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을 살다 100세 땐 곡기마저 끊다
스콧 니어링 자서전
(스코트 니어링 지음 | 김라합 옮김 | 실천문학사 펴냄)
가지 않은 길을 가라 한다. 얼마나 좋은 말이던가. 다른 이들이 간 길은 이미 닦여 있는 길이다. 그 길은 평탄할 터다. 수많은 사람이 밟고 다닌 길이니까. 그 길로 가면 그만큼 편안할 것이다. 외롭지도 않으리라. 그 길로 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니까. 그런데도 그 길로 가지 마란다. 그렇다면, 그 말은, 그러니까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란 그만큼 어렵고 힘들고 외롭다는 뜻일 터다. 그런데도 가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세상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자학적으로 내뱉은 말이런가, 아니면 인생 대역전을 꿈꾸는 이들이 도박사 기질을 발휘해 한 말일까.
《스콧 니어링 자서전》을 읽다 보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러나 얼마나 가치 있는지 깨닫게 된다. 그러니 서둘러 말하자면, 삶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싶은 이들만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셈이다. 아무나 갈 수 없지만, 누구라도 가면 세상을 바꿀 작은 씨앗을 심는 격이다. 그러니 그 길을 가라고 말해온 모양이다, 세상의 현인들이.
앞부분부터 흡인력 대단한 ‘좋은 자서전’
20세 연하의 아름다운 부인과 자연을 벗하며 살아온 이야기
로 스콧 니어링은 국내 독자를 사로잡았다. 거기에다 100세가 되던 해, 곡기를 끊어 자신이 한낱 자연의 일부임을 확인하며 세상과 맺은 인연을 끊었다. 마치 천상병 시인처럼 그는 한 세상 ‘소풍 왔듯’ 살다가 돌아갔다. 그러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 였을 터다. 속세를 떠나 한 깨달음 얻은 선승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니까. 그렇지만, 자서전을 읽어 보면 그가 얼마나 치열 하게 살았는지 알게 된다. 말하자면, 열심히 일한 자만이 휴가 라는 달콤한 열매를 맛나게 먹을 수 있듯, 자유로운 영혼을 얽매는 세상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친 자만이 탈속의 경지를 거닐 수 있는 법이다.
좋은 자서전은 앞부분부터 흡인력이 대단한 법이다. 스콧 니어링은 마치 잘 만든 영화 예고편처럼 자신의 삶을 압축한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오하이오 주 톨레도 시의 샘 존스 시장이 저명인사와 함께 저녁을 먹으려고 호텔에 들렀단다. 그 때에는 별난 관습이 있었으니, 호텔 식당에 들어가기 전 방명록에 이름을 적었다. 맨처음 사인을 한 목사는 이름 뒤에 D.D(신학박사)라 썼다. 두번째 사람은 Ph.D(철학박사)라 썼다. 샘 시장 차례가 왔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름 뒤에 L.L.L이라 적었단다. 모른 척하면 될 것을 옆에 있는 신학박사가 깐죽거렸다. “잠깐, 샘, 잘못 쓴 것 같은데. 자넨 대학 문턱에도 가 본 적이 없잖나?”
그러자 산전수전 다 겪은 자수성가형의 시장이 재치 있게 응수했다. “천만의 말씀! 난 이래 봬도 인생의 역경이라는 대학을 다닌 몸이오. 우리 대학 교기의 색깔은 시퍼렇게 멍든 색이 고, 구호는 ‘아얏!’이지.”그러자 당황한 신학박사가 되물었다.
“그럼 L.L.L은 무엇인고?” 샘이 어록에 남을만한 대답을 했다. “그건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운다(Learning, Learning, Learning)는 뜻이라네.”
이 에피소드 끝에 니어링은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다.
