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 장기수가 던진 숙제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허영철 구술·기록 | 보리 펴냄)
“노랫말처럼 그때 그 시절은 젊었고, 즐거운 나날이었다. 손풍금을 켜며 노래 부르는 지금 손자 녀석이 그 시절 바로 내 나이였다. 광산 십장하던 일본놈들, 그 아래 붙어먹던 가살쟁이 친일도배, 역전 상가 경영권을 쥐고 일수놀이하던 부르주아, 가렴주구로 작인 등 처먹던 지주, 협잡질 일삼던 사기꾼도 자취를 감춘, 근면하고 정직한 무산자 인민이 주인이던 새 세상이었다.”
김원일의 수작 〈손풍금〉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서가를 뒤적여 김원일의 작품을 찾아낸 것은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자서전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를 읽고 든 강한 의혹 때문 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한 사람을 그 가혹한 전향 공작에 무릎꿇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게 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먼저 분명히 밝혀두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어떤 이유로든 한 개인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범하거나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는다. 이것은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다.
비전향 장기수 문제는 우리 인권사의 치욕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아무리 그들이 실정법상 간첩이라 하더라도 사상 전향을 강제할 권리는 없다. 그러나 지난 역사에서 권력은 모진 고문과 협박 그리고 회유로 전향을 강요했다. 현실적으로 체제에 더 이상 위협이 될수 없는, 병들고 늙은 사상범들에게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들의 사상이 위험했을까? 그들이 세상으로 나오면 체제를 전복할 세력으로 성장했 을까? 서로 다른 발전 방법을 택해 뚜렷하게 대조되는 결과를 나은 상황에서 그들의 사상이 남한 민중들을 오염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일까?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확신하고, 자유민주주의의 장점을 믿었다면 전향 여부는 본인들의 선택으로 남겨두어야 했다. 끝까지 북한 체제를 옹호한다면, 과감하게 북송하면 되지 않았을까? 그들의 선택이 비록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지 라도 그 선택 자체를 존중할 때 우리의 헌법정신을 지키는 것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당연히 그것은 자신감과 우월감의 표상이었을 터.
그토록 강고하게 신념을 지킬 수 있는 이유
다시, 허영철에게 돌아가 보자. 36년간 양심수로 감옥 생활을 했고, 그 결과 가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던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예상 밖의 말을 한다.
“나는 가족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근본적으로는 내 탓이 아니라 세상이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이라는 마음 때문에 그렇다. 나는 역사의 정당한 편에 섰던 것뿐이었는데 일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것을 어찌할 것인가. 내 신념은 그때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았는데.”
아무리 자신이 옳은 길을 걸었다 하더라도 가족들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한다면 좀처럼 뱉어내기 어려운 말이다. 그렇다고, 그를 인면수심으로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그는 어디까지나 확신범이다. 그래서 상식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1920년 전북 부안 출신인 그는 무슨 연고로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입때껏 믿고 있고, 자신을 통일운동에 헌신한 혁명가라 자부하는 것일 까. 책을 읽고 나서 격렬하게 일어난 그 궁금증이 앞서 말한 김원일의 중편소설을 다시 읽게 했다. 인용한 부분은 초기 북한 체제가 민중들한테 어떤 반응을 얻었는가를 회상하는 대목이 다. 그런데 허영철의 자서전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나는 그때…… 이상향을 보았어요. (중략) 새로운 체제하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사업을 직접하면서 이제껏 꿈꾸었던 이상향을 (중략) 경험한 거지요. 그야말로 내 일생에 가장 큰 의미였어요. 내 사상의 견고함도 그때 얻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실생활을 통한 체험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내 생애 가장 중요한 시기는 북에서 보낸 4년입니다. 그 시기가 없었다면 아무리 신념이 있었더라도 나는 사회주의 실상이 과연 무엇인지 잘 몰랐을 거예요.”
소설가의 상상력이 한 양심수의 고백과 충격적으로 일치하는 대목이다. 나는 상상과 회고가 겹치는 이 대목에서 무릎을 치며 깨달음을 얻었다. 그토록 강고하게 신념을 지킬 수 있는 이유가 해명되었다고 보아서다. 우리의 공식 역사가 북한 체제의 초기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와 관계없이,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때가 낙관과 희망의 시대였다는 점이다.
부끄러운 역설… 그는 헌법정신을 지켰다!
초점을 허영철에 맞추어 보자. 식민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보통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민족의식에 눈뜨기 전, 막연하나마 계급의식을 품게 되었다. 철도 공사 현장에서 막노동하다 일본 으로 건너가 탄광노동자로 일했다. 지적 호기심과 왕성한 학구 열로 열악한 환경에서도 신문과 책을 탐독했다. 그러다 《공산 당선언》을 읽었다. 비로소 노동자가 역사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품게 되었다.
