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기관들은 단체 결근 중?
생활용품이 우리를 어떻게 병들게 하나
(폴 D. 블랭크 지음 | 박정숙 옮김 | 에코리브르 펴냄)
《생활용품이 우리를 어떻게 병들게 하나(How Everyday Products Make People Sick: Toxins at Home and in the Workplace)》는 한국어판 뒤표지의 상찬(賞讚)을 받고도 남을만한 필생의 역저(力著)다. “우리 시대에 상당히 열띠고 중요한 환경과 직업 건강 문제를 탁월하게 통합한 책.
폴 블랭크는 직업병의 오랜 역사와 함께 지금 우리가 사는 곳에 깃든 유독 환경을 냉철하게 바라보도록 안내한다.”(데이비드 로스너, 《속임과 부정(Deceit and Denial)》의 저자) 폴 D. 블랭크(Paul D. Blanc)는 산업의학자다. 누군가 그의 직업을 물으면 그는 ‘산업의학’이라 답한다. 그러면 대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데 이를 깨기 위한 설명을 덧붙인다.
“사람들이 직업이나 환경오염 때문에 걸리는 질병을 치료하는 일이지요.” 말하자면 그는 독성 물질 관련 산업재해 전문 가다. “이 책은 법을 우습게 아는 제조업자만큼이나 해로운, 평범하면서도 예외적이지 않은 제품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갖가지 생활용품에 동반 되는 이야기다. 부엌 서랍 안에 있는 접착제, 세탁실 선반에 놓인 표백제, 옷장에 보관된 레이온 스카프, 문에 달린 놋쇠 손잡이 또는 베란다 널빤지 등등.”
블랭크는 우리 환경 내부에서 사실상 ‘새로운’ 것을 대상으로 하는 단순하면서도 부정확한 가정들 중 몇몇을 되짚는 것으로 말문을 연다. 그것은 최근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초근대 목록 들인 수질오염과 대기오염, 일터와 학교에 존재하는 석면 섬유, 손목굴 증후군, 빌딩 증후군, ‘탈진’(burnout) 등으로부터 출발한다. 손목굴 증후군은 ‘오래된 것이 다시 새로워진’ 적절한 사례다. 손목굴 증후군과 유사한 ‘반복 사용 긴장성 손상 증후군’에 대한 증거는 문서화된 인류 역사 곳곳에 존재한다.
규제 조치 허무는 오염 책임자들의 ‘네 가지 전략’
오염 책임자들은 크게 네 가지 전략으로 규제 조치를 허물 어뜨린다. 먼저 ‘사실을 입증하기에는 정보가 불충분하다’는 비난은 우리에게 익숙한 그들의 공격적 방어 전략이다. 둘째, ‘희생자 비난하기’ 역시 선례가 많다. 셋째는 ‘기계 파괴자’ 같은 딱지를 붙여 몰아세운다. 끝으로, 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보호 규제에 반대하는 가장 현대적인 방식이다.
이러한 책임 회피 전략이 아무리 효과적일지라도 블랭크의 엄정한 진단까지 비켜갈 순 없다. 기업의 자율 규제와 “자유 방임주의 보호는 전적인 실패로 판명되었다. 오랫동안 기업 이익을 명분으로 방해받았지만, 오직 철저한 금지만이 공공 안전을 위한 적정 한계선을 제공했다.” 또한 블랭크는 통제권 바깥에서 이익을 얻었던 무리들의 최후 발악이 가져올 여파를 우려한다. “궁극적으로 보면 보호 장치가 가동된다 해도 정작 실행되는 부분은 매끄럽지 않을 것이고, 그것이 고장 난다 해도 대체품이 없을 것이다.”
