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넣을 것 없음’과 ‘더 뺄 것 없음’의 차이를 말하다
단순함의 법칙
(존 마에다 지음 | 윤송이 옮김 | 럭스미디어 펴냄)
며칠 전 중식당에서 황제짬뽕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짬뽕을 주문했다. 가격은 조금 비쌌지만 황제라는 단어에 뇌가 충동적 으로 반응했다. 잠시 후 일반 그릇의 두 배쯤 되는 크기의 그릇에 내용물을 꽉 채운 요리가 등장했다. 다른 요리를 하다가 남은 재료를 모두 쏟아 부은 듯이 신선하지도 않고 서로 궁합도 맞지 않는 해산물로 가득했다. ‘황제’에게 ‘진상’하기에는 수준이 많이 떨어져 보였다. 결국 몇 젓가락 끼적대다가 나와버렸다. 처음에는 억울한 마음이 들다가 나중에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변했다. 황제짬뽕이라는 네이밍에 속아서 주문한 것이 억울했고, 제법 큰 규모의 식당임에도 불구하고 곱빼기와 프리미엄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필자는 일반 짬뽕에 넣지 않는 귀한 해산물 한두 가지를 더 넣어주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 했을 것이다.
늘리기보다는 줄이기에 더 많은 내공 필요
아이팟과 구글의 등장으로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을, 적은 것이 많은 것을 능가할 수있다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여전히 복잡하고 많을수록 더 좋은 것으로 판단하는 생산자들이 있는 듯하다. 단순한 것과 적다는 것이 모자라거나 부족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고 많은 것을 줄이는데 더 많은 내공이 필요하다. 불현듯 이 책이 떠올랐 다. 이 책의 저자인 존 마에다는 컴퓨터 과학자이자 디자이너로서 단순함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한 실력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도 인정한 것처럼 정리가 덜 된 상황에서 글을 썼기 때문에 단순화와 관련된 여러 개념의 인과관계까지는 고려하지 못하고 개념을 나열하는 데 그쳤다. 즉, 저자는 단순함의 법칙으로 줄이기, 숨기기, 조직화, 시간, 학습, 차이, 문맥, 감정, 신뢰 등 아홉 가지에 대해서 나열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서로 위계가 다른 개념을 독립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개념 하나하나는 이해가 되지만 이들 개념이 서로 어떻게 엮여 있는지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필자는 저자가 설명하는 아홉 가지 개념을 단순화의 방법, 단순화의 결과, 단순함의 한계 등의 세 가지 카테고리로 묶어보았다. 줄이기, 숨기기, 조직화, 신뢰 등은 단순화의 방법 카테고리에 포함하고, 시간과 학습은 단순함의 결과 카테고리에 포함하며, 차이와 문맥과 감정 등은 단순화의 한계 카테고리에 포함한다.
완벽함은 더 넣을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더는 뺄 것이 없는 상태라는 말이 있다. 미국에서 야후와 라이코스 등 인터넷 검색 사이트가 경쟁적으로 더많은 콘텐츠를 넣고 있을 때 구글은 검색창을 제외한 모든 콘텐츠를 메인 화면 에서 제거했다. 검색 기능 이외에는 모두 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애플의 MP3 플레이어인 아이팟 또한 기능을 극단적으로 축소한 제품이다. 음악을 검색하고 듣는 기능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빼버렸기 때문이다. 사용하지도 않는 기능을 넘치도록 탑재하여 높은 가격을 매기는 경쟁사 제품과 달리 아이팟은 그러한 기능을 과감히 제거함으로써 가격을 낮추고 크기를 줄일 수 있었다. 소비 자가 얼마나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줄이기의 극치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고정관념조차 깨는 데 있다. 바늘 없는 주사기, 날개 없는 선풍기가 대표적인 예다.
만약 더는 줄일 수 없는 기능이라도 자주 사용하지 않거나 지나치게 복잡한 것은 숨기면 된다. 컴퓨터의 메뉴바와 폴더가 대표적이다. 메뉴바를 클릭하면 자세한 메뉴가 펼쳐지고 폴더를 클릭하면 폴더 안에 저장된 파일을 볼 수 있다. 온·오프와 온도 조절 버튼만 보이고 나머지 복잡한 버튼은 숨겨놓은 에어컨 리모컨이나 키보드를 태블릿 아래 숨겨놓은 슬라이드형 태블릿에서도 숨기기를 이용한 단순화를 확인할 수 있다.
