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의 역사를 온몸으로 살았던
흑인 노예의 증언
어느 도망친 노예의 일생
(미겔 바르넷 지음 | 박수경, 조혜진 옮김 | 인천문화재단 펴냄)
나는 제목을 접한 당신이 호기심을 가질 수도, 혹은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책 한 권을 들고 망설인다. 책장을 덮고 생각에 잠긴다. 1966년에 출간된 쿠바의 ‘도망친’ 흑인 노예 이야기. 세계를 돌고 돌아 국내에는 2009년에 도착했지만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그럼 에도 나는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하기로 한다. 135세까지 살다 세상을 떠난 실존 인물, 책의 화자이자 주인공 에스테반 몬테 호의 목소리가 너무 생생하기 때문이다.
그의 구술을 책으로 옮겨 세상에 소개한 작가 미겔 바르넷 또한 그런 마음이었을 거라 짐작한다.
……난 그런 일을 해본 적은 없어. 주인들과 가까이 지내는 건 딱 질색이었거든. 나는 태어날 때부터 도망 다니는 노예였던 거지. _본문 35쪽 중에서
100세를 넘긴 노인이 먼 산을 바라보 면서 자신의 지난날을 회고하는 이 장면처럼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노인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혹독하고 반인륜적인 노예 생활을 회고하면서도 지난날을 한탄하거나 경탄조의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가끔은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옛날이야 기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러나 에스테반 몬테호는 한 세기 넘게 살아오면서 노예로 태어나 노예제 폐지를 경험하고 쿠바의 해방 전쟁까지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은 인물이다.
도망 노예로 살아온 흑인의 증언 그대로 옮겨
처음 도망가려고 했던 때를 절대 잊을 수 없어. 그때 나는 도망치다가 잡혀서 다시 족쇄를 차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몇 년 동안 사로잡혀 살았거든. 하지만 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었어. _본문 61쪽 중에서
홀연히 도망친 그는 산사람이 된다. 산에서 사냥을 하면서 안전한 곳으로 거처를 옮겨 다닌다. 그리고 노예제가 폐지되었을 때 비로소 산에서 내려온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에는 변함이 없었다. 노예들의 일이었던 사탕수수 농장의 제당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약간의 보수를 받고 가혹한 채찍질과 형벌만 멎었을 뿐 노동이 가혹하기는 노예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평생 산이 좋았어. 하지만 노예제가 폐지되니 산으로 도망친 노예의 삶도 끝났지. 사람들이 외쳐대는 소리를 통해 노예제가 없어진 것을 알았기에, 산에서 내려왔어. 사람들은 “이제 우리는 자유다!”라고 외쳤지. 난 그런 것 같지 않았어.
(……) “여보세요, 이제 우리가 노예가 아니라는 것이 정말인가요?”
이렇게 대답해주더군.
“그렇다네. 이제 우리는 자유야.” _본문 75~76쪽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자유’를 보장해줄 수 있다는 것이 역사의 모순일 터이지만, 전쟁과 저항은 늘 자유를 얻기 위해 진행되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소설일까?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작품은 분명한 소설이다.
‘한 도망 노예가 살았던 역사 실화소설’ 정도로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구분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대로 구술 형태로 풀어냈다는 점일 것인데, 그 점이 바로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명징하게 드러내면서 일종의 환상적 요소까지도 품게 되는 요인이 된다.
작가 미겔 바르넷은 이 작품을 펴내면서 ‘증언소설’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개척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문학적으로 승화될 수 있는 길을 열었던 것인데 그는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서술한다. 증언소설은 작가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던 인물들에게 적절한 빛을 비추어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어두운 영역 속에 구깃구깃 접혀 있는 안쪽을 환하게 밝혀줄 반사등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노예 막사 안에서의 삶, 그들의 종교의식, 질병의 치유, 성생활 같은 것을 다른 누가 말해줄 수 있을까.
작가, 이 소설 통해 ‘증언소설’ 장르 개척해
작가는 구술의 처음과 맨 끝에만 잠깐 직접적인 개입을할 뿐이다. 그래서 독자는 작가가 증언자를 만나고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고, 책으로 옮겨낸 과정을 함께 만나게 된다.
책을 쓸 당시 작가 미겔 바르넷은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민족학을 연구하는 쿠바의 20대 청년과 도망 노예로 살았던 노인이 만난다. 프롤로그를 거쳐 본문으로 넘어가면 15 킬로그램은 족히 넘을 테슬라 녹음기를 들고 노인을 만나러 떠나는 한 젊은이와 퇴역군인 쉼터에서 모자를 쓰고 앉아 있는 한 노인을 상상하게 된다. 이들 사이에는 80년이라는 세월의 격차가 있다. 노인의 입에서는 청년이 살지 못했던 시절의 역사가 풀어져 나온다. 묵직한 녹음기의 감촉을 작가의 어깨가 기억하듯이, 그 기억의 감촉이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쿠바는 1510년부터 1900년이 될 때까지 스페인의 식민 지배에 놓여 있었다. 선주민들의 인구가 줄어들면서 아프리 카의 흑인들을 이주시켜 노예 노동을 가속화했고, 흑인의 비율이 쿠바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 다. 에스테반 몬테호는 19세기 중반에 태어나 한 세기를 넘게산 사람이다. 여전히 스페인의 지배에 있었던 쿠바는 ‘해방’ 을 외치며 20세기를 해방과 함께 시작했지만, 스페인의 빈자 리를 미국이 대신했을 뿐이다. 유명한 ‘메인호 폭발사건’으로 미국의 개입이 시작된 것이다. 증언은 쿠바의 독립 때까지 이어진다.
내가 짐승처럼 살았다고? 천만에!
왜 메인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들고일어나지 않았느냐 말이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려고 자기네들끼리 짜고 그 배를 침몰시켜버렸다는 건 어린아이도 알고 있었어.
그때 사람들이 들고일어났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거야. _본문 232쪽
덤덤한 그의 증언에 가끔 속기도(?) 했지만, 책장을 덮고 났을 때 가슴 한구석이 시렸다. 그런 내게 그가 남긴 가장 인상적인 다음의 말이 큰 위안으로 남았다.
“이놈은 산에서 짐승처럼 살았어요.”
그래서 나중에 그들을 만나서 말했지.
“이봐, 채찍질을 당하면서 짐승처럼 산 건 당신들이야.”
사실 도망가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나 같은 도망 노예들이 짐승이라고 생각했어. 세상에는 뭘 모르는 사람들이 늘 있는 법이지. 무언가를 알려면 그렇게 살아봐야 해.
책에 호기심을 느낀 당신을 위해 덧붙인다. 인터넷 서점에 ‘품절’로 표기된 이 책이 내 손에 어떻게 들어왔을까.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작가들을 한국에 초청하는 ‘알라문학포럼’에 방문했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 책을 당신에게 소개하면서, 판권에 있는 인천문화재 단에 전화를 걸어 문의했다. 다행히 책은 품절이 아니라고 했다. 다만, 유통되지 않을 뿐이라는 답변이 비서구권 문학의 현주소 같아 씁쓸했지만 품절이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해야 했다.
신혜정
시인. 본지 편집장을 거쳐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본지가 주관하는 정기 북콘서트 <수요북콘>을 총괄 기획하고 있다. 서울산업대(현 과학기술대)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다. 2001년 <스프링 위를 달리는 말>로 대한매일신문(현 서울신문) 신춘문 예에서 시 부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라면의 정치학》이 있다.