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진화 아닐지도 모를 암시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 김동광 옮김 | 경문사 펴냄)
독서는 계기가 중요하다. 책에, 독서에 처음 빠져드는 것부터 그렇다. 아무리 사소할 지라도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한다. 읽을 책을 고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 무작정한 마구잡이식 책읽기는 흔치 않은 일이다. 하다못해 베스트셀러라는 손쉬운 계기라도 붙잡아야 한다. ‘(읽은) 책이 (읽을) 책을 낳는다’는 독서 속설에 기대는 게 매우 바람직하긴 하다.
“찰스 다윈 이후 가장 잘 알려진 생물학자”(출처는 아마도 <뉴스위크>)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1942-2002)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학자다. 나는 그를 꽤 일찍 만났다. 나는 굴드의 책 가운데 맨 먼저 우리말로 번역된 《다윈 이후》(홍동 선·홍욱희 옮김)범양사출판부, 1988)를 출간 한 달이 채 안 된 시점에서 구입했다.
어째서 이 책을 골랐는지는 잊었지만, 이 책을 통해 스티븐 제이 굴드의 세계에 이르게 진입하는 행운을 누렸다. 《다윈 이후》는 내가 첫손꼽는 멋진 번역서다. 번역문이 유려한 이 책을 2009년 사이언스북스에서 다시 펴냈다.
이렇다 할 계기를 마련하지 못해 뒤늦게 읽은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Wonderful Life)》(2004)는 《다윈 이후》 못잖게 아름답다. <내추럴 히스토리> 연재 칼럼을 엮은 굴드의 다른 책들과 달리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는 “특정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서 한 권을 모두 할애(옮긴이의 글)”한 전작(全作)이다. 버제스 혈암 (Burgess Shale)을 다룬 그의 모노그래프이기도 하다.
굴드는 ‘서문 및 감사의 글’에서 “과학적 개념은 그 모든 풍부함과 다의성(多義性)이 타협이나 왜곡으로 간주될 수 있는 단순화 없이 지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될수 있다”고 말한다. 과학적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에게 과학의 신비화를 조장할 수있는 전문 용어를 다른 적절한 말로 바꿀 순 있어도 “전문적인 저작과 일반인을 위한 해설서 사이에서 개념상의 깊이가 달라지면 절대 안 된다.” 그런데 이 책에 자주 나오는 ‘혈암’에 대해 별다른 설명이 없다. ‘모노그래프’에 관한 내용은 퍼뜩 와 닿지 않는다.
버제스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세부적 사실
인터넷에서 검색한 ‘혈암(頁巖, shale)’의 뜻풀이는 이렇 다. “점토가 퇴적되어 고화된 암석 중 특히 어떤 방향에 연하여 판상으로 일어나기 쉬운 암석을 말함. 이암(泥岩)이 가벼운 광역 변형 작용을 받아 생기는 경우가 많음. 고생대의 퇴적암에서 많이 볼 수 있음.”(토질 및 기초 기술사 자료방 cafe.daum.net/togimo) 버제스 혈암은 “5억 3천만 년전의 해저에 살던 구접스러운 작은 동물들”을 ‘품고’ 있다.
‘모노그래프(monograph)’의 사전적 의미는 “(특정 단일 소분야를 테마로 한) 연구 논문, 전공 논문”이다. 굴드가 말하는 모노그래프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하는 분류는 이러한 계통 순서를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분류학이란 진화적인 배열의 표현인 셈이다. 그러한 노력을 위한 전통적 매체가 모노그래프이다 ― 즉, 사진, 그림, 공식적인 분류명 등이 기술된 모노그래프이다. 대개 모노그래프는 전통적인 학술 지에 발표하기에는 지나치게 길다.”
모노그래프적인 연구는 기술(記述) 중심인 듯싶다. 그리고 세부적이다. “버제스 이야기가 아름다운 것은 그 세부적인 사실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부란 해부학적인 세부이다.
물론 독자들은 해부학적인 설명을 읽지 않고 건너뛰어도 이책이 전하려는 일반적인 메시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가능하면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해부학적 내용을 건너뛰면 여러분은 버제스 드라마의 빼어난 아름다움과 강렬한 흥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고생물학은 대단히 실증적인 학문
굴드가 이 책을 쓴 목적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이 책에 들어 있는 재해석의 표면적인 평온함 뒤에 감추어진 치열한 지적 드라마의 연대기이다. 둘째, 그 피할 수 없는 함축으로 역사의 본질, 그리고 인류가 진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가능성을 암시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세 번째 주제는 이처럼 근본적인 연구 계획이 왜 지금까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는가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것이다.”
‘월코트의 구둣주걱(Walcott’s shoehorn)’이 아는 만큼 본다는 것의 한계를 드러낸다면, 버제스 동물군에 대한 재해 석은 보고 또 살펴봐야 제대로 안다는 점을 입증한다. ‘월코 트의 구둣주걱’은 1909년 미국의 고생물학자 찰스 두리틀 월코트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요호국립공원 내의 로키산맥 고지대에서 발견한 버제스 혈암의 무척추동물군과 관련 있다. “그것은 월코트가 버제스 동물군의 모든 속(屬)을 이미 알려진 주요 그룹에 억지로 밀어 넣기로 한 무모한 결정을 뜻하는 말이다.” 전통적인 생명관에서 직접적으로 발생한 월코트의 잘못된 해석은 50년 넘게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았다.
1970년대 모노그래프에 의한 버제스 혈암의 재검토 연구 프로그램은 영국 고생물학자 셋이 주도한다. 케임브리지대학 지질학 교수 해리 휘팅턴과 그 휘하의 대학원생 사이먼 콘웨이 모리스와 데렉 브릭스가 그들이다. 세 사람은 1980 년대까지 이어진 연구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그들은 월코트가 발굴한 화석 표본 8만 점을 꼼꼼히 살폈다. 휘팅턴은 버제스 혈암에서 가장 흔하게 나오는 마렐라속(屬, Marrella) 연구에만 꼬박 4년을 바쳤다. 굴드는 이 세 사람을 최초의 노벨상 고생물학 부문 수상자로 선정하는 데 주저 하지 않았다. 노벨상에서 고생물학 부문은 아직 없지만. 이제 보니 고생물학은 대단히 실증적인 학문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 하지 않다》(김승욱 옮김, 알마, 2008)였다. 히친스가 그의 책에 인용한 대목의 일부를 원저에서 옮겨 적는다. “생명의 테이프를 버제스 시대까지 되감아서 다시 재생해 보자. 만약 이 재생에서 피카이아가 살아남지 않는다면, 우리는 미래의 역사에서 말소된다 ― 상어에서 시작해서 개똥지빠귀와 오랑우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사리지는 것이다. 또한 오늘 날까지 밝혀진 버제스 증거를 고려할 때, 어떤 도박사도 피카이아가 계속 생존하는 쪽에 내기를 걸었으리라고는 생각 하지 않는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오랜 팬인 내게도 이 책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최성일
1967년 인천 부평 출생. 인하대 국문과를 나와 3년간 백수로 지내다 〈출판저널〉 기자로 발탁됨. 일찌거니 프리랜서로 나섬. 지은 책은 《테마가 있는 책 읽기》와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전4권)》 말고도 두 권 더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