바늘 없는 주사기, 날개 없는 선풍기
저자는 아무리 복잡해 보이는 것이라도 SLIP(Sort, Label, Integrate, Prioritize)라는 방법으로 단순화할 수있다고 주장한다. SLIP는 분류하고, 이름 정하고, 통합하고, 우선순위 정하는 것을 뜻한다. 정리 컨설턴트인 윤선현 씨가쓴 《하루 15분 정리의 힘》이라는 책에서 하루 15분만 투자해서 자신의 공간과 시간, 인맥을 정리하면 돈과 시간,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필자가 아홉 가지 단순화 개념을 단순화의 방법, 단순화의 결과, 단순함의 한계 등으로 묶은 것도 조직화의 한 예다.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신뢰도 단순화의 한 방법 이다. 신뢰하면 단순화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복잡해지는 것이다. 횟집에서 ‘아무거나’라는 메뉴를 시킬 수 있는 것은 주방장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신뢰를 통해서 메뉴를 고르는 시간과 고민을 절약할 수 있다. 다만 신뢰라는 단순화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테스트를 견뎌내야 한다.
단순화의 가장 큰 이점 중 하나가 시간을 절약해준다는 것이다. 한 방송국에서 소개한 중식당의 요리사는 굴과 바지 락만을 사용하여 섭씨 600도의 프라이팬에서 빠르게 요리하기 때문에 재료 고유의 맛을 살리면서 요리 시간도 절약했다고 한다. 맥도날드의 창업자는 손님들에게 좀 더 빠르게 햄버거를 서비스하기 위하여 종업원이 직접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는 방식에서 손님이 직접 주문하고 음식을 받아가는 셀프서비스로 바꿈으로써 패스트푸드의 한 획을 그었다.
단순화의 또 다른 장점은 학습이 쉽고 빠르다는 데 있다.
학습이 아예 필요 없을 때도 있다. 사용설명서 책자가 들어 있지 않은 아이폰 박스를 열었을 때의 당혹감이 아직도 기억 난다. 하지만 아이폰을 켜고 사용해보면 애플이 사용설명서를 만들지 않은 이유를 바로 알 수 있다. 원하는 기능을 사용 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간단하고 직관적인 유저인 터페이스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함에는 반드시 문맥이 고려되어야
사실 단순함과 복잡함은 서로 끌어당긴다. 복잡함이 있어야 단순함이 살아난다. 단순함만 있으면 지루하다. 복잡함이 극으로 치달으면 단순함을 부르고 단순함이 지나치면 복잡함을 부른다. 단순함과 복잡함의 차이가 충분히 벌어지면 방아 쇠가 당겨지고 상황이 역전된다. 시장이 단순함을 향해 가고 있는지 복잡함을 향해 가고 있는지 예민하게 지켜봐야 한다.
문맥이 결여된 단순화도 문제다. 아이폰이 아닌 스마트폰 들이 아이폰과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아직까지 아이폰에 내재된 문맥까지는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산세가 복잡한 산에는 길을 잃지 말라고 나뭇가지에 리본을 매달아 두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리본의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리본만 보고 걷고 리본의 거리가 너무 멀면 다음 리본이 나올 때까지 불안하게 걷게 된다. 적정한 거리에 리본을 매다는 것이 문맥이다.
단순함을 추구할 때 반드시 문맥을 고려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능이 요구되는지 미리 계산하고 설계하지 않은 단순화는 사용자에게 재앙이다.
단순화 과정에서 희생되기 쉬운 가치가 개성과 감정이다.
누구나 미니멀리즘처럼 지극히 단순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디자인은 정체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 다. 스마트폰에 디자인이 화려한 커버를 씌우고 자신의 자동 차에 스티커를 붙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규영
경제실용서 출판평론가. 서울대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마케팅을 전공한후 LG경제연구원에 입사해 마케팅 전략 컨설팅을 수행했다. 오랜 연구와 실험을 통해 밝혀낸 뇌를 혁신하는 방법을 세상에 선보이기 위해 Brain Innovation Group을 설립해 운영 중이다. 저서로는 《네 탓이 아니라 뇌 탓이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