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엄한 유교 나라 조선이 낳은 시기(詩妓)의 삶과 사랑
이매창 평전
(김준형 지음 | 한겨레출판 펴냄)
김준형의 《이매창 평전》(한겨레출판, 2012)는 조선 중기에 생존했던 ‘기생 시인’ 이매창(1573~1610)에 관한 평전이다. 흔히 기생 시인이라고 하면, 한국인들은 황진이를 떠올린다. 그녀의 인기(?)는 허다한 소설가가 그녀를 소재로 소설을 쓴 것이나 그녀의 일생이 되풀이 영화화되었던 사실로 입증된다.
하지만 문학적 업적으로 따지자면, 황진이보다 거의 30년쯤 뒤에 태어난 후배 시인 이매창이 훨씬 내실 있는 작품 활동을 했다. 황진이가 고작 10여 수 안팎의 시조와 한시를 남겨놓았던 것에 반해, 매창은 《매창집》이라는 유고 시집에 건수된 한시만 해도 무려 57편이 된다.
황진이를 월등히 뛰어넘은 문학적 성취
황진이나 매창은 기생이다. 그런데 후대 사람들이 이들의 삶이나 문학을 이야기할 때 그들의 삶을 제약하고 있었던 기생 제도는 쏙 빼고 그들의 문학이 성취한 정신적 높이나 지조 만을 이야기한다. 예컨대, 황진이에 대한 널리 알려진 전설 가운데 그녀가 기생이 되기로 결심한 사연이 그렇다. 그녀 나이 열다섯 때, 같은 동네에 사는 젊은이가 그녀를 사모하다가 죽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아 기생이 되기로 했다는 이야기 말이 다. 하지만 황진이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의 첩이었으므로 노비수모법(奴婢隨母法)에 따라 그녀는 애당초 기생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물론 원래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지만 그 일을 계기로 황진이가 자신의 운명을 적극 수긍하게 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해석조차도 조선시대의 기생 제도와 남성 가부장제에 포획된 기생의 원통한 사정을 드러내고 있지 그 역은 아니다. 조선시대 천민 계급(승려·상민·노비·기생)에 대한 역사적 복권은 그 시대의 제도와 관습을 비판적으로 적시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보통 사람’을 위한 또 하나의 영웅 사관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런 기우를 씻어 내려는 듯이 《이매창 평전》의 초반부는 기생 제도와 그들의 삶에 대한 자세한 고증으로 시작한다. 여기에 지은이의 분명한 입장이 있다. 이매창은 기생 ‘시인’이 아니라 ‘기생’이라는 것.
지은이의 말로 반복하면, ‘매창은 기생이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93쪽) 조선의 행정구역은 고을의 규모에 따라 부(府)-목(牧)-군 (郡)-현(縣) 순으로 점차 작아지는데, 부안같이 작은 고을에는 관비의 수가 10여 명을 넘지 않았다(참고로 어느 고을에서나 남자 관노는 여자 관비보다 많았다). 관비는 관아에서 허드렛 일을 하는 수급비(水汲婢)와 각종 모임에 동원되어 흥을 돋우는 관기(官妓=妓生)로 양분되는데, 매창의 어머니가 어느 쪽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좋든 싫든 관비가 되어야만 하는 매창의 입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수급비가 아니라 기생이 되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었을 터다’(25쪽)라는 지은이의 평에 눈길이 간다.
조선의 기생 제도는 무엇을 남겼나
색안경을 끼고 보기로 하면 지은이의 이런 토도 ‘여자라면 뼈 빠지게 일하는 여공보다 놀며 돈을 버는 호스티스를 더 선호할 것’이라는 남성 판타지의 일종일 수 있다. 하지만 역사책을 읽을 때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가 볼 필요도 있다. 허드렛일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런 가전제품이 없었던 그시절에 수급비가 감당해야 하는 노동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천민 계급의 신분 상승이 거의 불가능한 시절, 관기는 고을 수령의 묵인 아래 양반가의 첩이 될 수 있었 다(‘첩’ 정도가 관기가 누릴 수 있는 신분 상승의 최고치였지 어사의 정실부인이 되는 ‘춘향의 팔자’는 말 그대로 ‘기생의 로망’일 뿐이다).
