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한 눈길로
소멸을 인정 하는 애틋함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
(엄원태 지음 | 창비 펴냄)
오랜만이다. 첫 페이지를 넘기니 입술이 절로 달싹거린다. 요즘의 시는 낭송이 어려워 눈으로만 읽었던걸 생각하면 의외다. 그렇다고 운율, 가락이 넘치는 것이 아닌데도 그저 소리 내어 읽고 싶어진다. 엄원태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먼 우레처럼 다시올 것이다》(창비 펴냄)는 육성으로 쓴탓일 게다. 시에서 깊은 울림이 퍼진다. 엄 시인은 오랫동안 병마와 싸워온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서일까? 소멸에 대한 담담한 긍정이 넘친다. 애틋함 속에 아름다 움이 깃들어 있다. 엄원태의 시에서 소멸은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 아니 다. 다만 “덧없이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기록이자 애도”라는 시인의 말처럼 살아 있음의 소중함이 담겼다.
그 애틋함으로 ‘너’와 교감하고, 교류하고, 바라보고, 얘기를 들어주고, 그소멸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나와 교류, 교감하고 사라진 것들은 ‘먼 우레 처럼 다시 올 것이다’라는 제목이 밝히듯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는 것들 이다. 그래서 세상과 싸우거나 조롱, 냉소,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절실하다. 나와 ‘너’의 거리는 불과 몇십 미터일 수 있고 우주만큼 아득한 거리일 수도 있다. 세상은 언제나 생멸을 반복하고, 인간은 그 궤도에 잠시 올라탔다 내리게 마련이다. 인생에서 희로애락이 공존한다는 것, 우리는 100퍼센트 순도 높은 생을 기대할 수 없다.
깊은 울림이 퍼지는 네 번째 시집
“밭모퉁이 빈터에 달포 전부터 베로니카 은하가 떴다. 봄까치꽃이라고도 한다. 베로니카 은하에서 연보랏빛 통신이 방금 도착했다. 워낙 미약하여서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인근 광대나물 은하까지는 불과 몇십 미터 이지만, 꽃들에겐 우주만큼이나 아득한 거리일 터. (……) 당신이 까닭 없이 서러워져 홀로 들길 걸어 집으로 돌아가던 때, 저 외진 지상의 별무리 들에게 그렁그렁 눈물 어린 눈길을 주었던가. 그래선지 오늘 내가 거기서 왠지 서러운 빛깔의 메시지를 전해 받는다. 슬픔도 저리 환하다.”(<4월> 중)
그런 ‘너’의 거처는 ‘타나 호수’다.
타나 호수는 내 흉강의 한쪽이며 횡격막과 고통의 임계 지점에 있다. 결국 나는 ‘너’와 객체이면서 일체이고, ‘너’의 숙주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에서 ‘너’는 사라져도 펠리컨들이 5,000년을 기다릴 수있는, 말하자면 영원한 곳에 순간을 머물고 있다.
“이제 너는 타나 호수로 돌아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타나 호수, 내 침침한 흉강 한쪽에 넘칠 듯펼쳐져 있다. 거기에 이르면 슬픔이 꾸역꾸역 치미는 횡격막을 건너야 한다. 고통의 임계 지점, 수평선 넘어가면 젖가슴처럼 봉긋한 두 개의 섬에 봉쇄수도원이 있다. 우리는 오래전 거기서 죽었다. 파피루스 배 탕크와는 한때 내 몸이었다.” (<타나 호수> 중)
그런 ‘너’는 비닐봉지가 돼 ‘자늑자늑 바람을 껴안고 나부끼’(<독무>)며 ‘하염없는 몸짓’의 적요한 독무를 펼치 기도 하고, 때로 산길을 내려올 때 ‘제법 굵은 삭정이’로 ‘한 걸음 앞쯤에 뚝떨어지’(<나무가 말을 건네다>)거나 ‘자귀나무 분홍 꽃술’(<붉은 버섯을 보다>)이 되기도 한다. ‘너’는 소멸 혹은 소멸 직전에 나에게 사로잡혀 뼈저린 고통을 주는 존재들이다. 삶에서 도망 치듯 멀리하려거나 도망치려 애쓰는 것은 언제나 알고 보면 마음속의 괴로 움이거나 집착일 수 있다. 그래서 버릴 수 없으니 포용해야 한다.
그토록 절절한 삶은 ‘언제나 죽음 지척의 일’(<주저앉은 상엿집>)이며 ‘한바탕 부유’(<공중무덤>)이다. 또한 ‘그것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저녁 하늘 위 무심한 붉은 구름. 말없이 돌아가는 죽지 흰 새 몇, 그 아래 조용히 팔을 거두어들이는 잎 큰 후박 나무들. 저 홀로 푸르러 어두워가는 느티나무 그늘 아래’(<다만 흘러가는 것들>)에서의 쓸쓸함, 그 견딤의 과정이다.
결국 나는 현실 생활에서 정체를 몰라 길을 헤매는 이들과 전혀 다르 다. 우리를 둘러싼 불안에 휩싸여 시달리지 않고, 수시로 삶을 부인해야 하는 경우도 없다. 고통마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엄원태의 시에 자못 숙연함이 감도는 이유다.
고통마저 삶으로 받아들이는 숙연함
시인은 끝내 자신의 내면세계에 도달하기까지 수많은 고통이 점철돼 있다. 거기에 도달해가는 과정은 비장 하기도 하다. ‘덩치가 북극곰만 하’고 ‘무려 구백구십 킬로그램에 이’르는 외로움을 ‘제 몸에 저장된 고독을 태우면서 버텨’(<극지에서>)낸 후에야 ‘먼 우레처럼/다시 올’(<강 건너는 누떼처럼>)수 있다. 온전히 내 안의 ‘너’ 와 직면해 삶을 껴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인에게 현실은 ‘좀처럼 나아질 것 없는’ ‘희망에다 또 호프’(<희 망호프집>)인 고문이다. 그렇다고 절망에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스스로 상처를 드러내고 울부짖지도 않는다. 그래서 상처를 미봉하려는 것이 아니라 긍정의 외피로 감추어두려 하지도 않는다.
무상한 눈길로 소멸을 인정하는 시인의 육성은 가뭇없이 사라져가는 것에 보내는 애틋한 빛이다.
그 빛은 예언이다.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라는 시인의 예언은 ‘주검을 딛고, 죽음을 건너는 무수한 발굽들’ 즉 ‘어쩔 수 없이, 네가 나를 건너가는 방식이다.’
이규성
아시아경제신문 사회문화부 선임기자. 1963 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했다. 대학 시절엔 문예 집단 ‘진군나팔’에 참여하며 진보 성향의 문청 시절을 보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