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이 제1의 권력이다
제1권력 자본, 그들은 어떻게 역사를 소유해왔는가
(히로세 다카시 지음 | 이규원 옮김 | 프로메테우스 펴냄)
세 권력, 즉 입법·사법·행정이 서로 독립하며 견제하여 균형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 실제 삼권(三權)은 각각이 똑같은 힘을 발휘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학계에서 매긴 순서는 모르지만 아마도 굳이 서열을 매기면 대통령이 버티고 있는 행정부가 제1의 권력이고, 국회가 제2의 권력이고, 사법부가 제3의 권력이라고 해도 이의를 달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흔히 여기에다 막강 권력을 발휘하는 언론을 제4의 권력으로 꼽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 《제1권력 ; 자본, 그들은 어떻게 역사를 소유해왔는가》는 권력의 순서를 바꾼다. 아니 그동안 아예 거론조차 되지도 않던 것이 제1의 권력이 되었다. 자본이 바로 그것. 그도 그럴 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중에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권력이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다. 사실 자본이 제1의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은 이젠 공공연한 비밀도 아니고 입 밖에 내지 못할 말도 아니다. 아니 당당하게 말해지는 세상이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나는 이 책을 폈다. 역시 이 책은 나의 짐작을 배반하지 않았다.
이 책이 코난 도일의 《바스커빌 가의 사냥개》로 시작되고, 또 원제가 ‘억만장자는 할리우드를 죽인다(億万長者はハリウッドを殺す)’라는 사실에서 할리우드 영화계나 그 역사를 다룬 책으로 오해할지도 모르 겠다. 20여 년 전 이 책은 《억만장자는 할리우드를 죽인다》 는 제목으로 전체 분량의 3분의 2 가량을 묶어서 나온 바 있기에 더더욱 그런 이미지를 지울 수 없다.
하지만 흔한 말로 숲만 보고 나무는 보지 못한 격이다. 이책에서 말하는 제1의 권력은 JP모건과 록펠러로 대표되는 미국 독점재벌들이 어떤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는지, 그 과정 에서 어떤 행태를 저질렀는지, 또 그들이 세계경제를 어떻게 쥐락펴락하였는지, 그들에 의해 미국은 물론 세계의 내로라 하는 정치인들이 어떻게 조종되어 왔는지를 파헤치고 있다.
한마디로 충격적인 폭로이다.
그래서인지 20여 년 전 일본 고단샤(講談社)에서 나오자마자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8개월 만에 30만 부 이상 팔려나가는 기염을 토했지만 곧바로 서점에서 자취를 감췄고, 그 이후 지금까지도 일본에서는 금서 아닌 금서로 회자되는 가운데 숱한 짜깁기 식 아류작들이 출간되고 있다고 한다(이 책의 편집자였던 고단샤의 호시노(작고) 씨의 증언). 어디 그뿐인가. 이 책을 우리말로 펴낸 출판사가 계약하고 나서부터 국내 유수의 기업평가회사가 이 출판사를 뒷조사했다고 한다.
세계경제를 쥐락펴락한 미국 독점재벌들
여하튼 섬뜩함이 엄습하는 이 책은 이렇듯 추악한 ‘자본의 힘’의 뿌리를 거대 자본가의 ‘투기 비즈니스와 이권다툼’에서 캔다. 그들은 곧 금융재벌이라는 것. 거대 재벌과 그에 기생한 투기꾼 일당의 지난 100년간의 행적을 역사적으로 추적 하여 각각의 사건과 사고 속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아낸다.
특히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역사 해석의 마당에 독자들의 시선을 모으려고 하였는데, 이때 그가 동원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은 물론이거니와 대중과 친숙한 문화적 아이콘을 동원했다. 이를 테면, 현대 영미 탐정소설의 대명사인 셜록 홈스는 물론 원서의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할리우드 무성영화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숱한 영화작품들이 등장한다. 가령 재즈싱어, 시티라이트, 역마차, 무기여 잘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워터프런트, 분노의 포도,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나이아가라, 차이나신드롬, 줄리아, 실크우드 등.
꽤 두툼한 책이지만 추리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히는이 책을 쓴 히로세 다카시(廣瀨 隆)가 누구인지 소개하면서이 글을 마치는 것이 좋을 듯싶다. 히로세 다카시는 무욕의 사상을 실천하며 살았던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존경 하며, 반핵운동가답게 핵 발전을 통해 공급되는 도쿄 전력의 전기를 일체 사용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집을 손수 개조할 만큼 지독한 괴짜임과 동시에 일본의 재벌과 극우파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의 저자 다치 바나 다카시가 “양질의 논픽션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박력을 접한 후로 더 이상 문학에 대해 관심을 잃어버렸다” 고 실토할 만큼 히로세 다카시는 마지막 책장을 덮은 독자들 에게 미국사를 포함한 세계 근현대사를 보는 시각을 180도 바꾸어 버릴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한국에도 수차례 방문해 국내 환경운동 1세대와도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자본주의를 다룬 대부분의 책들이 자본주의를 구조로 비판했다면 이 책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그 시스템을 실질적 으로 움직이는 사람의 문제로 파고들어 구제척이고 실천적인 자극을 주는 책이다. 점과 점의 사건을 끝내 하나의 선으로 이어 마치 뼈대를 단번에 추려내는 그의 책들은 앞으로 20여 권이 더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몹시 기대된다.
조성일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했고, 신문사에서 일하다 뜻한 바 있어 그만두고 우리나라 최초로 서평 전문 웹진 <부꾸>를 창간하여 직접 운영했다. 이어 잡지 출판을 하면서 계속 출판계 언저리에서 머물다가, 지금은 신문이나 잡지에 서평을 기고 하고 방송에 나가 좋은 책들을 소개하는 등 출판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