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존재의 본성에 관한 새로운 발견
라마찬드란 박사의 두뇌 실험실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 샌드라 블레이크스리 지음 신상규 옮김 | 바다출판사 펴냄)
우선 의사와 환자 사이의 다음 대화를 보자.
나는 어떤 여자의 생기 없는 왼손을 그녀의 눈앞에 보이며 “이 것은 누구의 팔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녀는 내 눈을 쳐다보 면서 화를 내며 말했다. “이게 도대체 누구 팔인데 내 침대 속에 있는 거예요?” “누구 팔일까요?” “내 오빠의 팔입니다.”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왜 그것이 오빠의 팔이라고 생각합 니까?” “크고 털이 많아서요. 내 팔에는 털이 없습니다.”
여자는 제 몸에 멀쩡히 붙어 있는 팔이 오빠의 팔이란다. 아무리 설득하고, 만져보라고 하고, 명백한 사실을 지적해도 믿음은 변하지 않는다. 환자의 과거력이나 뇌 영상 사진을 보여주지 않은 채 의사들에게 이 대화를 보여주면 어떻게 반응할까? 우선 프로이트가 부인(denial) 혹은 부정(negation)이라고 부른 방어 기제를 떠올릴 것이다. 심한 신경증 그리고 정신증에서 흔히 보이는 기제들이다. 그리고 설득 불가능한 비현실적 사고라는 의미에서 망상을 거론할 것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미쳤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대화는 《라마찬드란 박사의 두뇌 실험실》 중에서 제7장 <왜 두뇌는 변명에 익숙해졌을까?>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 환자는 질병인식불능증으로 진단받은 뇌경색 환자다. 의사는 지금 정신과 환자가 아니라 신경과 환자와 인터뷰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오른쪽 두정엽 쪽에 혈관이 막히면서 왼쪽 팔 마비가 왔을 뿐이며, 한 번도 정신과적 문제를 가져본 적이 없고, 이 인터뷰 당시에도 정신증을 의심할 만한 다른 어떤 증상도 보이지 않았다.
라마찬드란에 따르면 이는 우반구 감각 입력에 문제가 생기면서 좌반구가 혼자 자신의 내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현실을 왜곡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상황이다. 우측 두정엽의 혈류를 잠시 정지시키면, 우리는 모두 같은 증상을 겪게 된다. 곧, 뇌의 특정 부분이 놀라울 정도로 우리의 현실 인식을 왜곡시키며(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현상은 가역적이라는 것이다. 피가 다시 흐르기 시작하면 우리의 현실 감각도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부적절감도, 상황의 불합리함도 느끼지 못한다. 마치 광기에 빠진 환자들이 그 상황에 대해서 절대적 확신을 하듯이 우리도 어떤 논리나 설득도 통하지 않는 절대적 확신 속에서 자신의 왼팔을 부인(어떤 환자는 이괴이한 덩어리를 제발 잘라달라고 의사를 괴롭히기도 한다)하게 된다. 라마찬드란은 여기서 더 이야기를 확장하여 애당초 우리의 감각과 환각을 구별할 어떤 기준도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녀는(그리고 우리는) 미친 것인가 아닌가? 우리의 합리성이 이토록 쉽게 붕괴할 수 있다면, 우리가 자명하게 여기는 현실이 이처럼 가볍게 휘어질 수 있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우리의 멀쩡함을 확신할 수 있을까?
인도 태생의 뇌과학 권위자로 <뉴스위크>가 센추리클럽(가장 주목할 만한 21세기 뛰어난 인물) 10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한 세계적 신경과학자 라마찬드란의 이 책은 이처럼 우리의 정신에 대한, 나아가 인간 존재의 본성에 관한 새롭고 놀라운 발견으로 가득하다.
책에는 이외에도 잘린 팔다리가 여전히 거기 있는 것처럼 느끼는 환상지 이야기, 백치천재라 부르는 서번트 신드롬, 종교적 경험과 뇌 연관성, 다중인격장애, 의식과 자아와 같은 철학과 심리학과 과학을 관통하는 수많은 주제가 가득 담겨 있다. 인간 존재를 탐구하는 모든 이들의 일독을 권한다.
김건종
정신과 의사.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신경정신과 수련을 마쳤다. 현재 한국정신분석학회 심층반 고급 과정을 수련 중이며, 성안드레 아병원 과장이다. 지독한 책 중독자로, 2008년과 2009년에 네이버 책 부문 파워 블로거로 선정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