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전자책 시장은 과열 이라 불릴 만큼 많은 사업자들의 참여가 가속화되고 있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전자책은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는 사업아이 템이었고, 전자종이 디스플레이를 기반으로 하는 단말기도 몇종밖에 없었으며, 더욱이 최근 들어 전자책의 표준으로 주목받는 ‘EPUB’이란 파일 포맷조차 생소한 이름이었다.
현재 국내 시장은 대기업인 삼성전자와 중견 기업인 아이리 버가 전자책 전용 단말기를 시장에 내놓고 있으며, 교보문고, YES24, 인터파크와 같은 온라인 서점들은 물론 KT와 SKT 같은 이동 통신사들마저 전자책 분야로 사업 참여를 발표하고 서비스를 론칭했다. 더불어 방송과 신문 역시 업체들의 이 같은 행보를 주시하며 연일 전자책 수혜주에 대한 보도를 띄우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발 ‘아마존 킨들 신화’의 시장 부채질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새로운 시장의 창출로 이어질지 아니면 열병처럼 번지다 사그라질 하나의 트렌드로 끝날지 확신할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그 이유는 국내의 전자책 부활의 불씨가 궁극적으로는 관련 업계나 소비자 시장의 필요에 의해 시작된 게 아니라 2009년초 외신을 통해 전파된, 미국발 ‘아마존 킨들 신화’에서 촉발되 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욱 냉정하게 얘기해서 최근 몇 개월 사이에 전자책 시장에 뛰어든 대부분의 기업들은 사업에 대한 사전 준비가 충분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현재의 국내 전자책 시장 구도를 살펴보면, 정작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콘텐츠 생산자, 즉 출판계의 참여가 미비하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는 데, 그 중 하나는 지난 10여 년 동안 하락의 길을 걸어왔던 전자책 1세대들의 추락이다. 킨들의 성공 사례를 근거로 전자책 부활을 선동(?)하는 저널리스트들의 보도가 한창이었던 작년 이맘 때, 국내 출판계는 북토피아의 저작권료 미지급 및 경영권 분쟁 사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즉, 국내 출판계는 전자책으로 부터 이미 한 번의 쓰라린 실패를 맛보았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최근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유통사들이 사업 논의를 보면 출판계를 단순히 콘텐츠 제공자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 유통사가 거액의 계약금을 제시하며 독점 공급을 요구한다거나 저작권 보호 장치(DRM)와 정산 시스템 (BMS) 논의에서 출판계를 배제한 채 유통사의 일방적 결정을 수용하라고 요구하는 상황이 출판계로서는 다소 거부감이 있는 시장 구도라는 것이다.
여기서 외국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자.
전자책 부활의 진원지인 미국의 아마존은 2007년 11월 킨들의 첫 번째 모델을 출시하기 위해 2003년부터 이잉크 디스플레 이(e-ink display)를 탑재한 단말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5년에는 전자책 콘텐츠 및 솔루션 업체인 프랑스의 모비 포켓을 인수했다. 뿐만 아니라 저작권자와 출판권자들과의 협상을 통해, 디지털 서비스 환경에서의 신(新)저작권이라 할 수있는 ‘디지털 전송권’의 확보를 위해 노력해왔다.
즉, 아마존은 ‘킨들 신화’를 만들기 위해 서비스를 론칭하기 수년 전부터 전용 단말기와 콘텐츠를 축적했을 뿐만 아니라 저작권의 보호를 위한 기술적 반영에 출판계의 목소리를 귀담았던 것이다. 그 일례로 아마존은 작년 초 ‘킨들 2’를 출시한 지 2 개월여 만에 단말기에 탑재되어 있었던 TTS(Test to Speech :
인위적으로 음성을 합성하여 텍스트를 읽어 주는 기술)의 기능을 제한시켰다. 왜냐하면 일부 출판사들이 킨들 2의 TTS가 저작권을 침해한다는 소송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새 국면 만든 ‘한국출판콘텐츠社’의 등장
반면 최근 시장에 뛰어든 국내의 전자책 사업자들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업에 대한 준비가 충분하지 못한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여기에다 초기 시장 선점을 위해 사업자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저작권 보호 장치(DRM)를 내세워 소비자들을 자신들의 서비스 테두리 안에 가둬 두려는 정책을 갖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아마존의 킨들 신화가 국내 시장에 던져 준, ‘전자책 부활 가능성’이란 처방전의 부작용이 될지도 모른다.
인터파크는 자사가 판매하는 전용 단말기 외에는 콘텐츠를 서비스하지 않는다. YES24가 주도하는 컨소시엄 법인인 한국 이퍼브와 교보문고, 그리고 이동 통신사 KT의 경우에는 특정 단말기로 서비스를 제한하지 않는 오픈 플랫폼을 표방하지만
DRM만큼은 각기 독자적인 포맷을 사용함으로써 배타적인 서비스를 하는 셈이 됐다. 물론 어떠한 DRM과 플랫폼을 쓰느냐의 문제는 자율 경쟁 시장 논리에서는 기업에게 선택권이 있겠 지만 문제는 이러한 플랫폼 분야에만 기업의 역량이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국내 전자책 시장의 문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업자들이 단말기-콘텐츠-플랫폼 등 전자책 사업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에 대해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오로지 시장 선점을 위해서 각자의 플랫폼을 강화하는 데에만 역량 투입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우려하고 있는 점은, 침체된 출판 시장을 회복 시킬 가능성이 엿보이는 전자책 시장의 활성화가 어느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윤이 창출된다고 하면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별 성과가 없으면 하루아침에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거대 기업들의 행보를 자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시점에선 출판계가 어떤 방향으로 전자책 산업에 참여하는가가 중요한대목이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 출판인회의를 중심으로 모인 출판사들이 한국출판콘텐츠 (KPC)라는 컨소시엄을 출범시키면서 유통사들이 주도하던 전자책 시장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향후 이 시장이 어떠한 길을 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당분간 국내의 전자책 시장은 시장 구도 정립의 선상에서 출판권자, 유통사, 단말기 제조사들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는 게 일단 필자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