“나는 인생의 기초를 배우는 데 1883년부터 1917년까지 무려 3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내 인생의 처음 삼분의 일은 다른 사람의 말을 무조건 외우는 간접 경험 위주의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절이 차지했다. 그 시절엔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비교적 탈 없이 지냈다. 샘 존스의 모교인 ‘인생 역경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나는 비로소 인생이 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시작 했다. 이 과정을 다 이수하고 나면나 역시 L.L.L 학위를 받을 날이 오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이 글은 니어링이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교육을 받고 제법 뽐낼만한 인생을 살다, 어느 순간 맞이한 삶의 고비에서 큰변화를 겪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삶의 한 부분은 남이 걸어간 길을 갔고 다른 부분은 가지 않은 길을 갔는데, 그 길은 거칠고 외롭고 힘든 길이었음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학위 운운한 것은, 그 삶에서 배우고 깨우치고 익힌 것이 많다는 것을 뜻하는 바이니, 결국에는 가지 않은 길을 간 삶이 보일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가지 않은 길’로 가라 일러준 스승, 패튼 교수
니어링은 자신을 있게 한 스승을 소개한다. 먼저 남들이 간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 스승. 누구에게나 그러하겠지만, 최초의 스승은 어머니였다. 18살에 결혼해 뉴욕 시에서 20마일 떨어진 고향을 떠나 펜실베이니아 북부의 험하고 가파른 애팔래치아 산맥에 있는 모리스런 탄광 벌목촌으로 왔다. 이 정도면 익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세련되고 자상하며 교육에 관심이 높으면서도 당당하고 개척적인 분이었다는 것을. 니어링은 어머니에 대해 “나에게 문학과 내가 살아가야 할세상에 대해 입문적 지식을 전수했다”고 말한다.
두 번째 스승인 할아버지 윈필드 스콧 니어링은 다분히 문제 적인 인물이다. 할아버지는 모리스런 마을의 탄광 및 벌목 사업의 감독자였다. 작은 키에 호리호리한 체구, 턱수염이 덥수 룩했다 하니, 옹골찬 인물이었을 듯싶다. 니어링의 회고를 재구성해보면, 할아버지는 한 지역의 경제를 장악한 불같은 성격의 보스로 거칠지만 당당 하고, 성찰적이지는 않으나 독창성 있는 기술자로, 자신이 길을 개척해나가는 남자의 세계를 상징한다 보면 된다.
역시 누구에게나 그러하 듯, 어머니와 할아버지는 니어링이 세상을 살아갈 수있는 기본기를 닦는 데 큰도움이 되었다. 두루 갖추 어진 환경에서 여러 어른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다는 것은 흔치 않은 축복이다.
니어링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여기까지가 그의 보수성의 세계다. 달리 말하면, 남들이 가는 길을 재빠르고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실력을 닦은 시기인 셈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가지 않은 길을 가라고 일러준 스승도 있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워튼 스쿨의 경제학부 학과장인 사이먼 넬슨 패튼 교수. 요즘말로 하면 자기 주도 학습과 토론 수업을 열정적으로 진행하며 니어링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패튼교 수는 사회의 개선과 조절이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스승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과 부적응자나 범법자들과 같은 사회의 희생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훗날 청출어람(靑出於藍)한 니어링은 그와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한 가지에서만은 늘일치했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 이다.
무엇이 달랐을까? ‘울타리와 구급차’라는 시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어느 절벽에서 사람들이 떨어져 죽거나 부상을 심하게 입었다. 마음 착한 이들이 구급차를 사 그곳에 두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절벽 둘레에 울타리를 쳐야 한다고 말했다.
패튼은 구급차를 사자는 쪽에 있었고, 니어링은 울타리를 치자고 말하는 쪽에 있었다.
