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뜰을 남들과 공유하는 크라우드소싱
크라우드소싱
(제프 하우 지음 | 박슬라 옮김 | 리더스북 펴냄)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던 GE의 잭웰치는 한 인터뷰에서 아웃소싱 (outsourcing)을 ‘내 뒤뜰이 누군가의 앞뜰이 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예를 들어, 카드회사나 통신회사의 입장에서 콜센터는 개발이나 마케팅 부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는 부서이지만 유베이스(Ubase)처럼 타사의 콜센터를 대행하는 회사라면 이야기가 달라 진다. 유베이스에서는 콜센터가 앞뜰이고 다른 부서가 뒤뜰이다.
잭 웰치의 말을 인용하여 크라우드소싱 (crowdsourcing)을 정의하면 ‘내 앞뜰을 남들과 공유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듯하다. 세계 최대의 소비재 제조회사인 P&G는 자사의 핵심 역량인 제품 디자인과 개발에 외부 전문가를 참여시키는, 이른바 C&D(Connect & Development)를 통해서 경영 혁신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P&G는 자체적으로 외부 전문가 네트워크를 운영하면서 동시에 이노센티브 (Innocentive)와 같은 크라우드소싱 기업 과도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결과적 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초일류 과학 자와 유능한 아마추어 과학자를 블랙홀처럼 자신의 개발 인력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티셔츠 디자인 및 판매에 크라우드소싱을 접목한 트레드리스(Threadless)는 아마추어 작가 들이 직접 작품을 올리고 서로를 평가하여 수상자를 가리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수상된 작품은 티셔츠로 제작해 판매하며, 가수나 영화배우까지 입을 정도로 이슈가 된다. 티셔츠를 캔버스 삼아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소위 길거리 문화권에 속한 작가들이 매달 수만 건에 이르는 작품을이 사이트에 전시한다. 수상자에게는 금전적인 보상이 주어지지만 이들을 움직이는 동력은 단순히 금전적 보상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것 으로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자존감과 만족감이다.
특정한 자격 요건보다 실력이 우선
아이스톡포토(istockphoto)는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의 커뮤니티로 출발했다.
이들은 사이트에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을 올리고 남이 올린 사진을 평가한다.
누군가는 사진 찍는 법을 가르치고, 다른 누군가는 배우며 자연스럽게 관계가 형성된다. 이 커뮤니티 사이트는 계약된 전문가들이 찍은 사진 이미지만을 판매하는 기존 사이트보다 훨씬 저렴한 금액으로 사진 이미지를 판매함으로써 사진 이미지 시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아이스톡포토는 커뮤니티가 기업과 경쟁할 수 있다는 사례를 남겼다. 같은 취미를 가진 아마추어들이 한데 모여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거나, 혹은 아주 적은 금액만 받으면서 정식으로 고용된 전문가 직원이 하던 일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크라우드소싱은 일종의 완벽한 실력주의 사회다. 출신이나 인종, 성별, 나이는 물론 어떤 자격 요건도 따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결과물의 품질뿐이다. 인터넷이 사람을 고립시킬 것이라는 반유토피아적 비전과는 반대로 크라우드소싱은 사람들 사이에 유례없는 수준의 협력과 의미 있는 교류를 촉진한다.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는 지리적 위치나 개인적 배경은 이러한 교류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크라우드소싱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구석진 곳에서 천재들을 발굴하는 거대한 인재 발굴 메커니즘과도 같다. 크라우드소싱은 지적 수준과 교육 수준이 높고 매우 헌신적이며,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아마추어인 프로-암(pro-am)의 세계다.
지난 100~200년에 걸쳐 학문의 전문화가 심화되면서 예술과 과학 깊숙이 박혀 있던 아마추어 정신의 뿌리가 점차 쇠약해졌지만 사실 이들 분야의 발전을 이끈 세력은 전문가라는 호칭을 모욕으로 받아들이면서 아마추어라는 망토를 걸쳤던 프로-암들이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귀납적 방법론을 확립한 과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직업은 변호사였다.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틀을 마련한 철학자로 꼽히는 장 자크 루소는 오페라 작가였다.