접착제를 다룬 부분은 기초 화학 지식 밑천이 풍부하다. 콜라겐(collagen)은 단백질 폴리머(polymer, 重合體), “다시 말해서 반복적 아미노산 배열이 기본 구조인 분자들의 특정한 범주”다. 셀룰로오스(cellulose)는 자연계에서 발생하는 당(糖)의 아주 긴 중합체 스트링(string)이고, 셀룰로이 드(celluloid)는 새로운 수지 물질 중에서도 가장 먼저 발명된 산업용 플라스틱인 나이트로셀룰로스(nitrocellulose) 를 응용해 만든 영화 필름이다. 그런데 “나이트로셀룰로스와 셀룰로오스 아세테이트[초산 섬유소, 醋酸纖維素]는 진정한 인공 물질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평범한 천연 중합체인 셀룰로오스를 그저 사람들이 약간 변형시킨 물질에 불과했다.”
유기 중합체 계열의 합성수지인 폴리염화비닐(poly vinyl chloride) 제품의 최초 상표명은 코로실(Koroseal)이었다.
코로실은 과학적 명칭으로 더욱 널리 알려졌고, 과학적 명칭은 머리글자인 PVC를 거쳐 비닐(vinyl)로 정착한다.
염소(Cl, 鹽素)의 발견은 과학사의 대단한 사건인 모양이 다. “1774년 소금 ‘쪼개기’는 나름대로 그보다 150년이 지나 서야 가능했던 핵분열만큼이나 위대한 과학의 전환점이었 다.” “염소는 화학이 성장하도록 돕는 강장제였다.” 유기 화합 물에 속하는 독성 물질인 이황화탄소(CS₂)를 새롭게 발견한 다. 이황화탄소는 우리의 가까운 과거와도 연관 있다. “한국 또한 이황화탄소 중독이라는 유행병을 경험해야 했다. 장기간에 걸쳐 심각하게 영향을 끼치는 사례가 넘쳐나자 한국 정부는 이황화탄소 중독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특별 병원을 열었고, 1999년에는 무려 중독 환자 800명이 치료를 받았다.”
몇 군데 오자까지도 눈감아줄만한(?) 가치 있는 역작
공장열(mill fever)이라고도 하는 ‘직업열’은 위험 사회의한 증상이다. “직업열은 곡물 먼지를 마시면서 일하는 농부, 환기구에서 나오는 오염된 공기를 흡입하는 사무실 노동자, 심지어 바닥에 건초를 깐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도 똑같이 위험에 빠뜨린다.” 대표적인 신흥 독성 물질인 목재 방부재와 휘발유 첨가제가 꾸준히 발전한 궤도를 추적한 것도 흥미롭 다. 아니, 충격적이다. 목재 방부재는 베트남에 살포된 고엽 제와 한통속이었다. 목재 방부재 못잖게 위험한 독성 물질인 가솔린 연료 첨가제는 뇌를 손상시켜 파킨슨병(Parkinson’ s disease)을 불러올 수 있다.
저자의 진보적 시각은 풍부한 내용과 함께 더욱 돋보인다.
블랭크에게 “목재 방부재에 관한 한 규제 기관들은 마치 단체로 무단 결근을 한 것처럼 보였다.” 직업과 환경 보호를 둘러싼 다툼은 “반드시 지속적으로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원시적인 공장 노동자 보호 정책안마저 맹렬히 비난한 19세기 영국의 개혁가 헤리엇 마티노(Harriet Martineau)의 보수적 행보와 가황 작업장 에서 발생하는 이황화탄소 노출을 줄이는 것에 대한 프랑스 의사 오귀스트 델페시(Auguste Delpech)의 실용적 충고는 사뭇 대조적이다. 블랭크는 델페시 같은 선각자들에게 이책을 바친다.
연도(年度) 두 곳에 오자가 났다. “1971년”(299쪽 첫줄)은 ‘1981년’이 맞고, “1975년”(309쪽 아래서 여덟 줄)은 ‘1795 년’이다. 앞뒤 문맥과 관련 각주를 근거로 교정이 가능하다.
숫자를 하나 더 교정하면, 171쪽 맨 밑줄의 “세계대전”은 “2차”가 아니라 ‘1차’다.
최성일
1967년 인천 부평 출생. 인하대 국문과를 나와 3년간 백수로 지내다 〈출판저널〉 기자로 발탁됨. 일찌거니 프리랜서로 나섬. 지은 책은 《테마가 있는 책 읽기》 와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전4권)》 말고도 두 권 더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