설, 그리고 그것이 적의 승리인지 패배인지가 불분명한 채로 무언가 결정적인 전환의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라는 절망적인 기다림을 돋을새김한다. 볼모로 지내는 동안 세자가 청나라 사람만을 따라 했노라는, 독살설을 뒷받침하는 <인조실록>의 기록은 작가 후기의 끄트머리에 자료로서 제시되어 있을 따름이다.
“울거라. 네 몸에 울음이 가득할 것이다.”
패배한 조국의 왕실과 조정을 지배하고 있는 맹렬한 반청 (反淸) 논리와 쇠잔해 가는 명을 대신해 중원의 지배자로 떠오르고 있는 청의 땅에 볼모로 와 있다는 자신의 처지 사이에 약소국의 세자는 꼼짝없이 끼여 있는 형국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럴 수도 없는 세자의 딜레마는 소설 속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세자가 그들의 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 기원의 말처럼 세자의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세자가 그들의 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세자는 적의 땅에서 결코 돌아오지 못할 것이었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세자는 하고픈 말을 참고 다만 기다릴 뿐이다. 기다림 속에 쌓인 울음은 목울대를 넘지 못한다. 부왕의 와병을 핑계 대고 일시 귀국한 세자에게 아비 인조는 “울거라. 네 몸에 울음이 가득할 것이다”라 이르고 돌아누워제 등을 흔들면서 운다. 그런 세월이었다.
소설 속에서 세자를 둘러싼 핵심적인 사건은 그와 함께 볼모로 끌려온, 좌의정 심기원의 아들 석경이 누군가의 칼을 맞는 일이다. 소년의 나이에 적국에 끌려와 세자를 하늘로 알고 지내던 석경이 청의 동태를 비밀리에 본국에 보고하는 서찰에 세자가 적들과 긴밀히 지낸다는 내용을 포함시킨 것이 아마도 환국 이후 세자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석경이 위험한 연정을 불태운, 왕족 회은군의 딸이면서 청의 황제에게 바쳐졌다가 대학사의 둘째부인으로 하사된 흔, 흔의 몸종이면서 무녀(巫女)의 신통력을 지닌 막금, 그리고 청의 군인들에게 어머니와 누이가 능욕과 도륙을 당한 뒤 청으로 건너와 역관이 된 만상 등 역사 속 인물과 허구의 인물들이 어우러져 소설 《소현》의 세계를 이룬다.
석경의 ‘밀고’와 그 아비의 역모 사건으로 대표되는 세자 주변의 크고 작은 사태를 근저에서부터 규정하는 것은 명의 쇠락과 청의 흥성이라는 중원의 정치 지형이다. 세자는 명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쟁에 종군을 강요받으면서 힘이 말을 하는 세월의 정체를 직시한다.
“정복자의 세상, 정복자의 세월이었다. 세자가 문득 어금 니를 물고 생각했다. 부국하고, 강병하리라. 조선이 그러하 리라. 그리되기를 위하여 내가 기다리고 또 기다리리라.”
정복자의 세상이고 힘이 말을 하는 세월이라는 사실을 잘알면서도 지금 당장은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데에 세자의 고통이 있다. 그 불안하고 초조한 기다림이 거의 끝나갈 무렵 세자는 청의 실력자인 동갑내기 왕자 도르곤과 아슬아슬한 대화를 나눈다: “조선을 여전히 적으로 보시옵니까?” / “세 자는 나의 적입니다. (…) 그러나 알아두십시오. 나는 적이될 수 있는 자만을 벗으로 여깁니다.” / “대왕은 나의 적입니다.”
세자를 둘러싼 상황의 엄중함과 비극성은 작가 쪽의 공력이 느껴지는 문체로 하여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목울대 까지 올라온 울음을 가까스로 참아내는 세자처럼, 작가는 감정의 개입을 최대한 자제하는 냉정하고 간결한 문체로 시종 한다. 청의 발흥기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을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운명에 초점을 맞춘 같은 작가의 산문집 《제국의 뒷길을 걷다 : 김인숙의 북경 이야기》(2008)와 함께 읽으면 더욱 입체적이고 흥미로운 독서가 될 듯하다.
최재봉
1961년 경기 양평에서 태어났다. 경희대 영문과와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 했다. 한겨레신문사에서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만나는 문학 기행》, 《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한국문학의 공간탐사》, 《최재봉 기자의 글마을통신》 등의 책을 썼고, 《에드거 스노 자서전》, 《클레피, 희망의 기록》, 《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같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