달랐지만, 니어링은 결국 스승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할 운명이 었다. 전쟁 반대를 내세우며 대통령에 당선된 윌슨이 참전 쪽으로 기울어졌다. 반전 의지는 높았지만 권력의 탄압도 만만치 않았다. 필라델피아에서 반전 집회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전쟁이 공식 포고되자 서로 집회 의장직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급진적인 성향을 띠지 않았지만 패튼은 아무도 맡으려는 사람이 없다고 하자 의장직을 받아들였다. 결국 집회는 열리지 않았지 만, 펜실베이니아대학 이사회는 “비애국적 운동에 이름을 빌려주었다는 이유로” 패튼 박사를 해임했다. 적극적으로 전쟁을 반대하고 일하는 사람의 권익을 옹호하다 대학교수직을 박탈 당하는 니어링 삶의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그를 만든 마지막 스승은 대문호 톨스토이
니어링을 만들어준 마지막 스승은 톨스토이다. 이 러시아의 대문호는 출신 계급의 세계관에 갇히지 않았다. 정의의 자리에두 발을 굳건히 세우고 탐욕과 경쟁, 그리고 특권에 맞섰다. 그의 삶은 저항적이었지만 비폭력적이었으며, 자신이 내세운 바를 먼저 실천하려 했다. 니어링의 말대로 “인간다운 삶을 향한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고자 그는 온갖 구속을 뛰어넘어 저항”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니어링은 이들한테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배웠을 까? 한마디로 “편견을 경멸하고, 도그마를 부인하고, 끊임없이 실험을 추구하는 자세”였으니, 그 결과, 다음의 말에서 확인할수 있듯 그는 보수적이면서도 급진적인 인물로 성장했다.
“나 역시 미국 기성 사회의 일부이자 한 구성원이었다. 나는 미국 사회의 원칙을 신봉하고, 그 가능성에 기대를 걸며 미래에는 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내가 속한 사회가 당시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건전하고 합리적이며 친절한 사회였다 면, 나는 성실하고 헌신적인 시민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기질상 반항아나 선천적인 반골은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체제에 맞서는 반체제 인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법의 지배를 신봉 했고, 그 법을 준수하고 바람직한 관습을 지키는 것을 당연한 책무로 알고 있었다. 친구들 중에는 나를 보수적인 급진주의자라 부르는 이도 있다.”
니어링은 살아가면서 “진실을 배우고, 그것을 가르치고, 사회 에서 진실을 구현하는 데 일조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 그래서 “부와 가난 사이의 극심한 모순과 착취의 불공정, 계획적인 대량 살상과 파괴를 폭로”했으나, 그 대가는 쓰디 써두 번이나 대학에서 해직되는 아픔을 겪었다. 가지 않은 길에는 반드시 가시밭길이 펼쳐져 있게 마련이다. 그의 삶에서 두번째 분수령은, 익히 알려진 귀농 생활이다. 귀농이라 해서 싸움의 현장에서 물러섰거나, 낭만적으로 삶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것이라 보면 안 된다. 그는 경쟁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운 서구 문명에 반기를 들고 생태친화적 삶을 통해 대안을 모색했던 것이다. “노동 4시간, 지적 활동 4시간, 친교 활동 4시간으로 꾸릴 수 있는 ‘조화로운 삶’(good life)”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삶의 모습이지 않던가. 중요한 것은, 이를 꿈의 자리에 가두어 두려는가, 실현하려는가에 있다는 것을 니어링은 보여준다.
《스콧 니어링 자서전》은 한 사람의 삶보다는 그 과정에서 깨우치고 영근 사상을 장황하게 펼쳐놓은 책이다. 세계의 패권 국가로 군림하고 있는 미국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면, 이 책을 통해 어떤 과정을 통해 진보적이고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참여 적이었던 사회 분위기가 보수화하였는지 알 수 있다. 말하자 면, 좌절한 미국 진보의 이면사라 할 만하다. 거기에다 사회주 의자로서 공산주의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기대와 염려도 나와 있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로 그의 판단이 빛 바란 바 많지 만, 그래도 경청할 대목은 여럿 있다.
니어링은 우리에게 세상의 고통에 눈감지 아니 하면서도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무엇인지, 그리고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는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었다. 가지 않은 길을 간 이만이 다음 세대에게 남겨줄 수 있는 ‘위대한 유산’이다.
이권우 도서평론가·안양대 강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