해방 후 좌익활동을 하다 1946년 남로당에 가입했다. 그가 자신을 혁명가라 인식하게 되는 사건은 1947년 3.22총파업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 월북을 시도했을 때였다. 북쪽 관계자가 “지 명수배를 받았다고 모두 북으로 넘어오면 남조선 혁명을 할 사람이 없다”고 말했는데 이때 마침내 자신이 “남조선 혁명을 이룰 혁명가로 비춰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기실 허영철의 자서전은 여기까지가 ‘눈’이다. 이후부터는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믿는 한 사회주의자의 교조적인 사유와 발언이 펼쳐진다. 전쟁의 발발에 대한 책임, 박헌영 축출에 대한 해석, 체제 경쟁에서 실패한 원인 등속에 대해 그는 한결같이 북한의 공식 입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심지어, 그가 남파되기 전에는 아직 주체사상이 뿌리내리지 못한 상황이었음에도그 사상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고,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양말하고 있다. 이 대목에 이르면 양심수라기보다는 확신범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고 만다.
나는 이 대목을 눈여겨보며 감정이 격렬해지는 것을 느꼈다.
두 가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의 깊이와 폭은, 한평생을 바쳐 지킬 만큼 순도는 높지만, 무척 얕고 좁아 보인다.
지금의 실패는 미래에 거둘 성공의 발판 정도로 치부해 버리는 순간, 철저한 자기 성찰이나 현실에 바탕 둔 상황 인식 능력을 찾아볼 수 없다. 이 책에 기록된 내용을 보며 북한 체제를 더 우월하게 보거나 그가 품은 선명한 이데올로기에 동의할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되겠는가? 자신의 삶 속에서 그 길을 걸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터나, 거기에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솔직히 말해, 허영철이 이데올로기라는 미망에 사로잡힌 영혼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따랐던 길일 뿐이지 않은가. 그 길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을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념형 인간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두 번째 충격은 뭐가 아쉬워 이 정도의 사상을 꺾으려고 그리 모질게 굴었는가 하는 점이다. 살아 움직이는 현실 앞에 회색의 이론은 무력해지게 마련. 진정으로 더 잘 살고 더 행복하고더 기쁜 나라를 이루었다면, 스스로 새로운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억지로 강제로 성마르게 덤벼들었던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겠더라는 말이다. 그러니, 다음 같은 농담 아닌 농담이 나오는 법이다.
“벌써 여덟 번이나 보안관찰법 대상자로 갱신되었다. 갱신을 결정할 때는 꼭 남이 좋으냐, 북이 좋으냐를 묻는다. 아마도 남이 살기 좋다고 하면 보안관찰법을 해제해 줄 것이다. 금년(2005년)에도 또 묻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나를 37년이나 징역살이를 시키고, 나와서도 15년이나 감시를 해대는데 여기가 뭐가 살기 좋으냐? 어떤 창자 빠진 놈이 여기를 살기 좋은 데라고 하겠느냐?”고.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통쾌하기까지 했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가 어찌 체제의 우월성을 논의할 수 있겠는 가. 추천사를 쓴 윤구병의 말처럼 그가 더 우리의 헌법정신을 지켰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지켰으니 말이다. 참으로 부끄 러운 역설이 아닐 수 없는 대목이다.
‘즐거운 나날’에서 ‘더 나은 세상’으로 가려면
이 책은 읽는 이를 상당히 불편하게 한다. 쇠고깃국에 이밥 말아먹기는커녕 굶어죽는 인민이 속출하고 본토와 아비집을 떠나 유랑하는 인민이 늘어나는 체제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아서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의 자유다. 그러나 이를 밑거름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고 논쟁의 불씨로 삼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지 않을까 싶다. 누가 공산주의자가 될까, 왜북한 체제를 끝까지 옹호하는 것일까, 사상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그 미망에 맞서는 방법은 무엇일까, 도대체 서로 다른 사유 체계를 갖춘 사람들끼리 같이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가 비판한 것 가운데 우리가 동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등속이 뜨겁게 논의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동안 운동권에서 이른바 주사파가 득세할 적에 내가 한 말이 있다. 주사파가 역사주의의 함정에 빠진 듯싶다. 해방 후 경쟁 적으로 새로운 공화국을 건설하면서 더 많은 민중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한 것이 북한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오늘의 체제를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늘을 사는 민중이 동의하는 체제를 이루어냈느냐, 그리고 그것이 궁극으로더 나은 삶을 보장했느냐도 중요한 평가의 잣대가 되어야 한다. 이 점을 망각한다면, 그것은 시원의 순결에 대한 강박증일 뿐이다, 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허영철의 자서전에서도 그런 강박증을 확인한다.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겠지만, 민중의 지지를 얻은 국가 건설 초기의 낭만성이라는 신화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잔인하 다. 시작이 순결해도 오늘이 건강하지 않다면 내일을 기약할수 없기 때문이다. 손풍금은 아련한 추억이다. 지금 더는 연주 되지 않고 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념의 미망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려면 말이다. 다시 고민이 깊어진다.
이권우 도서평론가·안양대 강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