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적인 너무나 독일적인
막스 플랑크 평전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 이미선 옮김 | 김영사 펴냄)
“막스 플랑크를 아십니까?” 이 책 뒤표지 커버의 물음이다. 나는 이 책의 주인공인 독일의 물리학자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과학사의 플랑크 원칙’에 호감을 가진 정도다. 이 원칙은 독일의 과학사학자 겸 시사평론가인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막스 플랑크 평전》에도 나온다. “과학의 새로운 진리는 상대편을 설득하고 계몽시킴으로써 관철되는 것이 아니 라, 오히려 상대편이 점차 사라지고, 자라나는 세대가 처음부터 진리를 잘 알고 있음으로써 관철되곤 한다.”
사실, 나는 이 ‘훌륭한’ 이론물리학자의 온전한 이름을 그의 평전에서 처음 안다. 막스 카를 에른스트 루트비히 플랑크 (Max Karl Ernst Ludwig Planck, 1858-1947). 플랑크 이름에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베버, 《자본》의 마르크스, 《희망의 원리》의 블로흐, 그리고 악성 베토벤이 있다. 이름에서 보듯 막스 플랑크는 독일적이다.
그것도 지나치게. 그래서일까. 아내와 자녀 넷을 앞서 보낸 그의 불행보다 ‘마녀사냥’에 시달린 미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고난에 더 연민을 느끼는 것은.
반면 두 사람을 다룬 평전은 《베일 속의 사나이 오펜하이머》(제레미 번스타인 지음, 유인선 옮김, 모티브북, 2005)보다 《막스 플랑크 평전》의 밀도와 수준이 더 높다. 이러한 차이점은 분량의 많고 적음에 따른 것은 아니다. 《막스 플랑크 평전》의 색다른 구성에서 연유하는데, 에른스트 페터 피셔는 막스 플랑크의 생애와 그 시대 과학의 흐름을 균등하게 다룬다. 이론과 실제의 결합은 효과적이다.
플랑크의 삶과 맞물린 과학의 역사는 단지 배음을 이루거나 시대적 배경으로 그치진 않는다. “플랑크의 생애 동안 과학은, (약간의) 결정론적 법칙과 함께 (훨씬 많은) 미래 사건의 예측 가능성을 (훨씬 덜 결정적인) 새로운 빛으로 감싸는 통계적 법칙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때로 에른스트 페터 피셔는 시야를 좀 더 넓힌다. “필자와 이 책을 읽을 독자들중 일부가 부분적으로는 함께 경험했을 전후(戰後) 세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서양 역사에 가장 드라마틱한 한 시기가 이 책에서 펼쳐지는 것을 볼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학문을 전달하는 것은 어렵다는 막스 플랑크의 견해를 ‘받든’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동조한다. “‘과학에 대한 대중의 이해’가 아니라 ‘과학에 의한 일반적인 이해’가 중요하다.” 피셔는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대중 앞에 나섰던 플랑크의 선례를 따른다.
아니, 그는 더 적극적이다. 하지만 피셔가 펼치는 ‘과학에 의한 일반적 이해’는 꽤 까다롭다. 책을 읽으면서 한국어판에 부록으로 〈양자가설에 대하여〉(박병철)를 덧붙인 까닭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막스 플랑크의 생애와 그 시대 과학의 흐름
막스 플랑크는 작용양자의 창안자다. 양자역학과 양자물 리학을 낳은 플랑크의 양자이론은 “눈에 보이는 빛의 파동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열복사 모두 속하는 전자기파의 에너지는 불연속의 덩어리 형태로만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다. “그러한 작은 덩어리를 우리는 오늘날 프랑크의 제안에 따라 ‘양자(Quantum, 量)’라고 부른다.” 또한 “플랑크는 그의 이론에서, 주어진 진동수와 함께 진동하는 파동은 그 진동수에 비례하는 에너지를 사용한다고 덧붙였다.” 이를 공식 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E=h·υ
“우리는 이 공식을 ‘E는 에이치 뉴’라고 읽는다.” 뜻하는 바는 “한 파동의 에너지는 그의 진동수에 비례한다”는 의미다.
h는 프랑크 상수(작용의 양자도약)이며, 그리스 알파벳 υ는 빛의 진동수를 표시한다. 그런데 E=h·υ와 아인슈타인의 전설적인 공식 E=mc²에서 “물리학적 정교함에 주의를 기울 이지 않은 채 두 에너지를 동일시한다면 다음과 같은 기이한 관계가 도출”된다.
h·υ=mc²
“이 관계는 하나의 진동수가 하나의 질량 m에 편입될 수있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에너지가 진동수에 비례한다면 그것은 질량일 수도 있다. 이러한 동일시는 하나의 질량 입자가 파동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혀준다. 이것은 1905년에 사람들이 충격으로 받아들였듯 상식 밖의 생각이 었다. 하지만 이 생각은 놀랍게도 20년이 지난 뒤에는 ‘옳다’ 고 인정되었고, 원자물리학과 그 기반에 놓여 있는 이론을 철학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되도록 만들었다.”
1920년대 중반,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을 원자적 실재 (Realitat)에 대한 모순 없는 이론으로 공식화하는 데 성공 한다. 이로써 양자이론은 실험 자료들을 적합하게 설명하는 것에 더하여 새로운 세계관을 밝혀주게 된다. 그러면 막스 플랑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플랑크의 인간적 면모를 살펴 보면, 먼저 그는 학파 같은 것을 만들지 않았다. 막스 플랑크는 각기 ‘세력’을 형성한 어니스트 러더퍼드, 닐스 보어, 아르 놀트 조머펠트 같은 동시대 물리학자들과 달랐다.
막스 플랑크는 자신의 학생들과 대학 직원 및 동료 학자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인 친절한 사람이었다. 플랑크가 발탁한 여성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는 ‘아버지 프랑크’라고 말할 정도였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불필요한 자기표현을 위해 쓸데 없이 발언하지 않는 플랑크의 겸손함을 높이 샀다. 하지만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고 우리 없이도 계속되는,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을 믿는다는” 플랑크식 현실주의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2차 대전 동안 플랑크는 그의 조국에 남았다. 독일에서야 플랑크는 당연히 애국자다. 우리는 나치에 협력하진 않았어도 독일 과학의 명맥이 끊어질까 노심초사했던 그를 어찌 봐야 하나?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유한하다. 하지만 한계는 없다.” 거꾸로 우리가 사는 공간은 무한하되 한계가 있는 걸까? 객관적인 학술적 고찰을 하면, 인간의 의지는 결정론 적이지만 “자의식의 주관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기 때문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물리학이 다루는 것은 불연속의 원자”라서? 나는 히틀러와 독일 역사의 관계에선 연속성을 중시하는 고전물리학의 세계관을 견지한다. 어쨌거나 《막스 플랑크 평전》은 막스 플랑크보다 매력적인 단단한 책이다.
최성일
1967년 인천 부평 출생. 인하대 국문과를 나와 3년간 백수로 지내다 〈출판저 널〉 기자로 발탁됨. 일찌거니 프리랜서로 나섬. 지은 책은 《테마가 있는 책 읽기》와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전4권)》 말고도 두 권 더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