기생에도 등급이 있다. 가장 상위 등급에 경기(京妓)가 있는 데, 서울에 있는 장악원에 소속된 이들은 국가의 주요 연회에 불려가 음악과 춤으로 흥을 돋우었다. 그 밑 등급이 매창처럼 지방 관아에 소속된 관기로, 서울에 큰 연회가 있을 때 파견되 거나 지방에 찾아온 외국 사신이나 중앙 관리를 접대했다. 그리고 가장 아래 등급인 영기(營妓)는 북방의 군영에서 군대를 위안하고 세탁 등의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이처럼 조선의 기생은 오늘날과 같은 매춘 사업자에게 고용된 존재가 아니라 나라의 공물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의 기생 제도는 국가를 지탱하는 중요한 노역 체계 가운데 하나였다. 근엄한 유교 국가인 조선이 이런 ‘성 노역 체계’를 유지한 까닭은 무엇일까?
조선 왕조 특유의 기생 제도를 연구한 가와무라 미나토의 《말하는 꽃 기생》(소담출판사, 2002)에 따르면, ‘기생 폐지를 외치는 폐절의 목소리가 조선시대에 한 번도 사그라든 적이 없었’(63쪽)지만 늘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현실적 힘이 더 컸다고 한다. 일례로 대부분의 신하가 기생 제도 폐지를 건의했을 때, 세종은 ‘만약 기생 제도를 폐지했을 때, 이를테면 봉명사 신(奉命使臣)들이 남의 아내라도 겁탈하여 빼앗아간다고 한다 면, 그런 일을 당한 머리 좋은 호걸들이 자신의 아내를 겁탈한 봉명사신을 죽여버리는 죄를 저지르게 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53쪽)라는 소수 의견에 손을 들어주었다.
관기가 없으면 왕명을 받은 사신이 지방에 내려가 여염집 여자를 건드리게 된다는 논리였다.
가와무라 미나토는 조선의 기생 제도는 왕후 귀족의 위안물일 뿐 아니라 국내의 정치적 안정과 외교상 필요 때문에 폐절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왕조 오백 년은 ‘기생 정치’ ‘기생 외교’에 의해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조선 왕조는 기생 없이는 성립될 수없는 국가 체제를 계속 유지해가면서 커다란 ‘유곽 국가’를 만
들고자 했”(65~66쪽)다는 턱없는 소리와 134~135쪽의 헛소 리, 그리고 307쪽의 흉을 꾹 참을 수만 있다면,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죽은 지 58년 만에 내놓은 유고 시집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매창(梅窓)의 본명은 계유년에 태어 났다고 계생(癸生)인데, 7~8세가 되어 아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이름의 첫 글자만 계수나무 계자로 바꾸어 계생(桂生) 을 기명으로 삼았다. 서른여덟이라는 생애 동안 그녀는 수백 편의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매창집》은 그녀가 죽고 난 58년 후에 부안의 아전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던 매창의 시를 모아 낸 유고 시집이다.
《매창집》에 대한 일반적인 정설은 이 시집을 매창이 열네살 때 만난 마흔두 살 시객 유희경과의 애틋한 사랑 노래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평전을 쓴 김준형은 “《매창집》에는 유희경과의 관계를 ‘직접’ 확인해주는 시는 단 한 편도 없다” (92쪽)고 단언한다. 《매창집》 전체를 유희경과의 사랑을 그린 시집으로 해석하려는 정설의 배후에는, 매창을 일부종사하는 지조 있는 ‘기녀 문인’으로 주조하려는 조선시대의 성리학적 이념이 가로놓여 있다.
지은이는 매창의 진면목을 보기 위해서는 유희경에게서 매창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녀의 시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허균(1569~1618)과의 만남을 꼽는 다. 매창 나이 스물아홉 살 때 만난 허균은 당대 최고의 문장 가이자 시비평가였으며, 중국에 이름을 드날린 허난설헌의 남동생이다. 허균이 문우로서 매창에게 준 영향은 지대했고, 매창이 살아생전 조선 최고의 시기(詩妓)로 알려지게 된 것도 허균의 아무 조건 없는 도움이 컸다.
장정일
시인, 소설가, 극작가 겸 서평가.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에 시를 발표한 이래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글쓰기를 해왔다. 대표작으로 《햄버거에 대한 명상》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이상 시집), 《아담이 눈뜰 때》 《구월의 이틀》(이상 소설), 《긴 여행》 《고르비 전당포》(이상 희곡집)가 있다. 이외에 《장정일 삼국지》 전 10권, 에세이 《공부》 《장정일의 독서 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시리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