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 비극을 낳다
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펴냄)
박범신의 소설 《은교》는 전형적인 삼각구도 위에 서 있다. 한 여자와 두 남자. 그러나이 소설의 삼각구도는 전형성에 갇히지 않는 예외성 또한 지니고 있다. 여자 나이 열일곱, 남자들은 예순아홉과 서른일곱. 할아버지와 아버지라 해도 될 나이이고, 실제로 여주인공 한은교는 두 사람을 ‘할아부지’와 ‘선생님’이라 부른다. 예외적일 뿐만 아니라 문제적이기도 한 구도다.
《은교》의 문제성이 주인공들의 나이 차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두 남자의 관계 역시 문제적이다. 예순아홉 남자 이적요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시만 써 온 존경받는 시인이고 서른일곱 이혼남 서지우는 그의 제자이자 몇 권의 베스트셀러를 낸 소설가 다. 그러나 서지우의 이름으로 출판된 소설들이 사실은 이적요의 작품이라는 비밀을두 사람은 공유하고 있다. 재능 없는 제자가 문학에 목매다시피 하면서도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나머지 이적요가 자신의 재능을 빌려 준 것이다. 그러기까지는 서지우가 거의 아들처럼 이적요를 모셔 온 날들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은교》에서 세 사람의 문제적 관계를 끌고 가는 기본 동력은 은교를 향한 이적요의 갈망이다. 은교에 대한 이적요의 마음은 소설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그해 가을, 내 집에 하나의 움직이는 ‘등롱’이 들어왔다. 사실이다. 내 자의식에 인화된 사진 속 나의 집은 그애를 만나기 전까지 오로지 우중충한 무채색의 어둠에 싸여 있었다. 에드거 앨런 포의 허물어져가는 ‘어셔 가’ 저택처럼. 그애가 들어오고, 비로소 내 집에 초롱이 켜졌다.”
《은교》는 이적요가 숨진 지 1년 후, 그의 유언에 따라 변호 사가 그가 남긴 노트를 읽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 노트에서 이적요는 자신이 서지우를 죽였다는 놀라운 고백을 앞세운 다음, 자신이 어떻게 해서 서지우를 살해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소설은 이적요의 노트와 함께, 은교가 간직하고 있던 서지우의 일기를 병치시킴으로써 동일한 사태를 두사람의 관점에서 비교해 가며 관찰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한다.
“은교. 아, 한은교. 불멸의 내 ‘젊은 신부’이고 내 영원한 ‘처녀’이며, 생애의 마지막에 홀연히 나타나 애처롭게 발밑을 밝혀주었던, 나의 등롱 같은 누이여.”
세 사람의 문제적 관계, 비극적 결말
서지우를 죽이고, 자신마저 암종에 먹힌 육신을 섭생이나 의학적 치료로 돌보는 대신 술에 절여 자살과 다름없는 죽음에 이르기 직전 이적요는 이렇게 쓴다. 또 다시 ‘등롱’이 등장 하는 이 문장들에서도 그에게 은교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 수있겠거니와, 문제는 그의 이런 토로가 심각한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적요는 자신이 은교를 처음 ‘발견’했기 때문에 그 아이에 대한 ‘욕망의 저작권’ 역시 자신에게 있노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처녀’라는 표현에 그런 믿음이 반영되어 있다), 사실 은교를 먼저 본 것은 서지우 쪽이다.
학교 앞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려는 그 아이를 차에 태워 준것이 인연이 되어 서지우는 어느덧 은교와 섹스까지 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은교가 처음 이적요의 눈에 들어온 것 역시두 사람 사이의 약속에 의한 것이었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던 이적요는 서지우가 은교와 키스를 하고 가슴을 만지며 급기야는 섹스를 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처녀’를 서지우가 유린한 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은교의 어정쩡한 태도는 이적요의 그런 믿음을 부추기며 사태를 파국으로 치닫게 만든다. 서지우가 은교를 장래의 배우자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데 반해 은교는 서지우와 이적요 사이를 수시로 오가며 두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다. 이적요의 사후 그의 변호사를 만난 은교는 “두 분 다, 저는요, 진짜요,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것인데, 그것이 결국 두 남자의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이 말은 말하자면 ‘팜파탈(악녀)’의 선언이라 할 만하다.
그 선언이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 그리고 두 남자의 죽음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은교의 이어지는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할아부지와 선생님, 서로가 너무 많이 사랑 했다는 거예요. 절 사랑한 게 아니에요. 두 분하고 함께 있을 때마다 버림받은 기분은 제가 가져야 했다구요. 진짜로요. 끼어들 틈도 없었는걸요.” 그러니까 질투는 이적요와 서지우 사이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도 있었다는 것. 이 소설이 단순한 삼각관계의 통속 애정극으로 떨어지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도 있다.
은교의 이 말이 한갓 변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정황은 소설 속에 차고 넘친다. 가령 서지우는 이렇게 쓴다. “나는 선생님을 잃고 싶지 않고, 은교도 잃고 싶지 않다. (…) 은교를 ‘늙은이’로부터 지키는 것이 ‘늙은이’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길이 전혀 없을 땐아, 당신을 죽여서라도, 당신의 명예를 지키고 싶은 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그렇게 이적요를 지키기 위해 서지우가 짜낸 계책이 이적 요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배신감과 살의에 휩싸이게 만드는 과정은 이 소설을 고전적 비극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비극이란 단지 슬픈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재앙과 고통, 선의가 악의로 뒤바뀌는 운명의 드라마여야 비극이라는 이름을 감당할 수 있는 것. 소설 《은교》에서 세 주인공은 서로를 사랑한 끝에 죽이고 죽는 결말을 맞는다. 사랑이 상처를 초래하고 복수를 부르는, 진정한 의미의 비극이다.
이적요의 노트를 통해 우리 문단의 전근대성과 배타성을 질타하는 목소리에는 ‘인기 작가’라는 이유로 따돌림과 불이 익을 감수해야 했던 박범신 자신의 육성이 겹쳐 들린다. 《은 교》는 바로 그런 문단 주류에 맞선 작가 박범신의 자기 선언 이라 할 수도 있다.
최재봉
1961년 경기 양평에서 태어났다. 경희대 영문과와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 했다. 한겨레신문사에서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만나는 문학 기행》, 《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한국문학의 공간탐사》, 《최재봉 기자의 글마을통신》 등의 책을 썼고, 《에드거 스노 자서전》, 《클레피, 희망의 기록》, 《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같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