크라우드소싱의 핵심은 온라인 커뮤니티
인터넷의 발달과 스마트폰의 보급이 깊이 잠들어 있던 프로-암들의 DNA를 깨우고 있다. 이제는 아마추어들도 인터 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전문가 못지않게 다양한 자료와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이른바 정보의 민주화 시대가 열린 것이 다. 이노센티브를 대상으로 한 MIT의 한 연구에서 해당 문제와 관련된 분야의 경험이 적은 사람이 오히려 문제를 성공적 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프로-암의 경제적 가치를 입증하였다. 요즘 유행하는 통섭과도 일맥상통하는 연구 결과다.
저자에 의하면, 크라우드소싱은 비약적으로 발전한 네가지 기반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 첫째로, 새로운 생산 방식인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운동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아마추어 집단의 등장을 꼽는다. 둘째는 인터넷의 성장을, 셋째는 여러 가지 저렴한 도구의 출현을 내세웠다. 거대 자본을 가진 기업에만 속해 있던 힘을 소비자에게 안겨주었다는 공통 점이 그 이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세 가지 현상을 굳건한 원동력으로 탈바꿈시킨 조직화 능력, 즉 크라우드소싱의 핵심 축인 온라인 커뮤니티의 진화라고 말한다.
사실 크라우드소싱처럼 간단한 비즈니스 모델도 없다.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만들 재료를 제공하고 결과물을 사이트에 게시한 다음 결과물을 팔거나 온라인 광고를 유치하면 된다. 하지만 크라우드소싱을 공짜 점심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은 어렵고, 유지하기는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커뮤니티 회원들이 우리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커뮤니티 회원들을 위해서 일한다는 마음 가짐이 가장 중요하다. 또한 커뮤니티 회원들이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선보이고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디테일하게 운영해야 한다. 회원들이 커뮤니티에 가입해서 활동하는 목적은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자존감, 사회적 교류, 금전적 보상 등 커뮤니티의 성격에 적합한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사업적 냄새를 노골적으로 풍기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도 중요하다.
시대적 흐름인 통섭의 의미와도 일맥상통해
지금 크라우드소싱을 이용한 집단지성의 상징으로 여겨 지는 위키피디아(Wikipedia). 그러나 그 전신인 누피디아 (Nupedia)는 초창기만 해도 크라우드소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누피디아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를 두어 회원들이 투고한 항목을 7단계에 달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사이트에 올렸다. 앞에서 언급한 스터전의 법칙에 따라 대부분의 항목이 폐기되었으며 아주 극소수의 항목만이 사이트에 게재되었다. 당연히 사이트에 게재된 항목의 수는 매우 천천히 증가하였고 자신이 투고한 글이 게재되지 않는 사이트에 머무를 회원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누피디아는 크라 우드소싱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한 후에 사이트의 구조를 획기적으로 바꿨다. 회원 누구나 사이트에서 항목을 게재할 수있게 하고 자문위원회에서 하던 평가를 회원 스스로 하게 하자마자 사이트에 게재된 항목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하였다. 2009년 기준으로 위키피디아 영어 사이트에만 220만 개의 항목이 등록되어 있었는데, 이는 브리태니커 대백과 사전에 수록된 항목의 23배에 이르는 수치다.
이규영
경제실용서 출판평론가. 서울대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마케팅을 전공한후 LG경제연구원에 입사해 마케팅 전략 컨설팅을 수행했다. 오랜 연구와 실험을 통해 밝혀낸 뇌를 혁신하는 방법을 세상에 선보이기 위해 Brain Innovation Group을 설립해 운영 중이다. 저서로는 《네 탓이 아니라 뇌 탓이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